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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자유 냄새 물씬 나게” 남산에 자유센터 건축 구상 … 김수근 “태평양 향해 힘차게 나가는 배, 시대정신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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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서울 원서동 ‘공간’ 사옥을 방문한 김종필 전 총리(오른쪽)에게 건축가 김수근이 건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수근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그의 건축사무소 공간의 사옥은 검은 벽돌 건물로 미로 같은 내부 구조가 특징이다. JP는 61년 워커힐 설계를 계기로 김수근과 인연을 맺었다. [사진 김수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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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한 시대의 정신을 압축적으로 표출하며 훗날엔 역사적 가치로 존재한다. 나는 건축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건축가의 작품을 통해 5·16 혁명의 시대적 지향성을 드러낸 적이 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기슭에 세워진 워커힐 호텔은 나와 인연이 깊다. 5·16 직후 중앙정보부장이던 내가 건립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울엔 마땅한 위락시설이 없어 주한미군 병사들은 휴가 때면 일본으로 건너갔다. 우리 입장에선 재정 측면에서 여간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워커힐은 연간 3만 명 규모의 미군 휴가 장병을 머물게 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외화도 벌고 비상시 소집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워커힐 건설은 첨단 기자재와 신공법이 도입된 한국 건축사에 전례 없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워커힐은 나와 건축가 김수근(1931~86)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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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손수광 중앙대 교수가 제작한 ‘청산리싸움’ 기록화. 민족의 발자취를 그림으로 남기는 민족기록화 제작사업은 67년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주도로 시작돼 70년대엔 국가사업으로 진행됐다. [중앙포토]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엔 건축가라 불릴 만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건축을 본격 전공한 김수근은 전도유망한 젊은 건축가였다. 그는 워커힐 설계를 맡은 위원 6명 중 한 사람이었다. 1961년 말 설계위원들이 내게 설계도를 가지고 와서 설명했다. 아차산 산세를 따라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숙박과 위락시설 건물 26개 동이 들어차는 구도였다. 그중 역삼각형의 건물을 가리키며 김수근이 “이것은 힐탑바(Hill Top Bar)가 들어설 전망대입니다”고 말했다. 힐탑바란 말이 생소했다. 내가 “힐탑바,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묻자 그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지은 바입니다”고 말했다. W자 형태의 묵직한 콘크리트 기둥이 땅에서 솟아오른 듯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한국에선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공법을 적용했다는 설명이었다. 콘크리트 형상을 강렬하면서 도발적으로 노출하는 공법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설계위원들에게 “선진화된 생각이 드러나도록 마음대로 해보세요”라고 격려했다. 그 시절 기준에선 김수근의 작품세계는 파격적이었다. 힐탑바에는 김수근의 건축미학이 격정적으로 펼쳐져 있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바뀐 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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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전망대의 힐탑바. 국내 최초로 노출 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한 김수근의 작품이다. [중앙포토]

 62년 서울 장충단 공원의 건너편 산기슭에 자유센터 건립을 추진하면서 나는 김수근에게 설계를 맡겼다. 워커힐에서 그의 능력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자유센터는 애초엔 반공센터라는 이름으로 건립했다. 62년 초 내가 동남아시아를 순회 방문하면서 ‘아세아반공연맹’을 강화키로 각국의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그 본부인 반공센터를 서울에 짓기로 한 것이었다. 뒤에 반공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하자는 제안이 나와 명칭을 자유센터로 바꿨다. 본관과 숙소인 국제자유회관을 포함한 5개 건물을 지을 계획이었다.

 내가 김수근에게 한 주문은 간단 명쾌했다. “자유 냄새가 물씬 나도록 설계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설계한 본관은 거대한 콘크리트 처마의 끝이 하늘을 향해 번쩍 솟아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태평양을 향해 자유롭고 힘차게 나가는 배(국가)를 형상화했습니다”고 설명했다. 둥글게 휜 콘크리트 지붕이 배의 곡면을 닮아 있었다. 조국 근대화를 통해 이루려는 자유의 이상향을 향해 거대한 배가 나아가는 느낌을 표현했다. 김수근의 건축은 독특했다. 그 속엔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근대화된 국가를 만들어 보자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었다. 5·16 혁명이 펼친 새 시대 진운(進運)의 정신은 공산주의 침략을 막는 ‘자유’이며 그 정신이 건축에 담긴 것이다. 자유센터는 지금도 남산 국립극장 건너편에 남아 있다.

 자유센터 설계로 김수근은 한국이 자랑할 만한 건축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나는 상식적인 후원을 해줬다. 그의 또 다른 대표적인 설계 작품으로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그 설계는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다. 67년 한 일간지가 부여박물관이 일본 신사를 연상케 하는 왜색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한·일 수교 직후 국내 분위기와 얽혀 왜색 논쟁이 불붙었다. 내 느낌에도 일본 건축풍의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수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신문에 칼럼을 써서 “이 설계는 백제의 양식도 일본의 신사 양식도 아닌 현대건축을 전공으로 하는 바로 김수근의 양식”이라고 반박했다. 김수근은 건축에 관한 한 뜻을 굽히지 않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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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이 설계한 남산 자유센터 본관. 하늘로 솟은 콘크리트 처마로 배를 형상화했다. [중앙포토]

 63년 내가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났을 때 감동받았던 장소가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城)이었다. 계단을 올라 성 안으로 들어가면 그레이트 홀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스코틀랜드 기마대의 찰스 유어트 상사가 프랑스군 45연대의 나폴레옹 황제 기(旗)를 빼앗는 장면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 바로 옆엔 ‘그림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나 많은 사람이 손을 뻗어 만졌는지 손이 닿을 만한 높이에 그려진 상사의 종아리가 온통 시꺼멓게 변색됐다. 영웅을 그림으로나마 한번 만져 보려는 영국인들의 애국심이 느껴졌다. 유럽 곳곳에 세워진 위인들 동상과 박물관에 걸린 민족기록화가 나는 부러웠다. 그것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으며 우리 역사의 영웅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릴 것이냐가 나의 숙제가 되었다.

 나는 자랑할 만한 선조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중앙청부터 서울시청에 이르는 세종로 양쪽에 죽 세워놓으려고 했다. 이탈리아 산 대리석을 수입해 멋지게 조각을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나라 형편에 그런 돈은 없었다. 예비공정 차원에서 석고(石膏)로 사람 키만한 크기의 상을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장군부터 백범 김구 선생까지 민족의 영웅 37인을 선정했다. 월탄 박종화 선생, 노산 이은상 선생과 함께 내가 머리를 맞대고 선정한 위인들이었다. 64년 5월 16일 역사인물 석고상이 당시 은행나무가 늘어선 세종로 양쪽에 세워졌다. 석고상은 몇 달이 지나자 비바람에 금이 가고 깨졌다. 석고상을 석상으로 교체하기 위해 뜻이 있는 기부자를 찾아봤지만 돈을 댈 사람이 드물었다. 결국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채 훼손된 석고상들은 헐어버리고 말았다.

5·16민족상 이사장이었던 67년, 나는 민족기록화 제작 사업을 추진했다. 조국 수호를 위한 전쟁기록을 화폭에 담기 위한 사업이었다. 유적과 유물로도 역사를 보고 배울 수는 있지만 실감나게 느끼기엔 그림만한 것이 없다고 봤다. 민족기록화제작 발족위원회를 구성하고 화단의 내로라하는 구상(具象)화가 55명에게 기록화 제작을 의뢰했다. 동학군 의거와 독립운동, 해방과 6·25 전쟁, 월남군 파병까지 영웅적인 한국사의 55개 장면을 선정했다. 그때까지 한국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500호(3.3X2.5m) 25점, 1000호(5.3X2.9m) 30점의 초대형 작품이었다. 작품의 크기나 양으로 볼 때 엄청난 작업이었다. 국내에선 그런 대형 그림을 그릴 만한 미술 재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유화물감은 전문가가 쓰기엔 품질이 떨어졌다.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캔버스와 붓, 물감 등을 구입해 들여와 화가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큰 그림을 그릴 장소도 제공해 줬다. 화가들은 열정과 기량을 뿜어냈다. 국난을 극복한 조상의 투혼과 슬기를 화폭에 담았다. 그 시절 그런 초대형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리 화단에선 거의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민족기록화 제작은 내가 총리가 된 이후 문화공보부가 맡아 국가 사업으로 재개됐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을 향해 진격하는 장면을 비롯해 일제에 맞서 싸워 승리한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빛나는 전투장면들을 300호(2.9X2.1m) 캔버스 위에 재현했다. 경제발전상과 문화업적에 대한 기록화가 차례로 제작됐다. 민족의 발자취를 모두 그려서 영구히 남겨놓기 위한 시도였다.

 이때 그려진 기록화들은 중앙청 복도와 청와대 본관 벽에 걸려 전시됐다. 나는 에든버러 성에서처럼 이순신 장군의 그림이 걸려 있으면 만지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이 새까맣게 손때를 묻혀 놓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 관객들은 만지지 않았다. 이 기록화들은 80년대 들어 박물관으로 바뀐 중앙청의 벽에서 떼어져 지하 창고에 보관됐다. 그 후 95년 중앙청 건물(옛 조선총독부)이 철거됐고 지금은 그 작품 대부분이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활자에 갇힌 역사를 화폭에 펼쳐낸 의미 있는 작업들이 사장(死藏)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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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사전 박종화(1901~81)=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1년 시 전문지 ‘장미촌(薔薇村)’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해 낭만주의 시를 썼고, 35년 연산군 이야기를 다룬 『금삼의 피』를 발표하면서 역사소설로 전환했다. 일제시대엔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해방 뒤 문단 내 자유진영을 규합한 한국문학가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서울신문 사장과 예술원 회장, 성균관대 교수를 지내며 문화·학계·언론계 등에서 활약했다. 호는 월탄(月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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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