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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호장룡’ (2000)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도가 땅에 떨어진 19세기 말 중국?인생무상 느껴 칼 내려 놓는 고수


 

5 무당파 고수 리무바이. [사진 마티]


‘와호장룡’은 무당파의 고수 리무바이(저우룬파·周潤發)가 강호에 염증을 느끼고 무림을 떠나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중국 청나라는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 강호를 주름잡으려고 하는 이들은 명분을 앞세워 사익을 취하고, 이름을 얻은 진정한 고수는 인생무상을 느끼며 칼을 내려놓고자 한다.


리무바이는 무당파의 보검 ‘청명검’을 수련(량쯔충·楊紫瓊)에게 맡겨둔다. 그러나 수련을 통해 옥대인에게 맡긴 청명검이 도난당하고 만다. 검의 행적을 쫓던 리무바이는 스승을 독살한 ‘푸른 여우’의 존재를 알게 되고, 푸른 여우를 유인하기로 계획한다. 수련은 옥대인의 딸 용(장쯔이·章子怡)의 몸동작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정체를 의심한다.


‘와호장룡’의 결은 촘촘하다. 겉으로는 강렬한 액션을 내세우지만, 안으로는 다양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품고 있다. 리무바이는 친구의 연인이었던 수련에게 뒤늦게나마 마음을 고백한다. 마적단의 두목 호(장첸·張震)가 용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서역에서 그에게 납치당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호의 방문 이후 용은 집안이 정한 혼례와 호를 향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4 수련.


성장하고 방황하는 무림의 여자들영화의 중반 이후는 용의 성장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은 푸른 여우의 제자이며,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지체 높은 집안의 여인이고, 청명검을 들고 무림 고수들과 대결을 펼치는 전도유망한 젊은이기도 하다. 수련과 용이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용의 청명검에 맞서 수련은 쌍검부터 창, 바닥을 깨부술 정도로 무거운 병장기로 무기를 바꿔가며 대응하는데, 두 여배우의 화려하고 힘 있는 액션이 격렬하게 부딪힌다.


수련은 손에 명검을 쥐고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용을 따끔하게 질책하는 동시에 대련을 통해 칼 쓰는 법을 가르친다. 리무바이 역시 나무 작대기 하나로 청명검을 든 용을 제압하며 검의 이치와 도에 대해 충고하며 용을 올바른 도의 길로 인도하려 한다. 용의 재능을 알아본 리무바이는 그녀를 제자로 삼고자 하지만 용은 자유롭길 원한다. 용에게 ‘강호’는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와호장룡’은 리무바이와 용, 푸른 여우와 용의 갈등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를 꿈꾸는 세대 간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기존 무협 영화의 관습에서 탈피해 여성 캐릭터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점은 이 영화의 미덕이다. 용의 유모이자 스승인 푸른 여우의 복수극, 용의 격정적인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녀들이 힘을 얻기 위해 ‘암기’를 써가며 생존해가는 과정은 과거의 무협영화에는 없던 장면이다.



 

3 이안 감독.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웅의 여정‘와호장룡’의 세계는 수많은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 정파(리무바이)와 사파(푸른 여우), 강함(용, 호)과 부드러움(리무바이), 덧없음(리무바이)과 열망(용), 규율(결혼)과 자유(연애)가 교차한다. 대숲에서 차를 마시는 장면들이 전하는 여백의 미장센이나 대나무처럼 몸을 기울이며 경공술을 펼치는 신화적 장면들은 화면이 멈춰 있을 때조차 여운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읽지만, 당대의 영웅인 리무바이는 무림에 염증을 느끼다 죽음을 맞이하고, 용은 영웅의 자리로 도달하지 못한 채 마무리가 된다. 이 작품은 영웅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자와 정상으로 오르려는 자의 과도기적인 여정으로 채워져 있다. 영웅의 완성이나 탄생이 아니라 영웅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와호장룡’은 인생의 단면들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내려오고 있는 자인가, 오르려고 하는 자인가. 영웅의 완성은 순간이고, 그 순간은 덧없이 사라져버린다. ‘와호장룡’이라는 제목은 ‘호랑이가 누워 있고 용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뜨겁게 사랑했던 호와 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죽어가는 고수 리무바이와 급부상하는 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우리들은 누구와 더 닮아 있는가. 인생을 주유하는 영웅들의 형상이 네 글자의 제목 속에 담겨 있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주먹을 꽉 쥐면 아무 것도 없지만?손을 펴면 그 위에 모든 게 있다


 

무당파 고수 리무바이는 어느 날 수련을 찾아와 자신의 청명검을 베이징의 태대인에게 맡겨 달라 부탁한다. 수련이 태대인에게 검을 건넨 날 밤, 청명검 도난 사건이 발생한다. 옥대인의 딸 용이 용의선상에 오르고, 그녀가 리무바이의 스승을 죽인 푸른 여우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한편 과거 용의 정인(情人)이었던 호가 용을 찾아와 다시 사랑을 고백하고, 용은 정략결혼과 호의 고백을 모두 물리치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 청명검을 들고 집을 떠난다. 용과 청명검을 좇던 리무바이와 수련은 오랫동안 숨겨온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데….


두 커플의 사랑과 두 사제 사이의 신의가 꽃처럼 화려한 검술의 군무와 비장하리만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애닯게 펼쳐지는 영화 ‘와호장룡’. ‘와호장룡’은 엎드린 호랑이와 숨은 용이라는 뜻이다. 젊은 주인공 옥교룡(玉嬌龍)의 ‘교룡’은 귀여운 용을, 나소호(羅小虎)의 ‘소호’는 작은 호랑이를 뜻하니, 아마도 용과 호를 이렇게 일컫는 것이리라. 만일 그들이 원하는 삶을 영위했다면 두 남녀는 하늘로 치솟아 비상하는 용과 울창한 숲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호랑이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맺어지지 못한 두 남녀는 엎드린 호랑이와 숨은 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옥교룡은 자유를 얻지 못했고, 나소호는 사랑을 얻지 못했다. 용이 바람을 얻지 못하고 호랑이가 숲을 얻지 못한 것이다. 리무바이와 유수련 커플도 ‘와호장룡’이었다. 강호 최고수임에도 평생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사는 이 둘 또한 자유롭지 못하긴 매한가지였으니까.


 


자유 찾기 위해 청명검 훔치는 여인 규방에서만 자랐을 옥교룡이 어떻게 자유와 사랑의 감각을 알게 되었을까. 계기는 마적단 두목 나소호와의 만남이었다. 옥교룡은 나소호라는 남자를 통해 자신이 야성과 자유를 만끽했다는 걸 자각하게 된다. 여자든 남자든 자연스럽게 만나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하지만 봉건 사회에서, 특히 여자에게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정략결혼 등 집안의 강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옥교룡은 청명검을 훔친다. 청명검만 손에 넣으면 누구도 자신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한 힘과 자유를 갖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리무바이는 출중한 무술 솜씨를 지닌 옥교룡을 제자로 삼겠다는 욕심을 품은 지 오래였다. 결국 옥교룡은 강호를 떠나겠다는 리무바이의 결심을 접도록 만든다. 아니, 자유를 갈망하는 젊은 처자가 리무바이의 무의식에 불을 질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리무바이는 옥교룡을 제자로 품게 되지만, 결국은 옥교룡의 스승이자 자신의 원수 푸른 여우의 독화살에 맞는다. 평생을 사랑했지만 한 번도 드러내지 못한 가슴 시린 연인 유수련 품에 안겨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리무바이는 뒤늦게 사랑을 고백한다.


 

2 한때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호와 용.


헛헛한 동양 허무주의가 영화 관통 이 영화는 헛헛한 동양적 허무주의를 짙게 풍긴다. 때를 만나지 못한 호랑이와 용의 이야기니, 어찌 그렇지 않을까. ‘와호장룡’의 허무주의는 모든 장면에 공기처럼 편재하지만, 가장 강렬한 주제는 두 커플 사이의 허무한 사랑, 혹은 어긋나는 사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나는 임처럼 허무한 대상이 또 있을까. 함께 있을 것도 아니면서,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날 예정이면서, 리무바이와 옥교룡은 홀로 남겨질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매정함을 넘어 허허롭기만 하다.


푸른 여우, 청명검, 그리고 옥교룡을 찾던 와중, 리무바이는 스승의 이야기를 마음의 연인이자 사제인 유수련에게 넌지시 들려준다. “주먹을 꽉 쥐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주먹을 놓으면 그 안에 모든 게 있다고 하셨어.”


주먹을 꽉 쥔다는 것, 무언가를 도망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소유한다는 의미다. 반면 주먹을 편다는 것은 자신이 잡고 있던 것을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의미, 즉 무소유를 뜻한다. 무언가를 움켜쥘 것이냐, 아니면 놓아줄 것이냐. 소유냐, 무소유냐. 어느 경우든 허무와 죽음이 불가피하다. 어떤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허무를 낳는다.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게 될 테고, 그 절망감에 자신도 파괴될 터이니 말이다.


또 아무것도 잡지 않으려는 의지도 허무를 낳는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어찌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이런 동양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잡지 않는 듯이 잡고, 놓아주지 않는 듯이 놓아주기. 그러니까 소유와 무소유라는 양극단, 그 사이 어느 지점에 지혜롭게 머물 수는 없을까. 스승의 말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꽉 쥐지도 말고 확 풀어주지도 말아야 한다”고.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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