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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의 시시각각] ‘헬 조선’의 시작, 유치원 로또 추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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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논설위원

처형은 최근 입시전쟁을 치렀다고 했다. 아들딸이 취업까지 했는데 웬 입시전쟁? 내년 다섯 살이 되는 외손자의 유치원 입학 경쟁이었다. 맞벌이 하는 딸 부부를 대신해 유치원 추첨을 돌아다닌 것이다. “여러 곳에 원서를 넣으면 이 가운데 한 곳은 걸리겠지.” 처형은 처음엔 쉽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가기가 대입만큼 치열했다. 우선 모든 유치원이 직접 와서 입학설명회를 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현장에 가야만 원서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7개 유치원을 모두 돌아다니는 발품을 팔아야 했다. 대부분의 유치원은 평일에 입학설명회를 했다. 맞벌이 부부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쟁이었다. 경쟁률이 높아 추첨에서 붙기란 쉽지 않았다. 추첨에서 떨어지면 추가합격자 순위를 가리는 대기표 추첨이 이어졌다.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온 사위가 손에 쥔 대기표 번호는 111번이었다.

유치원부터 치열한 경쟁
한국 아이들이 불쌍하다


 지난 주말 마지막 도전을 했다. 이 유치원은 시설이 좋았다. 원장은 “우리 유치원은 인기가 좋아 일부러 인근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추첨날짜를 잡았다”고 자랑했다. 20명 정원에 250명이 몰렸다. 경쟁률은 12.5 대 1. ‘로또’ 같은 추첨이 시작됐다. 불합격 공을 뽑은 부모들은 긴 탄식을, 합격 공을 거머쥔 가족들은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도 있었다. 처형 가족은 다행히 합격 공을 뽑았다. 이날 탈락했다면 외손자를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할 판이었다. 영어유치원은 입학금 250만원에 월 130만원을 내야 한다. 그래도 인기 있는 영어유치원엔 부모들이 예약금을 걸어놓고 몰려든다. 맞벌이 부부에게 영어유치원은 유치원 로또 추첨에 모두 떨어질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안전판 같은 존재다.

 한편의 블랙코미디 같은 유치원 입학 경쟁은 내년에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예산 부담을 둘러싼 갈등이 풀리지 않고 있어서다. 국회는 2일 내년 누리과정 사업에 목적예비비 3000억원을 우회 지원하는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근본 대책이 아닌 땜질식 처방이다. 내년 누리과정 예산은 4조원이 넘는다. 지방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는 부담할 능력이 없다며 버티고 있다. 경기도의회와 서울시의회는 누리과정 유치원 예산도 삭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여당이 대통령의 공약인 누리과정 어린이집 보육예산을 편성하지 않을 경우 ‘맞불’을 놓겠다는 뜻이다. 국가가 보육을 책임지겠다는 거창한 슬로건만 내걸었지 아직 재원 조달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과 유리된 제도는 수요자들을 골탕 먹이고 있다. 도대체 교육 당국은 대책 없이 유치원 지원 제한을 풀면 입학 경쟁이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당연히 사전에 수요와 공급을 계산해 보고 근거리 위주 원칙 등 최대한 공정한 룰을 만들었어야 마땅했다. 결국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갈 게 뻔하다. 예산이 없어 어린이집이 문을 닫게 되면 유치원의 ‘좁은 문’은 아예 ‘바늘구멍’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잖아도 한국의 유치원은 부족한 상태다. 한국의 공립유치원 수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3분의 1밖에 안 된다.

 한국의 아이들은 불쌍하다. 한국 아동의 삶의 만족도는 OECD 국가 중 꼴찌다. 부모들도 덩달아 불행하다. 유치원부터 끝이 안 보이는 무한경쟁의 궤도에 올라 타야만 한다. 어쩌면 ‘헬 조선’의 시작은 유치원일는지 모른다. 엄마들의 육아카페에는 유치원 추첨을 놓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분노의 글이 넘치고 있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회성 짙은 가사로 주목을 받은 중식이밴드는 ‘아기를 낳고 싶다니’란 노래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맞벌이 부부 되면 집에서 누가 애를 봐/ 우리는 언제 얼굴 봐/ 주말에 만나거나 달 말에 만나거나/ 뭐 다들 그리 살더라/ 아기를 낳고 나면 그 애가 밥만 먹냐.”

 연애·결혼·출산·내집마련 등 포기한 게 하도 많아서 ‘N포세대’라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다. ‘유체 이탈’ 화법으로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위정자들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국가가 키워줄 테니 마음 놓고 아이를 낳으라고? 애가 밥만 먹고 크냐.

정철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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