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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3] 남편 양광성에게 다음 남편 구웨이쥔 소개받은 옌유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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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 만에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과 71년 만에 해후한 옌유윈. 1974년 7월, 뉴욕.]



파리 공관장 회의에서 처음 만나
같은 외교관으로 막역하게 지내
주재원 부인들끼리도 얽히고 설켜

1928년 초, 난징의 국민정부가 전국을 석권했다. 상하이에 상주시킬 주재원을 물색하자 외교부가 나섰다. 칭화대학 국제법 강사 양광성(양광생)을 추천했다. “남과 다투는 법이 없고, 친화력이 뛰어나다. 양보를 잘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결과를 이끌어내는 재능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고, 골프에 능하다. 플레이보이 기질이 농후하지만, 여자 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다. 춤도 잘 춘다. 외교관으로 적격이다. 동갑인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는 못 가는 곳이 없는 사이다. 여자 취향이 달라, 티격태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장쉐량은 양광성이 미혼인 것을 제일 부러워한다.”

옌유윈(엄유운)의 부모는 딸이 외교부 상하이 주재원과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모른 체하며 젊은 외교관이 찾아오기만 기다렸다. 명분은 만들면 되는 것, 옌유윈과 결혼을 결심한 양광성은 외교부의 판단에 걸맞게 행동했다. 하루는 옌유윈을 찻집으로 불러냈다. 헤어지기 전 10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옌유윈은 별 생각 없이 손가방을 열었다. 다음날 해질 무렵, 말쑥한 청년이 옌유윈의 집을 찾아왔다. “빌린 돈을 갚으러 왔습니다.” 기습당한 옌유윈의 부모와 언니들은 양광성을 정중히 대접했다.

저녁까지 얻어먹은 양광성은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리를 뜨며 옌유윈은 본체만체, 미래의 장인 장모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결혼식 날 따님에게 흰 드레스를 입히겠습니다. 신혼여행은 유럽과 미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외교부장도 3개월 간 휴가를 허락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흰색은 효(孝)를 의미했다. 부모의 장례식 외에는 백색 옷을 입지 않을 때였다. 옌유윈의 아버지도 양광성 못지 않았다. 한 차례 웃더니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라며 응수했다. 옆에 있던 옌유윈의 언니들이 “와” 하며 박수를 보냈다.

양광성은 외교부 정보국 부국장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931년 봄, 런던 총영사 임명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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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시절, 쑹즈원(宋子文)의 부인 장웨이(張樂怡 뒷줄 일곱 번째) 환영 모임을 주관한 양광성(뒷줄 오른쪽 세 번째)과 옌유윈(뒷줄 왼쪽 세 번째). 뒷줄 왼쪽 네 번째가 장쉐량의 세 번째 부인 자오이디(趙一荻). 장웨이와 자오이디 사이는 더글라스 맥아더. 촬영 시기는 태평양전쟁 전으로 추정.]



이듬해 1월, 파리에서 열린 유럽주재 공관장 신년 모임에 옌유윈과 함께 참석했다. 외교계에 복귀한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이 프랑스 주재 공사(지금의 대사)로 부임한 직후였다. 옌유윈의 회상을 소개한다. “광성에게 구웨이쥔을 정식으로 소개 받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 부부는 파리에 머무르며 손님 접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탈리아 공사의 딸 장스윈(蔣士雲·장사운)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장스윈은 여전히 귀엽고 예뻤다. 장쉐량이 보낸 편지를 보여주며 훌쩍거렸다. 일본의 침략으로 동북에서 철수한 장쉐량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구웨이쥔이 리튼조사단의 일원으로 동북에 가게 됐다고 하자 만세를 부르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구웨이쥔의 부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에 관한 얘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황후이란은 개를 좋아했다. 가는 곳마다 애완견을 안고 다녔다. 사람들과 있는 것보다 더 어울렸다. 중국 외교관들은 몰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휴가도 같이 갈 때가 많았다. 몬테칼로에 갔을 때 황후이란은 구웨이쥔과 같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개와 외국인들하고만 놀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구웨이쥔은 황후이란보다는 같이 온 부인네들과 산책하기를 즐겼다. 황후이란의 질투는 품위가 있었다. 남의 부인과 마작을 하는 구웨이쥔의 머리에 찻물을 천천히 붓는 것을 보고 놀랐다. 구웨이쥔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미동도 않고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황후이란이 나가자 같이 있던 남의 부인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1933년 가을, 중국 정부는 양광성에게 귀국을 명령했다.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쓰촨(四川) 5개성의 외교 업무를 총괄해라.” 양광성은 상하이에 설립한 중국신문사 사장직도 겸했다.

장쉐량은 시도 때도 없이 양광성의 집을 찾았다. 엔유윈은 백살이 넘어서도 60여년 전 장쉐량의 모습을 잊지 못했다. “광성과 장쉐량은 새벽마다 골프를 치러갔다. 나는 늦잠꾸러기였다. 두 사람이 18홀을 돌고 올 때까지 침대에 있을 때가 많았다. 광성이 나를 깨우러 들어오면 장쉐량도 신발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빨리 먹을 것 내놓으라고 보채댔다. 3년 후 장쉐량은 청사에 남을 사고를 쳤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감금해 항일전쟁을 촉구했다. 장쉐량은 국공합작을 이루게 했지만, 60여년 간 자유를 상실했다. 내전도 그치지 않았다. 광성은 장쉐량의 몰락에 분통을 터뜨렸다. 허구한 날 술만 마셔댔다.”

옌유윈은 장제스의 동서인 재정부장 콩샹시(孔祥熙·공상희)에게 하소연했다. 콩샹시는 영국 왕 조지6세의 대관식 참석자 명단에 양광성을 추가했다.

공사로 승진한 양광성의 새로운 임지는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전시 재정을 담당하던 콩샹시는 필리핀 공사를 권했다. “필리핀에 부유한 화교들이 몰려 있다. 이들에게 모국의 전쟁자금을 모금할 생각이다. 너 외에는 적합한 인물이 없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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