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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승7패' 불꽃보다 뜨거운 21세기 야구 한일전

9회 초 무사 만루. 2-3, 1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 운명은 얄궂게도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소프트뱅크)를 타석으로 불렀다. 순간 배트가 번뜩이고 빨랫줄처럼 뻗은 타구는 펜스 근처까지 굴러갔다. 타자는 배트를 던지지더니 두 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2루 주자 이용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 뛰었다. 이용규가 홈을 밟는 순간 일본 도쿄돔을 메운 4만 관중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탄식조차 새어나오지 않은 침묵의 시간…, 21세기에 치러진 열일곱 번째 한·일전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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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도쿄돔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는 한국 대표 선수들


야구 한·일전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역사적 아픔을 야구를 통해서 나마 갚고자 노력, 한 대 맞으면 한 대 더 맞을 각오로 달려들어


 










야구 한·일전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숱한 대결에서 한국은 일본에 셀 수 없이 졌다. 그러나 고개 숙이고 포기할 수 없었다. 역사적 아픔을 야구를 통해서라도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대 맞으면 한 대 더 맞을 각오로 달려들었다. 한대화의 기적 같은 스리런포가 터진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한국 5-2 승)과 같은 대이변도 있었지만 90년대가 돼서야 한국은 일본이 ‘상대할 만한 수준’이 됐다.

90년대 한·일 프로 선수들이 맞붙은 수퍼게임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일본은 겉으로 한국 야구 수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력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은 최고의 팀을 꾸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적은 91년 2승 4패, 95년 2승 2무 2패, 99년 1승 1무 2패. 한 수 위의 일본 야구의 실력을 경험했다. 일본이 1.5군을 내세웠을 땐 이기기도 했지만 주전급 선수를 내세운 경기에서는 맥없이 졌다. 99년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에이스들을 상대로 7타수 7안타(1홈런)의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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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메달을 확정한 순간 구대성과 홍성흔은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21세기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그동안 국제 대회에 아마추어 선수들을 내보냈던 일본은 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박찬호가 출전한 한국에 1-13으로 대패했다. 그래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프로 선수들을 출전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은 예선에서 파죽지세로 4강에 올라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4강에서 미국에 패하며 동메달결정전(3·4위전)으로 내려갔다. 운명의 장난처럼 상대는 일본으로 정해졌다. 한국은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7-6으로 승리하며 자신감에 차있었다. 일본은 예선에서 한국 타선에 당한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복수의 기회를 줬다. 한국도 ‘일본 킬러’ 구대성을 내세워 맞불을 놨다. 0-0이던 8회 2사 2·3루에서 이승엽의 2타점 2루타가 터지며 한국이 승기를 잡았다. 구대성은 정말 강했다. 9회까지 삼진을 11개 뽑아내며 마운드를 지켰다.
 

동메달을 딴 것보다 일본을 이겼다는 것이 더 기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김응용 감독


잊지 못할 2003년 '삿포로 참사'
모든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2003년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참사'를 경험했다. 한국은 3년 전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동메달을 땄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터라 무난하게 아테네 올림픽에 진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시작부터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출과정에서 송진우·심정수·이상훈 등 주요 선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했고, 박찬호·김병현·서재응·최희섭 등 메이저리거들도 합류하지 못했다. 포스트시즌 일정이 길어지면서 손발을 맞출 시간도 부족했다.

한국은 대만과의 예선 첫 경기에서 연장 10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4-5 역전패를 당했다. 올림픽 진출 티켓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상대인 일본을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마쓰이 가즈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후쿠도메 고스케 등이 주축이던 일본 대표팀은 너무 강했다. 결국 한국은 무기력한 경기 끝에 일본에 0-2 완패했다. 직전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은 아테니 올림픽 문턱조차 밟지 못했다.
 

향후 30년 동안 일본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주겠다 - WBC를 앞두고 스즈키 이치로

그냥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같은데…
- 이치로의 30년 발언에 대해 김병현


망언 되갚아준 1회 WBC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시작되면서 일본과의 대결이 잦아졌다. 매 경기 명승부가 펼쳐지며 한·일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2006년 제1회 대회 1라운드를 앞두고 오 사다하루 일본 대표팀 감독은 "3전 전승으로 본선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스즈키 이치로는 지금도 회자되는 "(한국이) 30년 동안 이길 생각을 못하게 만들겠다"는 망언을 퍼부었다. 한국에는 '8회의 사나이' 이승엽이 있었다. 이승엽은 1-2로 뒤진 8회 일본 마무리 이시이를 상대로 역전 결승 투런포를 쏘아올렸다. 결국 한국은 일본을 3-2로 물리치고 확실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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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이 해냈다! 2006년 WBC 두 번째 한일전에서 결승 2루타를 치고 환호하는 이종범


대회 두 번째 맞대결에서도 비슷했다. '코리안특급' 박찬호는 선발로 나서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전병두-김병현-구대성-오승환이 남은 4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 승리를 지켜냈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0-0으로 맞선 8회 2·3루에서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결승 적시타를 때려냈다. 2-1 승리.

한국과 일본은 4강에서 대회 세 번째 맞대결을 펼쳤다. 그 과정은 한편의 코미디였다. 일본은 '실점률'에서 앞서며 간신히 4강에 턱걸이를 했다. 야구에서 한 상대를 연달아 세 번 이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상대가 일본이라면 더 그렇다. 시드니에 태극기를 펄럭이게 만든 장본인 구대성이 왼 옆구리 담 증세로 출전하지 못했다. 한국은 7회에만 5실점하며 0-6으로 패했다. 6연승을 거두고 단 1패를 했는데도 탈락이었다.
 

이승엽? 그게 누구냐? 제대로 치지도 못하고 있는 타자를 4번에 계속 두고 있다니 대단하다
- 베이징 올림픽 4강 앞두고 호시노 센이치 일본 감독

말 싸움이 아니라 실력으로 붙자
- 김경문 감독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 이승엽의 눈물
한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예선에서 5-3으로 깔끔한 승리를 거둔 한국은 준결승에서 다시 일본을 만났다. 호시노 센이치 일본 대표팀 감독은 예선부터 말로 한국을 자극했다. 준결승을 앞두고 호시노 감독은 "이승엽? 그게 누구냐? 제대로 치지도 못하고 있는 타자를 4번에 계속 두고 있다니 대단하다"며 심리전을 걸었다. 그러나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 됐다. 예선 7경기에서 22타수 3안타로 맥을 추지 못하던 이승엽은 2-2로 맞선 8회 1사 1루에서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포를 때려냈다.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던 부담감에서 벗어난 이승엽은 경기 후 눈물을 쏟아냈다. 사나이의 눈물도 충분히 멋있다는 것을 이승엽이 보여줬다. 대표팀은 기세를 몰아 결승에서 쿠바를 꺾고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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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 내내 마음 고생했던 이승엽은 멋지게 해냈다.

헤어진 여자 친구를 길에서 운명처럼 자주 만나는 것과 같다
- 2009 WBC에서 스즈키 이치로


'의사 봉중근' 새로운 일본 킬러의 탄생
2009년 WBC에선 무려 5번이나 맞대결을 펼쳤다. 한·일전이 대회 최고의 흥행카드였기 때문이다. 1라운드 2회전에서 한국은 일본에 2-14로 참패를 당했다. 7회 콜드패는 수모에 가까웠다. 21세기 한·일전 역사에서 가장 큰 점수 차 패배였다. 믿었던 선발 김광현이 1과3분의1이닝 동안 8실점으로 무너졌다. 주무기 슬라이더가 일본 벤치에 완벽히 간파당하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참담한 패배에도 한국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한국은 조별리그 순위 결정전에서 다시 일본과 만났다. 이 경기에선 또 한 명의 '일본 킬러'가 탄생했다. 봉중근은 5와3분의1이닝 무실점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경기 후 봉중근에게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빗대 '봉의사' '의사 봉중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라운드 2회전에서 다시 만난 두 팀은 더 치열했다. 한국은 일본의 에이스 다르빗슈 유를 상대로 1회에만 3점을 뽑아냈다. 봉중근이 5와3분의1이닝 1실점으로 또다시 호투했고, 윤석민-김광현-임창용이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쳤다. 4-1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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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중근이 막고, 김태균이 때렸던 2009년 WBC.


그리고 두 팀은 드디어 최고의 무대에서 만났다. 추신수의 홈런, 이대호의 희생타에 이어 9회 이범호의 적시타로 극적인 3-3 동점에 성공했다. 하지만 연장 10회 2사 2·3루에서 이치로를 상대한 임창용이 포크볼을 던지다 2타점 중전안타를 맞았다. 뼈아픈 결승타. 이 장면에서 임창용이 고집스럽게 정면승부를 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좋은 공을 주지 말고 적당히 피하라는 사인을 줬지만, 확실히 (고의볼넷으로) 빼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선수를 감쌌다. 김인식 감독은 '국민 감독'이라는 호칭을 얻었고, 대표팀의 '위대한 도전'은 큰 박수를 받았다.
 

사나이로서 일본에 두 번 지고 싶지 않았다
- 이대호 프리미어12 4강전 승리 후


2015년판 도쿄대첩, '조선의 4번타자'는 강했다
한국과 일본은 6년 흐른 2015년 다시 만났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창설한 '프리미어12' 개막전이었다. 한국은 오승환·양현종·윤석민 등 주전급 투수들의 줄부상으로 엔트리 구성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대표 소집일에는 도박 파문으로 안지만·윤성환·임창용이 빠졌다.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 속에 대한해협을 건넜지만 일본은 적응 훈련도 하지 못하게 몽니를 부렸다. '일본 킬러' 김광현은 흔들렸고, 타선은 오타니 쇼헤이라는 극강의 에이스에게 속절없이 당했다. 0-5 패배.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김인식 감독은 노련했다. 적절한 투수 교체와 작전으로 예선을 통과한 뒤 8강에서 쿠바를 꺾고 4강에 올라 다시 일본을 만났다.
 
일본은 승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결승전 선발까지 미리 발표하는 여유를 부렸다. 4만명의 구름관중은 일본의 승리를 지켜보기 위해 도쿄돔에 운집했다. 선발 오타니가 전광판에 시속 160km를 찍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 했다. 오타니는 6회까지 한국 타선에 안타를 한 개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 고쿠보 감독은 85개 밖에 던지지 않은 오타니를 7회가 마치고 교체했다. 그러나 한국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한 방을 맞고 웅크려 있으면서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0-3으로 뒤진 9회 기회가 왔다.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의 안타 한 방은 높게 솟았던 일본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도쿄=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21세기 야구 한·일전의 흔적
2000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 : 한국 5-3 일본(1승 0패)
2000 시드니 올림픽 리그 : 한국 7-6 일본(2승 0패)
2000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 한국 3-1 일본(3승 0패)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 : 한국 0-2 일본(3승 1패)
2006 WBC 1라운드 : 한국 3-2 일본(4승 1패)
2006 WBC 2라운드 : 한국 2-1 일본(5승 1패)
2006 WBC 4강 : 한국 0-6 일본(5승 2패)
20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 : 한국 3-4 일본(5승 3패)
2008 베이징 올림픽 리그 : 한국 5-3 일본(6승 3패)
2008 베이징 올림픽 4강 : 한국 6-2 일본(7승 3패)
2009 WBC 1라운드 : 한국 2-14 일본(7승 4패)
2009 WBC 1라운드 결승 : 한국 1-0 일본(8승 4패)
2009 WBC 2라운드 : 한국 4-1 일본(9승 4패)
2009 WBC 2라운드 결승 : 한국 2-6 일본(9승 5패)
2009 WBC 결승 : 한국 3-5 일본(9승 6패)
2015 프리미어12 조별리그 : 1차전 한국 0-5 일본(9승 7패)
2015 프리미어12 4강전 : 한국 4-3(10승 7패)
통산 - 17전 10승 7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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