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역사통 기자단 따라잡기] 18.6㎞ 성곽 거닐며 수도 한양을 굽어보다

기사 이미지

흥인지문


서울 한산초에서 결성된 ‘역사통 기자단 3기’가 지난 8일 첫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3기는 한 달 동안 조선의 장군이 되어 조선 곳곳을 지키던 성곽을 돌아봅니다. 첫 번째 성곽은 조선의 도읍지 한양을 지켜온 한양도성입니다. 1394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와 사직, 궁궐을 지은 후 적의 침입을 막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울타리로 도성을 쌓을 것을 명령합니다. 이후 600년 동안 서울을 지켜 온 한양도성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요. 역사통 기자단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도성에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4대문
 
기사 이미지

도성도

역사통 기자단 3기는 조선의 장군이 되어 ‘한양도성’을 둘러봤습니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지 ‘한양’을 지키기 위해 건국 2년 뒤인 1396년에 축조되었어요. 임금이나 황제가 사는 도읍지가 성곽 내에 자리잡고 있어 ‘도성’이라 부르죠. 한양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이 한양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에 8개의 성문이 설치된 구조입니다. 성벽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울타리, 성문은 도읍지와 지방의 관문 역할을 했죠.

답사는 한양도성의 동쪽 문인 흥인지문에서 시작해 낙산의 능선을 따라 이뤄졌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 6가 도로 한복판에 위치한 흥인지문은 1396년 성곽과 함께 만들어졌죠. 처음엔 ‘흥인문’이었는데, 낮은 지대에 있어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자 산맥을 뜻하는 갈 지(之) 자를 첨가해 흥인지문으로 변경했대요.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현재 흥인지문 현판은 고종이 글자 수와 행을 늘려 땅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수리했다고 전해집니다.
 
기사 이미지

돈의문

기사 이미지

숭례문

기사 이미지

숙정문


한양도성의 성문은 모두 8개예요. 동서남북에는 4대문인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이 있고, 4대문의 중간중간에 4소문인 혜화문·소덕문·광희문·창의문이 위치했죠. 성문 이름은 정도전이 유교 사상을 담은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지었어요. 동쪽에는 어질 인(仁), 서쪽에는 의로울 의(義), 남쪽에는 예의 예(禮), 북쪽에는 지혜로울 지(智)를 사용해 조선의 건국 이념을 드러냈죠.
 
기사 이미지

낙산 성곽길


흥인지문 북측 구간에 있던 ‘ㄷ’자형 성벽은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과 이어지는 장소였어요. 하지만 1908년 일제의 도시계획 아래 철거되었고, 현재는 곳곳에 도로가 생겨 이 부분 성벽은 끊긴 상태예요. 흥인지문 옆 지하도를 통해 건너가야 낙산으로 올라갈 수 있어요.

김태민 역사통 기자단 3기 | “흥인지문에는 ‘옹성’이라는 특수장치가 있어요. 성문 밖에 반달 모양으로 덧붙여 세운 성벽이죠.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옹성으로 가려 적을 쉽게 공격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흥인지문의 옹성은 1397년(태조 6) 완공했어요. 흥인지문 북쪽의 낮고, 평탄한 낙산과 낮은 지대에 위치한 흥인지문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죠.”

적의 침입을 막는 성벽
기사 이미지

혜화문


흥인지문 북쪽에는 낙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총 둘레 18.6km인 한양도성은 한양의 북쪽 백악산(북악산)을 중심으로 낙타산(낙산)·목멱산(남산)·인왕산을 잇고 있어요. 처음 공사할 때에는 성 둘레를 97구간으로 나눴어요. 백악산 동남쪽 구간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천자문의 첫 번째 글자인 천(天)부터 지(地), 현(玄), 황(黃)을 거쳐 97번째 글자인 조(弔)까지 활용해 이름 붙였죠.

성곽 공사는 2차례에 걸쳐 시행됐어요. 1차는 1396년 1~2월 49일간, 2차는 8~9월 49일간으로 98일 만에 완공됐죠. 구간별로 지역 군현(群縣)의 백성들을 배치했어요. 1차 공사 때는 평안도·함경도 장정 11만8000여 명, 2차 공사 때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에서 8만여 명이 동원되어 약 19만7000여 명이 공사에 투입됐습니다. 당시 한양 인구가 5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많은 백성들이 공사에 참여했던 거죠.

그중 동쪽에 위치한 낙산 구간은 전체 97구간 중 10번째로 경상도 인력이 담당했어요. 4대문 중 하나인 흥인지문과 4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을 잇는 지역입니다. 산 정상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타락산이라고도 불렸어요. 낙산은 경사가 완만하고, 지대가 낮아 기운이 약하다는 풍수지리적 논란도 있었죠.
 
기사 이미지

여장


성곽은 성벽과 여장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아래에는 큰 돌을 쌓아 기단(건축물의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을 만들고, 작은 돌을 쌓아 올려 성벽을 만들었어요. 성벽 위에는 화살을 겨누거나 돌을 던지기 위한 담장인 ‘여장’을 세웠죠. 주변 지형을 그대로 이용했는데, 성 바로 안쪽에는 흙을 완만하게 쌓아 적이 쳐들어 올 때 빠르게 뛰어나가 방어할 수 있게 했고, 바깥면은 가파르게 만들어 적이 침입하기 어렵게 설계했습니다.
 
기사 이미지

암문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비밀의 문, ‘암문’이 나옵니다. 구석지지만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만들어 적의 눈을 피해 이동할 수 있게 한 작은 성문이죠. 비밀 통로이기에 일반 문보다 작고, 성문임을 알아 볼 만한 장치들도 없어요. 평소에는 막아 두었다가 적에게 포위당하거나 역습할 때, 물자를 운반할 때 등 필요시 비상구로 사용했어요.

낙산 구간은 유일하게 암문을 지나 도성 밖을 걸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한양도성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한눈에 볼 수 있죠. 도성 밖에서 성벽을 보면 곳곳에서 돌의 크기·모양·색 등이 다른 걸 발견할 수 있어요. 개축·보수한 흔적입니다. 낙산 구간에서 찾을 수 있는 돌은 태조·세종·숙종 때의 것이에요. 처음 한양도성을 지은 태조 시대엔 자연석과 흙을 섞어 사용했어요. 아래쪽에는 큰 돌로 기초를 튼튼히 하고 위로 점점 올라가며 작은 돌을 쌓아 나갔죠. 세종 때는 돌을 다듬어 직사각형의 돌은 아래에, 그 위에는 옥수수 알갱이처럼 다듬은 작은 돌을 쌓았어요. 숙종 때는 45㎝ 내외의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깎은 후 규칙에 따라 쌓아 올려 더 견고한 성벽을 만들 수 있었죠.

백성의 삶과 함께한 한양도성
기사 이미지

각자성석


암문을 통해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오면 성곽 내부에 형성된 마을을 만날 수 있어요. 낙산 구간 성 안쪽으로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이화마을이 있죠. 1960년대 낙후지역으로 묶여 재개발 구역이 됐는데, 도성 내 오래 자리한 마을의 특성과 역사적 가치를 살려야 한다는 의견에 마을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탈바꿈한 곳이에요.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었지만 500년 동안 한양도성 안에서 역사를 같이 해온 가치를 인정받은 겁니다.

한양도성은 방어 기능에 집중된 일반 성곽과 다르게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의 삶과 함께였습니다. 백성들은 보신각 종소리를 기준으로 여닫는 성문에 맞추어 집 문을 여닫았고, 선비들은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과거 급제를 빌기도 했어요. 돈의문이나 흥인문을 시작으로 성벽을 한 바퀴 돈 후, 돈의문과 흥인문을 번갈아 관통하는 ‘순성’을 하면 과거에 합격한다고 믿었거든요. 정조 때에는 봄과 여름, 인왕산·성북동 등에서 꽃놀이를 하는 ‘순성놀이’로 발전하기도 했죠.
 
기사 이미지

낙산 정상에서 본 전경


이화마을을 지나 낙산 정상으로 걸음을 옮기면 낙산공원이 나옵니다. 낙산은 지대가 낮고, 경관이 뛰어나 도성민이 여가를 즐기던 곳이었죠. 시간이 흘러 도시화가 일어나며 아파트와 도로가 생겨 산으로서의 모습을 잃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양도성의 역사적 상징성을 되살려 낙산 복원사업을 진행해 서울의 현대적인 건축물과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됐어요.
 
기사 이미지
박주신 역사통 기자단 3기 | "낙산 구간이 끝나는 부분의 도성 바깥에는 성곽 공사와 관련된 글이 새겨진 돌인 ‘각자성석’을 찾을 수 있어요. 태조·세종 때에는 담당 군현과 구간 이름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감독관·책임기술자의 이름, 날짜 등이 적혀 있죠. 각 구간의 담당자와 지역명을 공식적으로 새겨 놓음으로써 공사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한 ‘공사실명제’랍니다.”

 
기사 이미지
권시헌 역사통 기자단 3기 | “일제강점기와 전쟁, 도시화 등을 거치며 사라진 한양도성 성곽 터를 보고나니 500년 역사를 간직한 조선을 잃어버린 것처럼 안타까웠어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매개물이 없으면 옛것을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마도 일제는 그것을 노렸던 것 같아요. 서글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문화재와 옛 유적지를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겠어요.”

글=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 ang.co.kr, 동행취재=역사통 기자단 3기(서울 한산초),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중앙포토·문화재청·서울시 한양도성도감, 해설=권영철 한국문화유산 교육 강사, 진행=권소진 인턴기자,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인숙 팀장, 강철웅(한국전통문화대 4)·김지호(한국외대 2)·송윤아(한국외대 1)·이현정(한국외대 1)·이민희(인천교대 1) 대학생 멘토, 참고도서=『윤선비와 함께 한 발 한 발 돌아보는 한양도성』

역사통(通) 기자단의 생각이 커지는 워크북

‘생각이 커지는 워크북’은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가 취재하고 그 내용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코너입니다. 다양한 방식의 퀴즈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번 주는 성벽의 그림을 보고, 언제 쌓은 성벽의 모습인지 연결해 보는 퀴즈와 한양도성의 4대문의 이름과 유교의 네 가지 기본 덕목, 성문에 알맞은 설명을 찾아 보는 퀴즈입니다.
 
기사 이미지


미션! 한양도성을 지키는 8개의 성문에 대해 알아보자

한양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서울과 지방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동시에 유교 사상을 대표하는 인의예지를 이름에 넣어 조선왕조를 상징하죠. 하지만 거친 역사를 거치며 돈의문과 소의문은 사라지고, 6개의 문만 남아 있어요. 지난 8일, 한양도성 답사를 마친 서울 한산초 역사통 기자단 3기가 4대문과 4소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기사 이미지

1. 흥인지문(동대문) 한양의 정동쪽에 자리잡은 흥인지문은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불러. 흥인지문은 여러 번 보수 공사를 거친 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어. 1453년(단종 1)과 1869년(고종 6)에 크게 개축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흥인지문에서만 찾을 수 있는 반달 모양의 옹성도 고종6년에 다시 개축했어. 1963년 1월 21일 보물 1호로 지정된 우리나라 대표 문화재 중 하나야.

2. 돈의문(서대문) 돈의문은 4대문 중 가장 서글픈 역사를 가지고 있어. 태조(1396) 때 세워졌지만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위치라는 평가를 받아 태종(1413) 때 폐쇄됐지. 1915년에는 일제가 전차 선로를 복선화한다는 이유로 경매에 붙여 단돈 205원(쌀 17가마)에 땔감으로 팔리기도 했어.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서대문이라는 지하철 역과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만 남아있어 가슴 아픈 문이야.

3. 숭례문(남대문) 한양도성 성문 중 가장 규모가 큰 숭례문은 우리나라 국보 1호로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해 있어. 흥인지문·돈의문보다 늦은 1398년(태조 7)에 완공되었고, 세종·성종 때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었다고 추정돼. 2008년 2월 한 노인의 방화로 일어난 화재로 문루의 90% 가량이 훼손됐고, 2013년 복구됐지만 부실 논란을 겪었어. 우리는 숭례문 사건을 계기로 더 철저히 문화재를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됐지.

4. 숙정문(북대문) 한양도성의 중심 산인 백악산에 위치해 있는 숙정문은 1395년(선조 4)에 완공됐어. 하지만 다른 대문들과 달리 조선시대 유교 사상에 근거를 둔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에 따라 개폐가 결정됐어. 1413년(태종 13)에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최양선이 풍수지리상 숙정문을 폐쇄해야 한다고 왕에게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숙정문과 숙정문 서쪽 소문인 창의문을 폐쇄했어. 이후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굳게 닫혀 있어서 창의문을 북문이라 부르기도 했대.

5. 혜화문(홍화문) 흥인지문과 숙정문 사이에 있는 혜화문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어. 평소 숙정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주요 출입구 역할을 했지. 하지만 일제가 전차길을 내며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게 됐어. 1975년 시작된 한양도성 복원 사업으로 그 모습을 다시 갖추어 1992년 지금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어.

6. 소의문(소덕문) 소의문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위치해 있어. 일반적인 통행로 역할도 했지만 도성 안 시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도 했어. 1914년 일제의 도시 계획에 의해 소의문과 그 부근 성곽은 완전히 철거됐다고 해. 소의문은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 창건됐을 때는 소덕문이라고 불렀대. 이후 1738년(영조 14) 석문을 개축할 때 영조가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고, 1744년 소의문으로 고쳤다고 영조실록에 나와.

7. 광희문(시구문) 광희문은 시구문이라고도 불렀어. 왕이든 백성이든 생을 마감하면 반드시 도성 밖에 묻혀야 한다는 법칙 때문에 서소문과 함께 시신을 내보내 신당동·왕십리로 운반해 매장했기 때문이야. 흥인지문과 숭례문 사이에 위치해 있어. 광희문도 1975년 도성복원공사에 포함되어 다시 복원됐지.

8. 창의문(자하문) 숙정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는 창의문은 북한 양주로 향하는 교통로였어. 하지만 풍수지리설에 의해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게 됐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인 인조반정 때 인조를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반정에 성공했다는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해.

취재=권시헌·김하연·양서현·이경민·이채연·하태영 역사통 기자단 3기(서울 한산초), 정리=이민정 기자, 자료=문화유산국민신탁

▶소년중앙 페이스북
▶소년중앙 지면 보기
▶소년중앙 구독 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