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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한 전쟁의 결말은 동북아 초인플레이션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여학생에게도 사격술을 가르치는 일본. 중일전쟁의 비용은 군사비 현지차입제도와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을 통해서 중국, 만주, 조선의 주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이는 엔 블록의 ‘맏형’인 일본이 마침내 책임과 체면을 포기한 것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엔 블록의 해체는 군사적 패배에 관계없이 예정된 길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의 초(超)인플레이션은 악명이 높다. 1922년 8월부터 1923년 11월까지 도매물가가 무려 297만 배나 뛰었다. 물건 값이 매일 20.9%씩, 3.7일 마다 두 배씩 오른 셈이다. ‘한 장의 지폐보다 /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이생진, ‘낙엽’)는 시가 꼭 들어맞았다.


지폐가 낙엽보다도 가치가 없는 상황은 동북아에서도 있었다. 중일전쟁이 그 출발점이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일본은 재정과 금융을 전시비상체제로 전환했다(193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회의 예산심의와 결산승인 활동은 중단되고(임시군사비특별회계법), 민간의 회사설립·증자·합병, 유가증권 인수·모집, 금융기관의 설비자금 대출 등은 허가제(임시자금조정법)로 바뀌었다.


이듬해에는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모든 지역에서 노동력을 시작으로 군용물자, 식량, 연료와 전력, 의약품, 선박·항공기·차량, 토목·건축 물자 등에 대해 징발과 배급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올인한 ‘총력전(total war)’의 돌입과 함께 사실상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작동했다.


 

오늘날 서울 남대문로 롯데백화점 자리에 위치했던 조선식산은행. 한때 이 은행의 자본금(6000만 원)은 조선은행(4000만 원)을 앞질렀다. 이 은행의 주된 업무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토지구매자금과 사업자금을 융자하는 것이어서 조선인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1926년에는 나석주 의사의 폭탄을 맞았다.


전시체제 덕분에 날개를 단 조선은행낯선 시스템 속에서 조선은행의 위상도 달라졌다. 그동안 조선의 금융계에서 조선은행은 외톨이였다. 다른 금융기관들이 조선총독부령을 근거로 설립되어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았으나, 조선은행은 일본법(조선은행법)을 근거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1924년에는 이 은행의 감독권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일본 대장성으로 이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지휘계통을 벗어난 조선은행(선은) 대신 조선식산은행(식은)을 금융정책의 창구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의 금융기관들은 ‘선은계’와 ‘식은계’로 구분되었다. ‘선은계’는 조선은행이 일본 콜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을 공급받는 보통은행들이었고, ‘식은계’는 그 나머지였다. ‘식은계’는 일본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동양척식주식회사)하거나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해 온 식은에 의존했기 때문에 감독권이 없는 조선은행을 ‘소가 닭 보듯’ 했다.


굳이 식은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금융조합연합회(훗날 농업협동조합)는 ‘선은계’ 보통은행들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조선신탁주식회사(훗날 한일은행)는 독점기업이라서 조선은행에 아쉬울 것이 없었다. 조선은행은 반쪽짜리 중앙은행이라는 열등감 속에서 자본금 규모가 비슷한 식은을 경쟁자로 여겼다(조선은행이 만주에서 영업확장에 사력을 다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임시자금조정법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의 국채발행과 차입금 조달을 지원하는 ‘조선금융단’이 발족되었다. 오늘날 전국은행연합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조직의 단장은 조선은행 총재가 맡았다. 그것은, 조선은행이 명실상부한 조선 금융계의 대표임을 의미했다. 사쿠라자와 슈지로(櫻澤秀次郞) 이사는 “이로써 중앙은행의 기능을 명실 공히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며 감격했다. 조선은행은 솔선수범하여 일본 국채를 인수하면서 다른 금융기관들을 독려했다. 과거 경쟁 상대였던 식은에까지 돈을 찍어 국채인수자금을 듬뿍 융자했다. 그때부터 ‘식은계’가 조선은행을 비로소 맏형(primus inter pares, 중앙은행의 별명)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국가총동원법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전시에 정말 중요한 자원은 금융자원이다. 특히 금은 중요한 대외준비자산이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행, 조선은행, 대만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 340여t을 징발했다(금자금특별회계법). 아울러 산금법(일본)과 조선산금령(조선)을 제정하고 민간업자들의 금 생산을 장려했다.


그 법에 따라 설립된 조선산금매입주식회사는 조선에서 생산되는 금을 닥치는 대로 매집하여 일본으로 넘겼다. 그 결과 1941년까지 일본 정부가 새로 조달한 213t의 금 중 144t이 조선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금 지출은 여전히 생산을 초과했다. 1941년 말 일본의 ‘금자금 특별회계’가 보유한 금은 3t으로 줄었다.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autarky)에 몰린 일본은 그해 12월 태평양전쟁을 택했다.


일본 정부가 금의 확보에 이어서 내자(內資)동원에 발동을 걸었다. “손실을 입는 경우 국가가 보상한다”는 약속을 걸고 금융기관들에게 융자명령을 내렸다. 군 간부가 스탬프를 찍은 군수회사의 어음은 ‘채무인수명령’에 따라 시중은행이 할인하고, 일본은행이 그것을 재할인했다.


조선에서는 식은이 동원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이 은행의 채권발행한도를 대폭 늘리고, 일본 정부는 원리금 상환을 보증했다. 채권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은 군수산업 대출에 쓰였다(나중에는 조선은행도 같은 일에 동원되었다). 아울러 조선 전체로는 강제저축 목표가 설정되어 금융기관들이 내자동원을 연대해서 책임졌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그 목표는 항상 초과 달성되었다.


하지만 군사비를 가장 쉽게 조달하는 방법은, 역시 화폐 증발이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행의 보증발행한도(국채를 담보로 한 화폐발행액)는 10억 엔에서 17억 엔으로 확대되고, 1년 뒤 다시 22억 엔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의 보증발행한도도 비슷하게 늘었다.


1941년이 되자 최고발행액을 법률로써 규율하지 않고 대장대신이 매년 수시로 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대장대신은 각 중앙은행들의 태도 즉, 강제저축 달성액과 일본국채 인수액을 감안하여 선심 쓰듯 최고발행액을 늘렸다. 1942년에는 최고발행액 위반에 대한 벌칙마저 없앴다. 발행한도를 초과할 때 부과하던 제한외발행세(초과액의 3%)를 폐지한 것이다. 1943년에 이르자 더 대담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본에서 국채를 발행하여 중국과 만주로 군사비를 송금하는 것도 귀찮아진 나머지, 해당 지역 발권은행에 돈을 찍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집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군사비 현지차입제도).


이쯤 되자 군표와 화폐의 차이는 사라지고, 화폐발행에 관한 권한은 사실상 군부로 넘어갔다. 아오키 가즈오(靑木一男) 전 대장상이 중국에서 화폐발행을 자제하라고 충고하자 군부가 대놓고 안위를 협박했다. 군부는 “황실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화폐를 증발해도 인플레이션은 안 일어난다”고 큰소리쳤다.


 

초인플레이션에 지쳐있는 민심을 달래려고 1949년 국민당 정부가 1인당 40g씩 금태환을 발표하자 환전을 위해 은행으로 몰려든 인파. 수십 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그해 10월 공산화는 결국 막지 못했다.


남에게만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일본군부가 견제를 받지 않고 점령지에서 마음대로 전비를 쓸 수 있었던 장치는 식민지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예금협정)이었다. 만주중앙은행과 화북지역의 중국연합준비은행(연은)은 현지 일본군에 화폐를 발행하면서 그만큼을 조선은행에 대한 예금 채권으로 기록했다. 조선은행은 타 발권은행에 대한 채무가 늘어난 만큼을 일본 정부에 대한 대출금으로 기록했다(지난 호 컬럼 참조).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조선은행의 대차대조표와 영업이익은 거침없이 팽창했다.


한편, 전쟁이 깊어지면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일본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군비 조달을 위해 돈을 찍기 바빠서 인쇄기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영국의 비행기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부지런히 영국산 위안화를 수송했다. 지폐가 낙엽보다도 가치가 없어진 상황 속에서 중국인들은 돈을 세는 대신 저울로 무게를 재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초인플레이션은 1949년 공산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위조지폐도 퍼뜨렸다. 1927년 만주사변 때 이미 위안화를 위조한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민간업자를 시켜 정부 밖에서 은밀히 진행했다. 그러나 1940년부터는 육군 소속 노보리토(登?)연구소가 직접 나서서 위폐 제조를 지휘했다. ‘스기공작(杉工作)’이라 불린 이 작전은 나치가 벨기에에서 추진했던 것을 모방한 것이다. 기미지마 이치로(君島一郞) 조선은행 부총재는 이 위조화폐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해서 아편액에 담갔다가 말려 유통시킬 것을 제안했으나 아편을 운반한 짐꾼(coolie)들이 소문을 낼까봐 포기했다.


한편, 중국의 상인들은 만주국폐와 연은권을 들고 압록강을 넘었다. 아직까지 물가가 낮은 조선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조선은행은 예금협정 때문에 그 환전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동안 영업이익의 원천이 되었던 예금협정은 이제 통제 불가능한 화폐 증발의 도화선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조선도 초인플레이션의 불길에 휩싸였다.


“1엔=1원=1위안”이라는 엔 블록의 원칙이 작동하는 한, 일본이 다음 차례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끝나고, 엔 블록은 해체되었다. 바야흐로 바이마르공화국의 운명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일본에 패전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반면 휴지가 된 만주국폐와 연은권을 들고 있던 조선은행에는 대재앙이었다.


그렇다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런 재앙을 맞이한 조선은행 직원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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