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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두 차례 국회의장 지낸 ‘쓴소리 의회주의자’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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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6대 국회에서 두 차례 국회의장을 역임한 이만섭 전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중앙포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3선개헌에 찬성할 수 있습니다.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즉각 퇴진해야 합니다.”

기자 땐 “자유당 놈들” 국회서 고함
69년 3선개헌 반대발언으로 시련
정의화 의장 “정치 거목 잃었다”


 1969년 7월 29일 열린 민주공화당의 ‘18시간 의원총회’에서 37세의 이만섭 의원은 이렇게 외쳤다. 3선개헌 반대론자였던 그의 발언으로 회의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었다. 개헌 논의가 예상치못한 ‘실력자 퇴진론’으로 흘렀다. 당시 공화당 간부로부터 의총 내용을 중간에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두 사람의 거취를 내게 맡겨 달라”고 했고, 둘의 전횡을 아니꼽게 여기던 의원들은 하나둘 찬성으로 돌아섰다. 결국 이튿날 새벽 4시10분 공화당은 찬성 당론을 확정했다. 박 대통령은 3선개헌 국민투표가 통과된 뒤 두 사람을 퇴진시켰다.

 63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 입문한 이후 8선 의원을 지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14일 오후 호흡부전으로 별세했다. 83세. 그는 14대국회와 16대국회 등 두 차례나 의장을 지낸 정치 원로다.

 3선개헌과 유신개헌에 반대한 이 전 의장이지만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깊었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인 61년 5·16 직후 쿠데타 세력의 심기를 거스르는 기사를 썼다 구속된 그는 이듬해 최고회의에 출입하며 박 전 대통령(당시 최고회의 의장)을 단독 인터뷰하게 된다. 울릉도로 가는 군함에 몰래 잠입해서다. 이 때 그는 박 전 대통령의 확고한 민족의식을 존경하게 됐고 이듬해 공화당 전국구 자리를 받아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그는 2009년 펴낸 자서전 『5·16과 10·26,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정치적 스승이었다”고 썼다.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그의 중학교 체육교사를 지내 세 사람이 종종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고도 적었다.

 그러나 3선개헌과 유신 반대 후 그는 박 전 대통령과 멀어졌다. 8년간 야인으로 지내다 79년 10대 총선에서 당선돼 공화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당이 해산되자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 후 11·12대 의원과 국민당 총재를 지냈다. 90년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합류,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이 된 그는 93년 4월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이 재산공개 파동으로 낙마하자 뒤를 이어 1년 2개월간 국회의장을 했다. 97년에는 신한국당 대표서리로 이회창 총재를 대선후보로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치렀으나 탈당한 이인제 후보를 따라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고 국민신당에 합류했다. 98년 9월엔 6명의 국민신당 의원을 거느리고 김대중 총재의 국민회의에 입당, 16대 국회(2000년)에서 두번째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 때부터 국회법이 개정돼 의장이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했다. 대부분 여당만 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강골로 쓴소리를 잘하는 원로”란 평을 듣는다. 제1공화국 시절 국회 출입기자로서 의사당 기자석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중 “자유당 이 놈들아”라고 고함을 치자 당시 국회의장이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세요”라고 해 이름이 속기록에 오른 일화를 갖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이날 “평생 의회주의의 한 길을 걸으신 한국 정치의 거목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윤복씨와 장남 승욱, 딸 승희·승인 씨 등 1남2녀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세브란스병원 특1호, 영결식은 18일 오전 10시 국회장으로 치러진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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