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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그들이 떠난 자리, 미술가에겐 별다른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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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경
화가

가을 단비가 내린 지난 주말 방 안에서 꼼짝 못했다. 몸살감기로 줄줄이 약속을 취소했다. 아, 오한의 써늘한 응달에서 더 이상 세상으로 못 나갈 듯했다. 그렇게 톡톡히 계절세(季節稅)를 사흘 동안 치렀다. 그리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이번 주말 역시 늦가을 비가 찾아왔다. 지난주 감기로 녹아내렸을 것 같은 내 몸이 여전한 게 신기하다.

 비와 비 사이에 샛노란 은행 이파리들이 무더기로 떨어졌고, 몸살감기의 여파로 반갑지 않은 난방용 도시가스비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 반가운 손님을 맞았는데, 미아리 사창가에 둥지를 튼 사진작가 김규식이다. 감기 이후 맞는 첫 방문자인 그는 올해 여름 그곳에서 아홉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집창촌이었던 하월곡동의 한 건물에서 3년째 ‘더텍사스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미술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기획한 전시회에 처음 들렀을 때 그 공간이 너무 생경했다. 전기·상하수도 그리고 화장실마저 없었다. 오직 좁은 방을 구획하는 벽, 얽혀 있는 통로, 덩그런 사닥다리와 자그마한 창이 다였다. 심지어 창이 없는 방도 있었다. 과연 그런 공간에서 전시가 가능할까 싶었다. 전시 공간을 밝힐 조명도 설치할 수 없었다. 수도마저 없어 오프닝 리셉션용 다과도 제대로 준비하기 힘들었다. 방문자가 편히 머무를 편의시설은 아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작품을 위한 것도, 사람을 위한 것도 전혀 없는 불편한 공간이었다.

 사실 근본 문제는 시설공사 비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 악조건을 개선하기보다 그대로 쓰기로 결정했어요. 오로지 벽만이 작품을 기대거나 걸게 하는 유일한 장치였죠.” 관람객들은 홍채가 어둠에 동화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벽 가까이로 더듬어 가야 작품을 볼 수 있는 이상한 전시회였다. 하지만 관람객들의 평은 뜻밖이었다. “관람자가 방방이 작품을 찾는 능동적 수고를 하게 되고 다른 화랑보다 훨씬 밀착된 관람을 즐겼다”는 반응이었다. 참여한 미술가들도 “그런 극단적 여건이 오히려 날것으로 생기를 띠게 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능케 했다”고 고백했다.

 ‘더텍사스프로젝트’ 전시장에선 바깥에 은행잎이 지는지 비가 오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상하수도며 전기 사용료의 청구서를 받을 수도 없다. 그야말로 헐벗은 공간이다. 성매매업으로 불야성을 이루었을 이곳의 주인들은 다들 떠나고 없다. 야릇한 붉은 등 아래 망사스타킹으로 호객하던 여성들이며 포주들 그리고 그들을 찾아들던 굶주린 취객들의 서성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원래 그들을 위해 설계되고 발전했던 공간이었다. 산업화의 껍질, 개발시대의 버려진 유산. 그곳에 사진작가가 찾아들었고, 미술가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누군가는 버렸지만 예술가들의 눈에 그곳은 폐허가 아니라 창작의 씨를 뿌릴 기름진 땅이었다.

 미술가들은 창작과 발표의 공간에 굶주려 있다. 그들 중 제도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창작 의지로 버려진 곳을 달게 찾아드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떠난 자리에서 그들은 둥지를 틀고 작품을 만든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국내에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태백시 철암동 일대의 폐탄광촌에 모여든 ‘할아텍’ 예술가집단이 좋은 예다. 이들은 철암역사에 화랑을 만들고 거기에서 전시를 열었다. 지역 초등학교를 찾아가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적극적으로 주민의 참여를 유도했다. 지역에 작품을 설치하고 주변의 시각적 환경을 개선했다.

 누군가가 쓰다 버리고 떠난 자리에 창의적 미술가들이 찾아든다. 그들은 원래 그곳의 주인이 아니었기에 언젠가 또 다른 곳으로 옮아가야 한다. 그 습성이 보헤미안의 전통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둥지를 튼 곳에 그들의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주변에 밝은 기운을 퍼뜨린다. 마치 이스트가 밀가루에 들어 빵을 부풀게 하고 포도즙에 들어가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새싹이 돋는다. 이처럼 뜻밖의 공간에서 만나는 예술의 흥분이 감기에서 벗어난 몸처럼 새 기운을 전하길 바란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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