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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는 역사다…살아 숨쉬는 그의 증언, 거짓 신화를 해체했다…?김종필 “난 역사 앞에 당당, 짧은 인생 시시하게 굴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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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리가 자신이 겪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매주 토요일 이어진 그의 구술이 14개월 만에 마감했다. JP의 현대사 회고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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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는 역사다. 김종필(金鍾泌 JP)의 삶은 현대사다. 한국 현대사는 격동과 파란이다. 그는 그 시대를 증언했다. 그가 연출한 시대다. 그가 몸담았던 시절이다. 성취와 고뇌, 좌절과 영광의 이야기다. 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팀은 매주 토요일 그를 만났다. 2014년 10월부터 올 11월까지. 그 만남은 역사와의 대면이었다.

첫 회고부터 긴박감이 넘쳤다. 그는 1961년 5·16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5·16 혁명 공약을 내가 만들었지, 제1항을 아는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義)로 삼는다’. 우리는 학생처럼 즉답했다. 그는 “사연이 있지”라고 했다. 그는 비록(秘錄)의 문을 열었다.

 “혁명 전야는 장면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 극심한 이념적 혼란 상황이었지. 그러나 그 때문에 반공을 앞세운 것은 아니야.” 그의 나이 아흔. 54년 전 일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선명해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 초창기(소령)에 좌익으로 몰려 구속, 예편당한 불행한 때가 있었지. 그 때문에 우리 군 상층부, 특히 주한미군은 박 대통령을 의심했어. 1항은 그 의심과 경계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혁명 지도자인 박정희 소장은 공약을 보고 ‘이거 나 때문에 썼구먼’이라고 했어.” 현대사는 거친 곡절과 절묘한 반전(反轉)이다. 그가 안내한 비사(秘史)의 창고는 그런 사연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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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 전 총리가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박보균 대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혁명은 야망과 분출이다. 그 언어는 JP의 생애를 지배한다. 그것은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혁명은 애국심의 발로야-.” 그의 규정은 정치학의 지평을 넓힌다.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의 공산 혁명도 마찬가지야. 찌든 가난에 외세로 망가진 중국을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조국애가 혁명이지.” 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수준. “가난을 숙명처럼 알던 착한 국민을 바라보면서,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일어섰지.” JP의 육성(肉聲)에 격정과 도전이 서린다.

 거사(擧事)는 소명감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는 “예술가와 혁명가의 기질은 통하지. 공통점은 다정다감(多情多感)이야.” 그의 말은 흥미를 더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이들 셋은 예술적 재능이 있었어. 다정다감하지 않으면 목숨을 내걸지 못하지. 그 특성이 있어야 터무니없는 발상도 하는 거야.” 정치 9단의 경험은 설득력을 과시한다. 그는 “정치는 예술이라고 했지. 그것도 그 범주에서 하는 소리야.” 감수성은 변혁의 리더십 요소다. 다정다감과 시심(詩心)은 JP 세계의 자산이다.

 JP와의 만남은 리더십 추적이었다. 현대판 제왕학(帝王學) 탐구였다. 그 요체는 무엇인가. JP가 꼽은 순위는 결단과 비전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오랜 난제였다. JP는 그때의 결연함을 재연한다. “제2의 이완용이어도 좋다-.” 그가 선택한 순간은 극적이었다. 위대한 악역(惡役)은 권력 성공의 조건이다.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 체포에도 악역의 결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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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의 첫회 연재를 앞두고 중앙일보 3월 2일자 4·5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

 리더십의 상상력은 비밀 병기다. 중앙정보부장 JP는 일본에 갔다. 나이 36세였다. 청구권 협상 상대는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52세의 노련한 정치인. JP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처럼 두견새를 함께 달래서 울려보자”고 했다. 오히라는 “그 고사를 어떻게 아느냐”고 감탄했다. 난항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외교는 인간미의 거래다. 청구권 협상은 타결됐다. 최종 조정 액수는 8억 달러. 장면 정권의 목표 액수는 3000만 달러였다.

 ‘김종필 증언’은 거짓 신화와의 대결이었다. 나는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말을 떠올렸다. “진실의 가장 큰 적(敵)은 거짓이 아니라 조작된 신화다-.” 잘못된 신화는 경제발전과 리더십 역할이다. ‘박정희 시대가 없어도 산업화는 가능하다-’. 국민이 우수하면 된다는 논리다. 그 허점은 치명적이다. 북한 주민을 모독한다. 그들도 남한 국민처럼 똑똑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고통과 굶주림이다. 형편없는 리더십을 만났기 때문이다.

 JP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게 맹자의 무항산(無恒産)-무항심(無恒心)이야.” 그 통찰과 전략이 선(先)산업화, 후(後)민주화다. 그 시대에 철강·조선·자동차·전자·석유화학의 기반이 마련됐다. 그 분야를 모두 하는 선진국도 드물다. 5·16 세력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 의식을 깼다. “우리 사회의 고루한 의식을 개조했지, 장사꾼이라고 낮춰 불렀어. 박 대통령이 그들을 선두에 세워서 격려하고 밀어주니까 그것이 기조가 돼서 이런 경제를 가진 나라가 됐지.” JP는 전경련 창설을 뒷받침했다. 그 시절 경제 거물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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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의 시작을 알리는 3월 2일자 1면.


역 사 속에 거짓 신화는 많다. 김형욱은 권력 실세였다. 그는 73년 미국으로 갔다. JP는 “미국은 박 대통령을 견제할 도구로 전직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활용하려 했지. CIA는 김형욱을 신문했지만 정보 가치는 낮았어. 김형욱은 없는 소리, 있는 소리로 픽션을 만들어 박 대통령을 헐뜯었어.” ‘김형욱 회고록’은 박정희 시대 비판의 원전(元典)이다. 국내에서도 무수히 인용됐다. 파생되고 덧붙여졌다. JP는 “그동안 대꾸하지 않았는데 김형욱 회고록은 엉터리투성이야.” 그의 판정 내용은 통렬했다. JP증언록은 조작된 신화를 해체한다.

 그중에 독도 폭파밀약론도 있다. JP는 수교협상에서 일본 측에 말했다. “독도를 우리가 폭파하면 했지 일본에 줄 수 없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독도를 일본에 줄 수 없음을 강조한 비유였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JP 반대 세력은 앞뒤를 잘랐다. ‘폭파’만 떼어내 떠들었다.

 “박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는 발작증 병자였지.” 그는 비분에 찬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민주화 투사처럼 행세했지만, 그는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패해 발작을 일으켜 총을 쐈어.” 민주화 투사 김재규-. 그것은 타락한 신화의 기괴함이다. 역사는 기록이다. 진실의 생명력은 증언이다. 우리 팀은 그의 민감한 술회를 검증했다. 증언록의 객관화는 JP의 바람이기도 했다.


J P는 박정희 시대의 2인자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나를 옆에 두면 거북하고 없으면 아쉬운 존재로 여겼지”라고 했다. 그는 박정희 권력의 진실에 가까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엔 군으로 복귀하겠다며 허약한 모습을 보였어. 그러다가 권력의 세계를 느끼면서 변해 갔어. 분할통치술을 아시고 활용했어.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지.”

 권력은 냉혹하다. 나뉘지 않는다. 김형욱·김재규의 중앙정보부는 JP를 견제, 감시한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대들었다. “제가 나세르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격해진다. 박 대통령에게 외치는 것 같다. 이집트 혁명 후 나세르는 1인자인 나기브를 제거했다. 그는 “권력은 더러운 것이구나, 환멸을 느낀 적도 있지. 하지만 더러운 게 권력의 특이성이기도 해.”

 나는 그의 숨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박 대통령에 의해 내침을 당하지 않으셨는데요-.” 그는 묘한 미소로 답변한다. “그러게. 박 대통령이 약한 점이 있어, 순수하다고 할까. 거기에는 조카딸(박영옥 여사)과 나의 결혼이란 인과(因果)도 있지.”

 ‘종말의 시작이었지-’. 대립된 단어의 배치다. 그의 비감 어린 표현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74년 8월 15일)이 터졌다.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는 물러났다. 박 대통령은 JP에게 후임을 물었다. “5·16 때 해병대를 앞장서서 이끈 오정근을 추천했어. 박 대통령도 좋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밤에 주무시면서 생각이 달라지셨어.” 그의 말에 탄식이 묻어났다. “육 여사는 박 대통령에게 차지철을 써보시라고 했어. 차지철은 고지식하고 술·담배를 않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했어.” 그런 기억은 독점적이다. JP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 나는 권력의 심부(深部)에 들어가 있었다. 그 인사 작품이 육 여사의 유작(遺作)인 셈이라니-. 나는 모르게 한마디했다. “오정근 경호실장이면 비극이 없었을 텐데요.” 그는 넌지시 막는다. “역사에서 이프(if), 이렇게 했다면 하는 진술은 값어치가 없어.” 역사를 만든 거인(巨人)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박 정희의 죽음은 권력 공백이다. JP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 서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그의 회한과 자부심 속에 단서가 있었다. 나는 은근히 물었다. “권력은 쟁취한다는데, 권력 의지가 약해지셨기에 그런 것 아닙니까.” JP는 “혁명가 기질이 순치(馴致)됐다는 얘기를 나는 부인하지 않아요.”

 30대 JP는 ‘불꽃’이었다. 세월은 그를 순리와 기다림의 정치인으로 바꿨다. 그 무렵 그의 방에 김옥균의 글씨가 걸렸다. ‘如環之無端’(여환지무단, 반지는 마디가 없다). 갑신정변 실패 후 원만함이다. 그때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그는 전두환 소장의 신군부와 차단됐다. “윤필용 사건 뒤 박 대통령은 내가 친분 있는 군인들과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셨어.” JP는 단호해진다. “유신 헌법으로 대통령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어.” 페어플레이는 그의 자부심이다.

 그의 인물평은 허를 찌르면서 흥미를 더했다.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은 자기가 아니면 해결 못할 일을 꾸며서 존재감을 과시했지. 그것으로 권력을 유지했어. 7·4 남북 공동성명, 김대중 납치가 모두 그랬어.” 김형욱으로 옮겨 간다. “그의 저돌성엔 예리한 발톱이 숨겨져 있었고.”

 그는 3김 시대의 한 축이다. “DJP 공조는 해원(解寃)의 차원이었어.” 숙연함이 두드러진 순간이었다. 그의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한 평은 절묘하다. “DJ는 공산주의를 용인한 용공(容共)이 아니었어. 공산주의를 활용한 용공(用共)이 맞을 것이야.” 그는 “하나회 척결, 전두환·노태우 구속 같은 전광석화의 결단은 YS(김영삼 전 대통령)만이 할 수 있지”라고 했다.

 그의 세계는 다양하고 다층적이다. 어느 틀 속에 가둬 둘 수 없었다. 그는 헤르만 헤세의 시를 읊고 바이런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는 나폴레옹을 사랑했다. 10대 시절 배운 워털루 전투의 노래를 부른다. “워털루~워털루~.” 그 장면에서 완연한 노년의 기색은 사라진다. “나폴레옹을 꺾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말했어.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Eton)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JP는 “한국에 이튼스쿨을 만드는 게 나의 꿈이었지”라고 했다. 그 꿈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빼앗아갔다.

 그가 석파 이하응(대원군)의 난초를 얘기한다. 말 속에 난의 정취가 풍긴다. YS의 언어는 직설과 단선이다. DJ의 말은 논리와 단계다. JP의 언어는 향기다. 그가 선택한 단어에 기품과 묘미가 있다. 세상은 말로 다스린다. 새 시대엔 새 언어가 필요하다. ‘민족적 민주주의, 조국 근대화, 민족 중흥, 자주와 재건-’. 그는 언어의 조련사다. 중국 문화혁명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조반역리(逆理)로 바꿨다. 경천동지(驚天動地)를 진천(震天)동지로 뒤틀어 썼다.

 그는 상상력의 저수지였다. “히 이즈 낫 어 빅맨, 밧 어 빅맨(He is not a big man, but a big man)-.” 10·26 그날 밤 박 대통령의 시신과 마주했을 때 그의 상념이다. “박 대통령의 몸을 살폈어. 몸집이 어떻게나 조그마한지, 이렇게 작은 분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내 머릿속에 케네디 연설문 작성자의 말이 떠올랐어. ‘케네디는 자이언트였고 죽어서도 거인이었다’고 했지.”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른다. “박 대통령의 키는 작았지만 역사의 빅맨이었어.” 그의 회고는 살아 숨쉰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라-.” 19세기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의 말이다. JP의 머릿속에 있는 구절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다는데, 나는 내 무덤을 파헤치라고 하고 싶어”라고 했다. 그의 삶은 장엄했다. 그의 역정은 역사 앞에 당당하다. 그의 아호는 운정(雲庭). 구름 위 정자다. 풍운을 잠재우는 아늑함인가. 그는 추상을 싫어했다. “피카소는 나에게 맞지 않아.” 그는 풍광이 강렬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서사(敍事)는 힘차고 풍부했다. 두 번의 국무총리, 9선 국회의원, 집권당 대표의 경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회고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이었다. 어떤 물음에도 답변은 모호하지 않았다. 3김 시대는 노욕(老慾), 역사의 퇴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껄끄러운 질문의 응수도 거침없었다. 그리고 증언록에 옮겼다. 그는 자신의 회고가 미화로 변색될까 거북해 했다. 그런 느낌이 들면 경계했다. 그는 증언록 초고를 수정했다.

 JP 회고는 ‘대하(大河) 드라마’다. 1년2개월 구술의 대장정은 끝났다. JP와 함께한 현대사 추적은 내게 행운이었다. JP는 매력이다. 그 펼침과 흡입력은 독보적이다.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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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