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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편지] 큰 가슴으로 최상의 회색사회를 함께 생각해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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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시인

연암(然岩)에게

 막말이 있네. 살아남으려면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네. 아나키스트의 입에서가 아니라 치밀한 인류학의 한 이론에서 흘러나온 말이네.

 현실은 오늘보다 어제가 유토피아인 것 막을 수 없게 척박하네. 경제도 나의 경제이고 정치도 나만의 정치이네. 문화 또한 갈수록 비루한 나의 수작이네.

 먼 옛적으로 내 무능의 심사(心思)를 떠나보내네. 차라리 떠날 테면 지독하게 낯선 인도 『마하라바타』가 어떻겠는가.

 인도란 인류 문명의 한 원점이네. 그곳에서 수학의 영(零)이 태어난 연유도 예삿일이 아니겠네.

 애당초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서사세계가 인도를 뒤따른 분명한 사실은 이제껏 숨겨져 있는 사실이네. 눈을 서남아시아로 돌려보세. 그곳 아라비아 바다가 얼마나 신속한 소통의 수로(水路)인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네. 관세음보살이 페르시아의 신인 사실도 그런 실증이겠네.

 중동의 옛 초승달 지역 수메르가 인도·이집트, 그리고 그리스의 에게해를 두고 하나의 고대문명 방사권(放射圈)을 펼친 바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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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인도가 아시아의 한 대륙이지만 그 문명의 행방은 중동 일대와 유럽의 지중해 쪽으로 뻗어갔네. 인도유럽어권은 산스크리트문자가 라틴문자의 조상임을 뜻할 터이네. 아니, 인도 대륙 자체가 저 인도양 남쪽 남아프리카 일대의 지각 이동으로 아시아 대륙과 충돌한 히말라야 이남 아닌가.

 그런 인도의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가 그리스의 호메로스 서사시라는 혁혁한 자손을 둔 것이 세계 문학의 고고학이네.

 마하바라타는 사촌 사이의 18일전쟁을 그리고 있네. 이 서사시 안에 인도아리안의 일체가 들어 있다는 오랜 칭송의 고전이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느니,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느니’라는 속담은 아직껏 없어지지 않고 있네.

 그럴진대 이것은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서 인도 정신 그 자체가 되고 마네. 종교이고 생활이고 또 무엇이네.

 이 전쟁서사는 신성(神性)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우주의 여러 신화적 동작들도 아우른 허허망망한 세계이기도 하네. 이 방대한 규모의 틈서리에 ‘바가바드기타’가 끼어들었네. 마치 화엄경 가운데 입법계품(入法界品)이 난데없이 끼어든 것처럼 말이네.

 1970년대 어느 날 나는 용산 원효로 함석헌 옹의 골방에서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한담을 들었네. 이 ‘바가바드기타’의 주제는 회색(灰色)의 사상에 있네. 흑과 백 어느 쪽도 지양하는 회색이고 백과 흑의 서로 다른 것의 배합을 이루는 회색이기도 하다네.

 회색이란 한국 현대사의 운명에도 칠해지는 불우한 색이었네.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의식 및 실존의식에서도 그 회색은 주제의 색이었네.

 그것은 괴테가 생명으로서의 녹색에 반대로 강조한 죽음의 색과도 다른 것이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생명이란 회색이 아니고는 다른 것이 될 수 없었네.

 이 같은 회색의 의식과는 달리 정치이념의 치열한 갈등 속에서 회색이란 그야말로 회색분자라는 불명예에 속했네. 우익의 백색도 좌익의 적색도 아닌 이 애매한 중간 행로는 쌍방의 배척을 받았네. ‘회색분자’와 함께 ‘제5열(第五列)’도 우익진영의 가혹한 규탄을 받아야 했네.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의 군벌 프랑코가 마드리드 공략을 앞둔 휘하 4개 부대의 병력을 이끌면서 이미 마드리드에는 지지세력이 대기하고 있다고 독전(督戰)할 때의 제5부대 제5열이라는 것이 동아시아 한반도 남단에 건너와 좌익의 외곽세력쯤으로 단죄되었네.

 실지로 식민지 시기 국내외의 항일운동에서 민족진영과 혁명진영으로 갈라선 불화는 해방정국에서 더욱 심화되어 그 상잔(相殘)은 길었네.

 이런 과정에서 지난날 신간회 운동에서 시도된 적 있는 중도합작노선은 그 이후로도 그것이 시대적 요청일수록 현실에서는 허상이 되고 말았네. 하기사 중국 대륙에서의 국공합작도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에까지 있다 말았네.

 오늘의 우리 분단체제 사회를 분열시키는 보수·진보도 이전의 좌우 대결의 잔재를 그대로 이어오는 동안 그 갈등을 해소할 중도노선 설정은 언제나 사산(死産)을 거듭해 오고 있네.

 회색의 논리가 마하바라타에서처럼 해결논리로 되는 것. 그것이 상생의 논리로 역전되는 것. 또한 그것이 변증법적 합(合)의 논리로 발전하는 것.

 이 같은 희망이 희망의 허상이고 말 때 자네와 나는 우리의 문화 일반에 떠 있는 희망이 늘 절망의 대칭이 되고 마는 쓴 술잔을 나누고 있네.

 『바가바드기타』는 난해하다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온갖 사상(事象)들을 다 불러들인 범신론 무대이네.

 그럼에도 이 장엄한 세계사적 고전은 그 성전(聖典)의 규모에서 드러난 회색의 사상을 통해서 미래의 가치를 낳을지 모르네.

 지금 한반도뿐이 아니네. 이 지구상의 각 지역들은 생존의 야비한 2원론으로 굳어져 버렸네. 인종·민족·계급, 소유와 분배, 그리고 문화의 향수(享受) 등 어느 하나라도 고루 펼쳐지는 화해의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네.

 상하 빈부 미추 선진후진 강약 등의 흑백의 현실을 그 적대와 차별로부터 건져올린 총화(總和)의 역사를 어디 가서 만나겠는가. 그 모성적인 회색의 삶과 꿈을 어디 가서 찾아내야 하는가.

 나는 한반도에서의 중도는 대승불교 중관(中觀)사상으로서의 공(空)으로부터 하나의 묘유(妙有)로 기대해 보네. 또한 유교 중용사상으로도 회색의 원융성을 얼마든지 이끌어낼 수 있네.

 요컨대 중도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의 애매한 도식(圖式) 이상으로 추구되어야 할 이상향의 정신이겠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지혜 속에서 유추하는 원효의 화쟁(和諍)과 무애(無碍)가 있고 근세에는 세종의 전인적(全人的)인 이상국가 실현을 앞으로 하고 영정(英正) 시기의 탕평과 실학인문으로 하여금 초이념적인 중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이런 고전적인 중도노선은 사상이든 사회이든 그것의 주체가 개방과 소통일 때에만 가능하겠네.

 한반도의 문화시간은 먼저 냉엄한 성찰을 통해 그 소숭성(小乘性) 배타성의 연대기를 극복할 새로운 인성(人性)의 함양을 모색해야겠네. 지금의 극단화된 환경은 가장 적나라한 근본주의와 교조주의 또는 그 소아병의 원인이 되고 있네.

 너는 너다, 나는 나다로 고착된 삶의 정체(停滯)에서 둘과 둘 이상의 세계가 만나는 합일(合一)의 단계를 이끌어낼 집단지성의 지도력이 절박하네.

 그 당시의 내몰린 상황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극단론자이던 단재(丹齋)가 자아 상실의 극단을 규탄한 사실은 인상적이네. 단재는 조선에 불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불교가 아니라 불교의 조선이 되고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의 조선,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의 조선이 된다고 통탄한 바 있네.

 이에 훨씬 앞서 고대 최치원은 동방의 풍류를 유불선(儒佛仙) 3교를 융합하고 그것을 유연하게 체화함으로써 자아의 도(道)로 떳떳하게 내세운 사실이 있지 않은가.

 최상의 회색사회를 함께 생각해 보세. 큰 세상은 큰 가슴으로부터 열린다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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