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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② 전태일이 기다렸던 대학생 친구

◆ 전태일이 기다렸던 대학생 친구

1969년 9월 3선 개헌이 통과되자 조영래는 사법시험을 보기로 마음먹고 경기도 고양시의 용구암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함께 기거한 사람이 '직업 운동가' 장기표였습니다. 이듬해 11월,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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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사진 중앙에 위치한 남성)와 이소선 여사(장기표 오른쪽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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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이소선 어머니를 만났어요. 동대문 경찰서에서 자꾸만 나를 잡으러 다니는 통에 후배들을 성모병원 영안실에 보내서 이소선 여사를 불러냈어요. '서울대 법대 장기푭니다' 이랬더니 '아고, 우리 아들이 그렇잖아도 '나한테는 왜 대학생 친구도 하나 없나' 그랬는데, 죽고 나서야 이제야 나타났구나' 카면서.

폭포수 같습디다. 그래 한 두서너 시간 동안 막 자기 애 낳을 때 전태일 낳을 때 태몽 얘기까지, 아들한테 풀빵 사준 이야기, 여성 노동자가 결핵 걸렸을 때 해 준 일 등 그걸 다 들은 겁니다. 바로 학교에 가서 학생총회를 소집해서 들은 이야기를 다 했지요. 그런데 조영래가 이걸 알고 서울로 나온 거예요. 용구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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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옥
 
"(오빠가 죽고) 하루 이틀 지났는데, 어머니가 저하고 저희 작은 오빠랑 제 여동생을 데리고 복도로 나갔어요. 어머니가 '너희들이 결정을 해야 될 게 하나 있다' 그러셨어요. 영안실 앞 책상 위에 가방이 하나 있었어요. 어머니 말씀이 '저 안에 돈이 있는데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저 돈을 받아야 되는지 안 받아야 되는지 너희가 결정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받으면 어떻게 되고 안 받으면 어떻게 되냐?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저걸 받으면 너도 이제부터는 공장 그만 다니고 학교도 다닐 수 있고, 아마 너희 모두 대학 마칠 때까지도 저 돈을 가지고 우리가 먹고살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오빠를 잊어버려야 된다'고 하셨죠.

'안 받으면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안 받으면 너는 계속해서 공장에 다녀야 되고, 오빠도 없이 우리끼리 먹고살아야 된다. 그렇지만 오빠의 뜻을 이룰 수는 있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저는 공장에 다니겠다'고 했죠…

엄마가 '그러면 저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영안실로' 하셨어요. 경찰들도 많고 친척들,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다 와 계시고 사람이 많았어요. 가방 지퍼를 탁 여니까 그 안에 만 원짜리가 상당히 많더라고요. 저희 어머니가 그걸 다 쏟았어요…

'돈 좋아하는 너희들이 다 갖고 가라. 나는 이 돈이 필요 없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빨리 나가라'하니까 막 돈을 다 주워가지고 담아서 나갔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평화시장 사장님들이 돈을 다 걷으라고 그랬대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결정을 할 때 장기표 선생님이나 조영래 변호사님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저희 어머니도 물론 아들에게 약속은 했죠. 바로 숨넘어가기 전에 '제가 못다 한 일을 어머니가 꼭 해 주세요'라는 얘기를 아들이 하니까 어머니가 세 번을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어머니가 그런 결정을 내렸겠죠. 하지만 병원 주변에서 조 변호사님과 계속 만나면서 얘기를 했기 때문에 더 용기를 얻어서 그렇게 하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조영래는 그해 12월 말까지 전태일을 보내는 일에 깊게 관여하다, 용구암으로 돌아간지 두 달 만에 치러진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 사법연수원생 최초로 시국사범으로 구속…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1971년 11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영래는 구속됐습니다.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이었습니다.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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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공판.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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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공판. 왼쪽부터 심재권,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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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70년도에 각 대학의 서클 등을 쫙 엮어서 전국적인 학생운동 조직을 형성했어요. 71년도에 끝장을 보려고 했지요. 데모가 치열했습니다. 71년도에는 학교를 정상적으로 열어놓질 않았습니다. 만날 휴교령이었죠.

조영래는 나하고는 만나곤 했지만 직접 행동에 나선 건 아니었습니다. 사법시험도 준비해야 되고, 뭐 연수원에도 다녀야 되고 그러니까 주로 행동은 제가 했어요.

박정희 정권이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10월 15일 날 위수령을 발동했잖아요, 학생운동 배후를 수사해서 이신범, 심재권, 장기표를 꼽는데 거기에 조영래를 끼워 넣은 겁니다. 위수령 발동과 동시에 네 사람을 구속했죠. 사실은 조영래를 안 넣어도 되는데, 왜 넣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는 학생 수백 명을 강제로 군대에 보내버려 (학생운동을) 초토화했지요. 그게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입니다.

… 조영래는 앞에 나서서 한 건 아니지만 끊임없이 학생운동에 관여했어요. 주로 나를 통해서 많이 했지. 글 같은 거는 되도록이면 조영래 보고 쓰라 그랬어요. 조영래가 70년에 쓴 '전국대학생연맹' 명의로 '4ㆍ19 10주년 백서: 학생운동의 나아갈 길'라는 문건은 유명한 글이죠. 그걸로 전국 대학에서 토론을 하고 그랬습니다.

수사기관이 그걸 다 알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데, 하여튼 이 사건에 조영래를 끼워 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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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공판에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조영래.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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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일

"영래가 수형생활을 대전교도소에서 했어요. 대전교도소에 한 번 면회를 갔는데 그때 이홍훈 대법관도 판사 시절인데 우리랑 같이 갔죠. 홍훈이하고도 아주 친한 친구예요. 대전교도소에 갔는데 얼굴 좋더라고. 그래서 '야, 지낼만하냐?' 그랬더니 '잘 지낸다' 뭐 그러면서 원예반에 배석이 돼 가지고 국화 기른다고.  그러면서 우리한테 그 얘길 하더라고. '야, 근데 아직도 여기에 6ㆍ25 때 수감된 미전향 장기수들이 여러 명 있다'고,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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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