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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긴 겨울잠 준비하는 삼성·현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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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지난해 세계 자동차 시장 규모는 8445만 대. 이 중 고급차는 833만 대 남짓이다. 하지만 눈여겨볼 수치는 따로 있다. 지난 5년간 대중차는 연평균 6% 늘어났지만 고급차는 10.5%씩 성장했다. 고급차의 잠재력이 더 크다. 영업이익률 명암도 엇갈린다. 대중차가 주력인 GM·포드 등의 영업이익률은 3.9%였으나 고급차 중심인 벤츠와 BMW는 8.8%나 된다. 현대차가 지난주 에쿠스를 접고, 제네시스를 고급차로 삼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급차에 정면 승부를 걸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판단이다. 위기의식이다

 하지만 현대차가 완전히 달라진 진면목은 딴 데 있다. 현대차는 최근 매물로 나온 현대증권에 입질도 하지 않았다. 4년 전 ‘그룹 정체성’을 내세워 현대건설을 매입했던 때와 딴판이다. 지난주에는 “(위기에 빠진) 현대상선의 인수도 검토한 바 없다”고 선언했다. 현대차 공영운 부사장은 “딴 분야에 눈 돌릴 겨를이 없다”며 “전기차·자율주행차 등 새로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선도 투자를 하기에도 벅차다”고 설명했다.

 삼성그룹의 계열사 매각 때 삼성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깜짝 놀랐다. 매각 대상에 삼성정밀화학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원래 이름은 한국비료.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삼성이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한 바로 그 기업이다. 그렇다고 삼성이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애정이 깃든 기업”이라며 야금야금 주식을 사들였다. 그리고 27년 만인 94년 정부가 민영화를 위해 한비를 시장에 내놓았을 때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삼성 비서실은 인수를 결사반대했다. 비료시장의 전망이 밝지 않은 데다 국영기업일 때 조직된 강력한 노조가 버티고 있었다. 삼성의 무(無)노조 방침과 어긋났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무조건 한비를 매입하라”고 주문했다. 선대 회장의 한을 풀고, 명예회복을 위한 도박이었다. 삼성은 결국 산업은행의 내정가(1300억원)를 훨씬 웃도는 2300억원에 한비를 낙찰받았다. 지금의 삼성으로선 푼돈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3조원 남짓했던 삼성전자 시가총액을 감안하면 엄청난 베팅이었다. 삼성이 선대 회장의 손때가 묻은, 이런 깊은 사연의 삼성정밀화학을 19년 만에 다시 팔아 치운 것이다.

 요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공통분모는 “이제 잘하는 분야에서 더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 사업 중심의 글로벌 전문기업으로 가겠다는 포석이다. 삼성은 전자와 바이오, 현대차는 자동차의 한 우물을 파겠다는 각오다. 이를 위해 비주력 부문들을 가지치기하면서 ‘문어발식 재벌’은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이다.

 국내에서 가장 돈 많은 기업들이 왜 이렇게 몸 만들기에 치중할까? 우선,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디플레는 경제의 저혈압이다. 구조적 저성장은 겨울잠에 빠져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은 그래도 60년부터 30여 년간 쌓아 놓은 두툼한 피하지방 덕분에 살아났다. 반면 한국은 피하지방이 얇아 긴 겨울잠을 버텨 낼 기초체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둘째는 중국 공포다. ‘중국 특수’는 사라진 지 오래이고, 중국의 ‘중화학 굴기(堀起)’가 우리 주력 산업들을 위협한다. 저가 공세와 기술 경쟁이 장난이 아니다. 중국 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구조조정은커녕 무모한 ‘치킨게임’까지 무릅쓰는 분위기다.

 그나마 삼성·현대차는 미리 10년 뒤를 준비하는 느낌이다. 이에 비해 우리 정치권과 정부는 6개월 뒤 총선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가계도 미국의 금리 인상 조짐에 아랑곳없이 돈 빌리기가 한창이다. 이대로 가면 양극화는 더욱 깊어질지 모른다. 미리 겨울잠에 대비한 대기업들은 더 강해지고, 정부와 가계는 헐벗은 채 강추위에 떨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난세에 영웅 나고, 불황에 거상(巨商) 난다’는 옛말이 있다.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에 우리 모두 한 번쯤 긴 겨울잠을 떠올렸으면….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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