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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을 향한 마지막 도약 ‘발레 여제’ 이별 의식에 객석 경건



첫사랑에 빠진 소녀가 달콤한 꿈에서 깨어 기쁨과 설렘에 겨운 몸짓으로 막을 닫는다. 40분간 기침소리 하나없이 숨죽였던 객석에 비로소 브라보가 터졌다. 지난 8일 오후, 발레리나 강수진의 마지막 한국무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좀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최고 무용수라지만 쉰에 가까운 나이, 무용과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완숙한 여인이 10대 소녀의 여린 감성을 어떻게 표현할지 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이 열리자 무대 위의 강수진은 한국의 국립발레단장이 아니었다. 푸쉬킨의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19세기 러시아 시골 마을의 순진한 소녀 타티아나 그 자체였다.


그를 타티아나로 만든 건 분장이나 의상이 아니었다. 표정 하나, 작은 시선 처리까지 깨알같은 디테일이 살아있는 연기력이었다. 타티아나로 분했던 다른 이들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그의 명불허전 연기는 새삼 피겨 여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차이를 떠올리게 했다. 동갑에 비슷한 체형의 두 사람이 같은 난이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울림을 줬던 것은 점수로 환산되지 않는 스텝 하나에까지 혼을 실은 김연아의 연기가 빙판을 예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강수진의 타티아나를 구별짓게 한 것도 영혼이었다. 첫눈에 반한 오네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뒤통수에서도 사랑이 느껴졌다. 그건 단지 무용이 아니었다.


테크닉도 빈틈없었다. 5일 프레스 시연을 포함해 나흘 연속 강행군의 막바지였지만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네긴’으로 오래 호흡을 맞춘 파트너 제이슨 레일리와의 꿈속 파드되의 속도감은 놀라울 정도였다.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드라마발레인 만큼 고전발레처럼 노골적인 테크닉의 향연은 없지만 자연스런 연기 속에 훨씬 더 복잡하고 모던한 테크닉을 그림처럼 녹여냈다. 올가 역의 강효정을 비롯해 슈투트가르트 단원 전체도 구름 위를 뛰는 듯 경이로운 움직임을 보여줬다.


‘오네긴’은 20세기 최고의 드라마발레로 꼽히지만 불과 수년 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만 볼 수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예술감독 리드 앤더슨은 “오늘날 오네긴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최적의 역할을 소화해준 강수진의 공이 컸다”며 “재능과 열정과 카리스마로 발레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그에게 당신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했다. 강수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멋진 무대를 한국에서 볼 수 있었을까.


평소 거창한 수식을 하지 않는 강수진은 ‘오네긴’을 은퇴작으로 택한 이유에 대해 그저 “내 스타일에 잘 맞고 할수록 느는 작품이라서”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무대를 보니 ‘오네긴’은 그의 발레 인생에 대한 은유로 다가왔다.


2막을 여는 서곡 ‘나타의 왈츠’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그의 드라마틱한 지난 여정을 스케치하는 듯 했다. 타티아나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오만하고 도도한 ‘나쁜 남자’ 오네긴은 곧 발레라는 이데아에 다름 아닐 터.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이라는 발레에 대한 열렬한 짝사랑은 발레 불모지에서 온 ‘순진한 처녀’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을 안겼을지. 모나코 유학 시절부터 하루 두 시간만 자며 오직 발레만 바라봤지만 데뷔 후에도 “죽도록 고생하며” 오랜 군무 생활을 감당해야 했고, 부상으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좌절도 겪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딛고 지금 이 순간 강수진은 ‘발레’라는 이상향에 도달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귀부인이 된 타티아나에게 매달리는 오네긴처럼 ‘발레의 신’도 강수진을 영 놓아주고 싶지 않은 듯, 그의 움직임은 한없이 완벽에 가까워 갔다.


3막 전주곡 오페라 ‘체레비츠키: 황비의 신발’ 중 폴로네즈는 그의 앞날을 축복하는 송가가 되어 울려 퍼졌다. 마지막 ‘회한의 파드되’가 아쉽게 끝났지만 최고의 명장면은 커튼콜이었다. 15분간 팡파레가 무한반복되는 가운데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무용수와 스태프 수십 명이 도열해 강수진에게 차례로 장미를 건네며 포옹과 키스를 나눴다. 국적을 넘어선 ‘발레 여제’에게 사랑과 존경을 전하는 감동적인 의식에 객석의 관객들은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강수진은 리드 앤더슨과 포옹하며 살짝 눈물을 비쳤을 뿐 시종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평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말해 왔다. 무용수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도 “오늘 연습이 어제보다 더 잘되면 행복하다”고 답했다. 마지막 한국 공연을 마무리한 그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하루하루’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내년 7월 2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은퇴 공연을 향해서 말이다. 그 무대는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할 최고의 무대가 되리라 확신할 수밖에 없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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