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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지지 업고 ‘재벌 개혁’ … 총수 사면해 재기 기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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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청와대에서 YS가 대기업 총수들과 함께 건배를 하고 있다. YS의 오른쪽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왼쪽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이날 만찬에서 YS는 역사 바로세우기의 배경을 설명하고 재계의 협조를 당부했다. [중앙포토]


김영삼 1927~2015
부동산 갖고 있는 것이 고통 되게 하겠다
1993년 신경제계획 민간위원과의 회동에서 한 말이다. 그 해 금융실명제를 단행했다.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당선 구호는 대통령 임기 내내 재계와 기싸움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22일 새벽 서거한 고(故)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은 재계를 군부 독재의 시퍼런 서슬로부터 자유롭게 했지만 갈등도 많이 빚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때 80%에 달했던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강도높은 ‘재벌 개혁’을 추진했다. 반면 비리 혐의로 구속된 총수를 사면해 재기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서거 소식이 전해진 뒤 재계에서 “애증(愛憎)이 교차한다”는 술회가 나오는 이유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삼성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다. 이건희(73) 삼성전자 회장이 추진한 자동차 사업은 ‘문어발식’ 확장을 반대한 김 전 대통령의 벽에 가로막혔다. 그는 처음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안 된다”며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94년 11월 호주에서 ‘세계화’를 국정지표로 내걸면서 입장이 바뀌었다. 귀국편 비행기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이헌(71) 당시 경제수석에게 “국경 없는 세계화 시대 아니오. 국가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삼성의 승용차 사업을 막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물었다고 한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같은해 12월 삼성의 승용차 사업 진출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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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YS와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또 이 회장은 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언론사 특파원과 간담회를 하면서 “한국 기업은 2류, 행정과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 규제·정책 등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묻어난 발언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분노했고, 방미 수행단 기업인에서 이 회장을 빼기도 했다.

 한편 이 회장은 노태우(83)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96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97년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을 비롯한 경제인 23명을 특별 사면·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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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청와대에서 구평회 무역협회장(오른쪽) 등 수출 관계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 전 대통령과 92년 14대 대선에서 경쟁했던 고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임기 내내 숨죽여야 했다. 정 명예회장은 93년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유죄가 확정됐다.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고강도 세무조사와 채권발행 제한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정 명예회장은 정계 은퇴까지 선언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생각하기도 싫다”고 술회했다.

 김 전 대통령은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정 명예회장을 사면·복권시켰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면한다”는 단서를 달 정도로 불편한 관계는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2001년 정 명예회장이 별세하고서야 청운동 빈소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구(77) 현대차그룹 회장을 만나 “우리나라에서 대업을 이룬 분인데, 그런 족적을 남긴 분이 가시니 아쉽다”며 사후에서야 화해했다.

 고 최종현(1929~1998) 전 SK그룹 회장도 설화(舌禍)를 겪었다. 김 전 대통령은 95년 2월, 소유 분산을 통한 경제력 집중 억제와 문어발식 경영의 관제탑 격인 기획조정실 해체 등을 골자로 한 재벌 개혁안을 발표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재선임된 최 전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어발 경영이 오히려 시대 변천에 맞을지도 모른다. 기업이 전문화 정책으로 분산되고 없어지면 누가 책임지느냐”며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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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관광진흥대회에서 YS가 신격호 롯데 회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 말이 나온지 이틀만에 국세청은 SK그룹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연이어 부당 내부거래 조사에 들어갔다. 최 전 회장은 홍재형(77) 당시 경제부총리를 찾아가 사과해야만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다양한 재계 인사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신격호(94) 롯데그룹 총괄회장과는 야당 총재였던 시절부터 각별했다. 신 총괄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56)씨의 장인인 고 김웅세(1934~2007) 전 롯데물산 사장을 김 전 대통령에게 소개해줬다. 박철언(73)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3당 합당 때 신격호 회장이 당시 노태우 민정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YS를 여러차례 설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석채(70) 전 KT 회장은 현철씨의 경복고 선배로 문민정부 시절 재정경제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나왔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동생인 신준호(74) 푸르밀 회장, 구본능(66) 희성그룹 회장도 경남고 후배로 교류했다. 고 구평회(1926~2012) E1 명예회장은 김 전 대통령과 서울대 문리대 동기동창으로 각별한 인연이었다.

 경제단체는 22일 잇따라 애도를 표하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까워했다. 전경련은 이날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에게도 심심한 애도와 위로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를 도입해 투명사회 건설에 기여했다”며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해 국민이 자신감을 갖게 했다”고 평가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김 전 대통령은 금융·부동산 실명제로 경제개혁을 이끌었다”며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려했던 고인의 큰 뜻을 기리며 경제계도 더욱 힘써 나가자”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경영계는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며 “국민 모두 슬픔을 이겨내고 경제 발전을 위해 매진하자”고 당부했다.

 또 중소기업중앙회는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중소기업청을 만들고 벤처기업법도 제정했다”며 “우리나라가 세계 일류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중견기업연합회는 “90년대 확대된 경제규모에 걸맞은 규제개혁을 이뤄냈다”며 “다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국민에게 지우기 어려운 고통과 아픔의 기억을 남긴 건 아쉬운 한계”라고 했다.

김기환·이현택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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