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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상도동 집한채 남기고 떠난 YS


거산(巨山)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호다. 거제도의 거와 부산의 산을 따 지은 이름이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서 거제도와 부산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거제의 바다가 그의 정신의 바탕이 됐다면 부산의 바다는 그에게 정치의 뿌리가 됐다.

◇유복한 학창시절 안겨준 '멸치' =1927년 12월20일(호적상)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어장주인 아버지 김홍조씨(2008년 작고)와 60년 9월 간첩에게 피살된 어머니 박부연씨(당시 52세)의 3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장주인 아버지 덕택으로 그는 상대적으로 유복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가 훗날 정치의 길을 걸어가면서 검은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명절 때마다 어장에서 잡힌 멸치를 정치인들에게 선물용으로 보내 당시 여의도에 ‘김영삼 멸치’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 박 씨는 남편과 8남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당시 생활이 어려웠던 마을 주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김 전 대통령이 최연소(27세) 국회의원이 된 데는 어머니의 음덕이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마한 김 후보자에게 뒷돈을 대며 후원한 것도 그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린시절은 바다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스스로 ‘걸음마를 먼저 배웠는지 수영을 먼저 배웠는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여름철 종일 바닷가에서 놀다가 수영을 하거나 포구 끝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그는 바다를 통해 ‘스스로 더럽히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에 비추어 볼 때 바다가 주는 커다란 교훈’을 배웠다. 바다가 훗날 그의 도덕성과 포용력 등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미래대통령 김영삼”=그는 일곱살에 집에서 2㎞쯤 떨어진 외포리의 장목간이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4년을 마치고 장목면에 있는 장목국민학교 5학년으로 옮긴 그는 집에서 학교까지 2∼3시간 이상 걸리는 황토길 20리를 걸어서 통학했다. 어려서부터 걷고 달리는데 이력이 붙은 그는 스포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관할 통영군지역 국민학교 대항 체육대회에선 축구선수(하프)로 활약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부산 동래에 있는 동래중학교에 진학시험을 쳤다가 낙방했고, 이듬해 인근 통영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 역시 뛰어난 운동실력으로 학교 수영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일본인 자녀인 반장을 때려 퇴학 직전까지 갔으나 부친이 일본인교장에게 사과해 겨우 퇴학처분을 면하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편입학 시험을 거쳐 부산 제2중학교(현 경남중) 3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이미 이때부터 대통령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붓글씨를 써두고 대통령의 꿈을 키워나갔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그는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제에 출마,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9선을 지냈다. 첫 선거 당시 고무신 공장을 경영하던 장인이 사위를 돕느라 흰 고무신 1만 켤레를 거제로 보냈는데 김 전 대통령이 선거법을 우려해 모두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35년간의 야당생활을 투쟁으로 일관해왔다. 6대 국회 때인 64년 제1야당 민정당의 대변인을 맡자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해 ‘이제 우리는 5ㆍ16혁명 이념을 재평가해야 할 때가 왔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69년 6월,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 3선 개헌에 반대하다 괴한 3명으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그는 본회의장에서 이 사건을 ‘신민당의 개헌 반대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보복’으로 규정, 박 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그해 9월 국회 별관에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자, “이게 이 땅에는 히틀러와 같은 독재만이 남게 됐다”고 선언했다. 79년 야당 총재가 된 그는 ‘박 대통령은 물러날 준비를 하라. 불행한 대통령이 되지말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그해 10월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는 과정에서 여공 1명이 추락사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박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의원직 제명안을 가결했다. 이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다. 여당의 무리한 제명은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지역의 ‘부마(釜馬)항쟁’을 촉발했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23일간의 단식과 수영만 집회=그의 정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된 두 장면을 꼽으라면 ‘23일간의 단식’과 ‘수영만 집회’를 빼놓을 수 없다. 83년 5월 18일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민주화 5개항’과 야당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대신해 단식 철회를 요구하자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말한 뒤 돌려보냈다. 단식은 23일간 이어졌고, 이이를 계기로 지리멸렬하던 민주화 세력이 총결집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발족,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는 85년 2ㆍ12총선(12대) 신민당 돌풍의 원동력이 됐고, 87년의 직선제 개헌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김(兩金)은 둘 다 대통령이 목표인 시대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자 김영삼ㆍ김대중 후보에 대한 후보 단일화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9월 8일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주ㆍ목포 등 호남 지역 순회연설을 통해 세과시에 나섰다. 이에 대한 맞바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0월 10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17일 부산 수영만에서 대규모 집회를 연다. 이날에 대해 그는 회고록에서 “이날 대회에 참석한 군중 수를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170만, 월스트리트 저널은 100만명 이상이라고 보도했다. 사람들은 240만명 이상이 모였다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부산 인구는 350만으로 부산 인구의 대부분이 수영만에 모였단 얘기가 된다. 이 유세가 전국적인 YS 바람을 일으키는 진원이 됐다. 이날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경선에서 지면 깨끗이 승복하고 상대의 선거 운동에 앞장설테니 군정종식만을 생각하고 경선하자”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당 합당=그는 늘 ‘세상일은 크게 줄기만 잡으면 단순하게 보는 것이 옳을 때가 많다’거나 ‘나무에 너무 집착하면 숲이 안보인다’고 말하곤 했다. 상황이 바뀌면 명분을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활로를 찾는 그의 정치 스타일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87년 대선패배후 ‘국민주권을 도둑질한 파렴치한 정권과는 같이 국정을 논할 수 없다’던 그는 90년 3당 합당 때 스스로 ‘구국의 결단’이라며 3당 합당을 추진한다. 이때문에 ‘대통령병 환자’ 취급을 받기도 하고, 야권으로부터 “변절자”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3당 합당을 결행하게된 배경에 대해 민주계의 한 의원은 “당시 제3당으로서 평민당에 밀려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도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그는 끊임없이 여론을 주도하고, 여론의 중심에 서있기를 원했다. 그는 3당합당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을 거여주도로 바꿔놓았고, 결국 경남중 시절 책상머리에 써놓았던 ‘미래 대통령 김영삼’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상도동 집 한 채=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하며 최고 권력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지만 정작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최고의 업적으로 꼽는 일 중 하나는 아내와 결혼한 일이다. 그는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60년 전 손명순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2011년 3월 4일 회혼식에서다. 그는 23살때 이화여대 3학년이던 동갑내기 손 여사와 결혼했다. 재학생의 결혼을 금했던 당시 이화여대 학칙 때문에 임신 사실을 숨긴채 학교를 마쳤다고 한다. 손 여사는 내조법으로 가난을 참는 것과, 남편에게 용기를 주는 것, 그리고 집에 온 사람에게 기꺼이 밥 한 그릇 내오는 일 이 세가지를 꼽은적이 있다. 이 덕분으로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이나 기자들은 상도동 집에 가면 언제든 거제산 멸치에 된장을 푼 시래기국에 강치 한 토막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면서 “저는 상도동에 집 한 채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물러나더라도 옛날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도동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약속대로 그는 퇴임 후 상도동의 집으로 돌아갔고, 아내 손 여사의 곁에서 영면에 들었다.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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