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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먹방 테러’ 시대… 안 보고 덜 먹을 자유가 그립다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거리에 나서면 사방이 모니터다.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마찬가지다. 지방강연이 많다 보니 기차를 많이 이용하는 편인데, KTX에는 친절하게 칸마다 모니터가 서너 개나 있어서 잠깐 방심하면 어느새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서울역, 부산역 같은 역사에는 대형 전광판에서 쏘아대는 광고로 눈이 어질어질하다. 심지어 택시 안에도 모니터는 살아 있다. 그래서인가. 온종일 눈에서 빛이 명멸한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데도 이럴진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의 빛에 노출된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리.



[길 위의 인문학] 빛의 폭주와 야식의 향연

지방과 도시의 차이도 거의 없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전국의 역사와 건물이 비슷해졌다. 모니터가 늘어나고 전광판이 들어서고, 한마디로 ‘스펙타클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외형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부자다. 경제가 어렵고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살림이 팍팍하면 그게 감각으로 느껴져야 하지 않나. 나날이 이렇게 럭셔리해지는데 뉴스에선 날마다 힘들다고, 어렵다고 하니 참 헷갈린다. 빛의 폭주와 저성장의 위기론, 이 엄청난 간극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보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건 아닐까환경이 이렇다 보니 사색은 고사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기도 어렵다. 한마디로 신체가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또 본의 아니게 온갖 잡다한 정보를 다 접해야 한다. 당연히 머릿속은 뒤죽박죽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말한 “정보의 바다에 빠져 익사”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런가 하면, 바야흐로 ‘먹방전성시대’다. 부엌에 들어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던 중년 남성들이 갑자기 요리전선에 뛰어들었다. ‘셰프’라는 생뚱맞은 이름으로. 물론 맛집을 소개하는 채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번은 지리산 올레길을 갔다가 한 무리의 인파가 줄을 서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집 앞에는 대통령 선거 때나 볼 법한 대형 현수막에 1박2일 멤버들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다녀간 식당이란다. 지리산 계곡까지 그럴 지경이면 시내의 맛집들이야 말해 뭣하랴. ‘대체 식욕이 뭐길래’ 이런 과열을 초래하나 싶었는데, 이젠 한 술 더 떠 직접 ‘셰프들’이 나와 요리실력을 뽐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잘 먹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내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나 그건 먹거리 자체가 부족해서 한끼 밥조차 맘 놓고 먹기 힘들 때 소리다. 지금도 그런가? 하기야 지금도 입만 열면 “먹고 살기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배고프다’는 말이 아니라 소비생활이 녹록치 않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말 부자다. 세계 어느 도시도 이렇게 ‘삐까번쩍’하지 않다. 정말로 배가 고픈 시대라면 당장 저 모니터들을 팔아서 먹거리로 바꾸어야 한다. 한데 그게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사방에 먹을 게 지천이다. 오히려 식탐을 걱정해야 할 때다. 실제로 청춘남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다이어트가 일생일대의 미션이다. 나아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의학은 말한다. 적게 먹으라고. 소식만이 살 길이라고. 암이 그 결정적 증거다. 암에 걸리면 무조건 식이요법에 돌입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식탐이다. 식탐을 이기지 못해 암을 더 키우는 환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런 이들에게 먹방과 맛집의 범람은 고문이나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저항하는 건 알콜중독자가 술을 끊는 것이나 도박중독자가 도박을 끊는 것 못지 않게 처절하다. 더구나 먹방은 대부분 밤에 나온다. 먹방을 보면서 야식을 먹으라는 뜻이리라. 과식도 문젠데 하물며 야식이라니. 이쯤 되면 ‘전파낭비’가 아니라 ‘전파테러’에 가깝다.



 



불면증 부르는 빛과 야식 소개 방송모니터와 먹방의 범람, 둘은 기묘하게 연동돼 있다. 시각은 오장육부 중에서 간과 심장, 즉 불의 기운과 관계 깊다. 하여, 빛의 폭주에 노출되면 몸에서는 화(火)기가 치성해진다. 화기가 치성해지면 물이 마른다. 수(水)기운은 신장이 주관하고, 신장은 귀와 연동되어 있다. 따라서 화기를 많이 쓸수록 청력이 떨어진다. 난청과 이명, 이석 등의 질병이 다 거기에 해당한다. 현대인은 대체로 청력이 약하다. 듣는 만큼 말한다. 잘 듣지 못하면 언어능력도 그만큼 떨어진다는 얘기다. 더 심각한 건 맥락 파악을 잘 못하게 된다. 이미지로 소통하면 되지 않느냐고? 인스타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두 장의 멋진 사진으로 소통하겠다는 건데, 그 이미지가 과연 삶의 실상을 얼마나 반영할까? 이미지는 ‘환(幻)’이다. 그 환을 쫓다 보면 공중부양하기 십상이다. 기사도 소설만 읽다가 뇌수가 말라버려 세상을 온통 ‘소설 속 이미지’로 읽어버린 방랑기사 돈키호테처럼. 돈키호테가 그랬다. “기사도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만 절대 듣지 않았다. 자신의 뇌수를 채운 이미지들과 한 몸이 된 탓이다. 돈키호테는 그래도 웅변실력만큼은 빼어났지만 현대인은 청력과 함께 목소리를 잃고 화법 자체를 잃어가고 있다. 모니터가 범람할수록 스토리는 사라진다는 사실, 깊이 환기할 일이다.



한편, 야식은 대개 기름지고 달다. 하여, 야식을 먹으면 오장육부가 맹렬하게 움직여야 한다. 에너지 소모가 아주 극심하다. 그래서 술을 곁들이게 된다. 기름에 불을 끼얹는 격이라고나 할까. 당연히 화기가 망동하면서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안 그래도 휘황찬란한 야간조명 때문에 ‘빛공해’를 운운하는 시대인데, 거기다 야식까지 곁들이면 불면증은 불 보듯 뻔하다. 불면증은 만병의 근원이다. 잠 못 이루는 밤처럼 괴로운 것도 없다. ‘잃어버린 밤’을 찾는 것이 문명적 과제로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숙면이야말로 우리 몸을 정화시키는 최고의 양생술이다. 암세포를 억제하는 멜라토닌과 충만감을 유발하는 세레토닌도 다 ‘깊고 단 잠’과 관련된 호르몬임을 명심하라.



 



모니터에 시선 뺏기면 뇌파 정지 결국 빛의 폭주와 야식의 향연은 우리 몸을 ‘상화(相火)망동’의 상태로 만든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 깨지면서 화기가 항진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심리적 균형과 조절능력도 깨진다. 특히 성욕과 분노조절이 어려워진다. 그런 상태에서 타인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매끄럽게 소통하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이것이 과연 사소한 문제인가? 국민건강을 명분으로 공공시설에서 담배를 추방하고 발암물질 하나만 나와도 식품업계 전체가 들썩이면서 이런 근본적 이치에 대해서는 어찌 이리도 무개념일까.



혹시 모니터가 늘어나는 것이 복지정책이고, 기름진 야식을 즐기면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무지요 넌센스다. 시각의 폭주와 식탐의 향연이 주는 건 충만함이 아니라 쾌감이다. 전자는 삶의 현장과 접속하게 하지만 후자는 현장에서 이탈하도록 부추긴다. 열하(熱河)의 한 장터에서 요술쟁이의 현란한 요술을 감상한 뒤에 연암은 묻는다. 아무리 멋진 요술일지언정 요술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눈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이럴 땐 거꾸로 눈으로 밝게 본다는 게 도리어 탈이 되는 법,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일 따름이다.” 눈을 떴으나 빛의 폭주 속에서 길을 잃은 장님에게 “도로 눈을 감고 가라”는 서화담(徐花潭)의 일화가 나오는 것도 이 대목이다. 정말 그렇다. 모니터에 시선을 빼앗길수록 뇌파는 정지된다. 성찰은 고사하고 사유하는 능력 자체가 멈춰버린다. 그러다 마침내 제 자신에게 속는, 곧 망상과 맹목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시각·식욕에 쏠린 문화배치를 바꾸자한편 동의보감은 양생의 원칙을 이렇게 정리한다. “양생에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명예와 이익을 버리지 못하는 것, 둘째 기뻐하고 성내는 것을 없애지 못하는 것, 셋째 음악과 여색을 버리지 못하는 것, 넷째 기름진 음식을 끊지 못하는 것, 다섯째 정신이 허약하고 정기가 흩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양생이란 삶의 방식 전체와 관련된 윤리적 수행이라는 뜻이다. ‘기름진 음식을 끊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식탐을 부귀와 성욕에 대한 집착, 감정의 오르내림 등과 같은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훈련과 수행이 필요하다. 이것을 집합적 차원에서 함께 해나가면 문화가 된다. 윤리적 혁명 혹은 삶의 질이 도약하는 지점도 바로 거기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있다. 참 좋은 말이다. 노동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충만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다는 바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헌데, 그 저녁을 빛의 폭주와 불타는 야식으로 채운다면? 또 그로부터 야기되는 비만과 불면증을 감내해야 한다면? 단언컨대, 누구도 그런 저녁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그렇다면 민주주의나 복지정책은 왜 필요한지 묻고 싶다. 감각이 오직 시각으로 쏠리고, 욕구가 다 식욕으로 향하는 이런 문화적 배치를 바꾸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볼 권리가 있다면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이 중요한 만큼 ‘덜 먹을 자유’도 있다. 판타지에 눈멀고 식탐에 시달리면서 삶의 능동적 주체가 되는?길은 단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보지 않을’ 권리, ‘덜 먹을’ 자유를 허(許)하라!



 



고미숙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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