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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세 살 금융 교육이 여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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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위기의 순간 생사를 가르는 건 교육이다. 오래된 일화가 하나 있다. ‘영국 에든버러시의 오페라 극장에서 불이 났다. 관객들은 아우성, 출입구 쪽으로 몰렸다. 극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지휘자가 악단에 국가를 연주하라고 했다. 국가가 들려오자 관객들은 정신을 차렸다. 질서 있게 출입구로 향했다. 모두 안전하게 대피했다.’

화재 대피처럼 금융지식도 어려서 익혀야 할 생존술


 19세기 영국 오페라 극장엔 화재가 단골손님이었다. 촛불로 조명을 하다 보니 걸핏하면 불이 났다. 1797년부터 100년간 불난 곳만 1100개다. 최대 사망자를 낸 1887년 영국 엑스터 로열 극장 화재는 18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꺼번에 도망치다 서로 깔려 죽은 사람이 많았다. 런던시는 방화·방염시설을 강화하고 출입구를 확대하는 등 소방법을 바꿨다. 관객들에겐 “질서가 목숨을 구한다”는 교육을 시켰다. 아무리 에든버러 극장의 국가 연주라도 평소의 교육이 없었다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금융도 마찬가지다. 위기의 순간, 재산을 지키는 건 교육이다. 우선 사기를 알아채는 힘을 길러준다. 10년 전 상륙한 보이스피싱은 그간 6167억원의 돈을 털어갔다. ‘복권·승용차 당첨’에서 시작해 유괴·납치 ‘협박형’을 거쳐 통신요금 ‘환급형’까지 진화 중이다. 사칭 대상도 “김미영 팀장입니다”에서 “금융감독원 조성목 과장입니다”까지 확장했다. 60대 노년만 걸려드는 게 아니다. 똑똑한 젊은 직장인도 속수무책 당한다. 왜 그런가. 애초 금융 교육을 못 받아 뻔한 거짓말에도 속기 때문이다. 각종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금융 이해력은 ‘문맹’ 수준이다. 미얀마나 몽골·우간다보다 낮다. 아시아만 따져도 태국·중국·베트남보다 뒤진다(2014년 마스터카드 금융이해도 조사).

 ‘도대체 우리 국민 금융지식이 얼마나 떨어지나’ 알아보자며 금융감독원이 이런 문제를 냈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것이 신용등급에 유리하다’ OX로 답하시오. O를 택한 사람이 60%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니 사기꾼들에겐 대한민국이 사기 쳐 먹기 좋은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금융교육은 초·중·고교 12년을 통틀어 달랑 10시간도 안 된다. 그것도 역사 교육 강화에 밀려 내년 이후엔 더 줄어들 전망이다.

 그러다 보니 정년 퇴직을 하는 삼성 임원에게 통장 개설의 ABC를 가르쳐야 하고, 중복 보장을 안 해주는 실손보험을 두 개씩 든 보험가입자가 160만 명이나 되는 것이다. 그뿐이랴. 퇴직금을 받아도 어디 굴릴 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신문 기사 몇 개 찾아보고 지인에게 물어보는 게 고작이다. 주변에 전문가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없다. 엉뚱한 말에 솔깃해 돈을 날리거나 돈 안 되는 예금에만 묻어두기 일쑤다. 가뜩이나 고령화·저금리에 불안한 노후가 더 추워지는 것이다.

 선진국은 다르다.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연합(EU)의 20개국은 최근 금융 교육 확대에 더 열심이다. 국민의 금융 지식 향상이 복지 확대만큼 사회안전망 확보에 효과적이라는 이유다. 영국은 국가 전략으로 금융 교육을 정규 과목에 넣었다. 네덜란드는 3월 한 주를 머니위크로 정해 4000명의 강사를 전국 초등학교에 풀어 금융 교육을 한다. 10월엔 연금 주간을 정해 노동자 수십만 명에게 ‘실직·이혼 등에 대처할 재무 능력 키우기’를 가르친다.

 금융 교육은 안전 교육과 같다. 불났을 때 대피하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나 가계가 어려울 때 최적의 자금 융통·운용술을 가르치는 것은 똑같이 생존에 관계되는 일이다.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를 익히듯 ‘높은 이자엔 현혹되지 말라’를 배워야 한다. ‘질서가 목숨을 구한다’를 배우듯 ‘돈을 움직이게 해야 노후가 안락하다’를 익혀야 한다.

 세 살 금융 교육은 팔십 평생을 바꿀 수도 있다. 조기 교육은 필수요, 성희롱 예방 교육처럼 직장인들의 금융 교육을 의무화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돈, 사기에 털리고 잘못 굴려 날리고 나면 남는 건 빈손과 원망뿐이다. 그런 뒤 누구를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나. 이렇게 국민을 ‘금융 바보’로 놔두는 것도 국가의 직무유기인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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