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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걷다보면] 천천히 천천히

제주올레 트레킹 11회

심샘과 같이 내려왔던 일행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올레길에서 처음으로 심샘과 단 둘이 걷게 되었다. 심샘이 운영하는 심산스쿨에
는 심샘 이외에도 김대우 감독님, 박헌수 감독님, 노효정 감독님 등 영화계의 쟁쟁하신 분들이 시나리오를 가르친다. 또 와인반과 신화반, 전각반, 그리고 사진반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사진반 강의를 하고 있다.
 
심샘은 산을 좋아하신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름도 ‘산’으로 개명했을까. 에베레스트 휴먼 원정대를 다녀오기도 했고 세계 등반사에 관한 책도 출간했다. 영화, 와인, 전각, 책 쓰기 뭐 못하는 게 없는 매력 덩어리다. 심샘만큼 인생을 멋들어지게 사는 사람도 드물다.
 
아! 못하는 게 하나 있다(아니 안 하는 거다).
“야, 뭐 힘들게 카메라 들고 사진 찍냐. 그냥 사진 찍는 김진석이 데리고 다니면 되지!”라고 주장한다. 뭐,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래서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뭐 하러 어렵게 글을 쓰나, 글 잘 쓰시는 심샘하고 같이 다니면 되지.’
 
 원래 제주올레 심샘과 김진석이 같이 걷고, 선생님이 글을 쓰고 내가 사진을 찍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하지만 올레길에 그와 단둘이 걷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좀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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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코스에는 번외 코스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우도의 경우 1-1코스라고 한다. 오늘 심샘과 걷는 길은 7-1코스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에서부터 내륙 쪽으로 걸어 다시 외돌개까지 가는 코스다. 안개가 짙게 깔렸고 비가 보슬 보슬 내린다. 코스 시작점에 도착한 우리는 담배 한 대 피고 걷기 시작했다. 
 

심샘과 나란히 걷는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맞추던 나는 이내 포기하고 만다. 일반인보다 더 빠른 발걸음에, 동행하는 사진작가의 사진 찍는 것을 전혀 배려 안 해주는 심샘.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그냥 먼발치에서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내 속도와 리듬대로 걸었다. 한참 앞서 가던 심샘이 서서 손가락으로 바닥으로 가리킨다. 그리고는 곧 가던 길을 가신다.
 그가 가리키던 위치에 가보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애들 주먹만 한 달팽이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정말 두 눈 뜨고 지켜봐야 녀석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참 망설이다가 나도 달팽이처럼 누워버렸다. 비가 내리는 땅에 눕기. 이런 건 사진기자 시절에도 잘 안 하던 자세다. 여하튼 녀석과 눈높이를 맞추니 달팽이의 움직임이 잘 보인다. 그리고 최대한 심도를 줄여 달팽이를 찍었다. 찍고 나서 부리나케 심샘을 쫓아갔지만 그는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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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 달팽이 사진은 내 삶에 아주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걷는 마음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까지. 천천히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심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특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열악한 사람에게 느리게 사는 삶은 그저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속도와 성과에 열광하는 사회는 천천히 가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정신없이 그 속도에 맞추어 빠르게 살아간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단어가 필요했다.
 
천천히.
 
비가 와야지만 볼 수 있다는 엉또폭포. 폭포가 잘 보이는 곳에 심샘이 앉아 있다. 그의 등산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접이식 의자. 심샘은 걷기와 등산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동의하는 분이 꽤 많다. 제주올레 사무국장 안은주 선배도 접이식 의자 팬이다. 여하튼 부지런히 쫓아와서 떡 하니 앉아 쉬고 있는 심샘을 보니 얄밉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결국 심샘의 평소 지론대로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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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엉또폭포. 멀리서 보면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을 닮은 듯하다. 제법 운치가 있다. 한참 엉또폭포를 감상하고 고근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날씨가 맑다면 뒤로 한라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서귀포 전경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짙은 안개 때문에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없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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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비를 흠뻑 맞으며 아버지를 도와 논일을 하고 있다. 이곳이 하논분화구다. 제주도에서 논농사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아직 농사를 알 나이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열심히 움직이는 아이의 표정이 진지하다. 한참을 지켜보다 아버지와 아이에게 허락을 구하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아이는 논둑 위에서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한 자세를 취한다. 제법 의젓한 아이의 얼굴에 즐거움과 기쁨의 표정이 번진다. 사진을 찍고 나서 아이는 다시 아버지 곁으로 갔다. 그리고 또다시 무언가를 열심히 만지작거린다.
 
걷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 아이의 웃는 표정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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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