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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이 아름답다 너희들처럼

[인터뷰] 흔들리며 피는 꽃이 아름답다 너희들처럼
'들꽃' 조수향·정하담·권은수


‘들꽃’(11월 5일 개봉, 박석영 감독)은 지독한 추위와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영화다. 하지만 보고 난 뒤엔 소녀들의 말간 얼굴이 촛불처럼 오랫동안 어른거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세상은 거리의 소녀들을 끊임없이 위협하지만 그럴수록 소녀들에게선 거친 생명력이 돋아난다. 아이들은 들꽃처럼 절로 살아 있다. ‘들꽃’의 주역 권은수(26)·조수향(24)·정하담(21)을 만나서 영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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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사는 가출 청소년들의 이야기’라는 짤막한 문구가 시작이었다. 세 배우는 이 한 줄에 이끌려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되도록 신중하고 오래 오디션을 볼 생각이었던 박석영 감독은 다섯 번째 지원자까지 보고 의외로 쉽게 세 배우를 추려냈다. 은수는 경험이 많은 배우인데도 때묻지 않은 날 것의 힘이 있었고, 수향은 감정의 폭이 넓고 연출가적인 감이 있는 배우였다. 하담은 영혼이 맑은 친구라 작게 움직여도 큰 울림을 만들 줄 알았다. 박 감독은 이들을 한 명 한 명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새로 썼다. 그리하여 ‘들꽃’은 배우와 역할의 경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 영화다. 배우의 이름을 역할에 그대로 쓰기도 했지만 “배우들 안에 내재된 것들을 부딪치게 해서 캐릭터를 찾아내려고 노력했기”(박석영 감독) 때문이다.

 촬영은 2014년 2월 한 달 동안 서울 아현동 철거촌 일대에서 했다. 배우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동묘 재래 시장에 가서 옷을 사는 것이었다. 박 감독은 1인당 10만원을 주고 영화 속 인물이 입고 나올 단 한 벌의 의상을 직접 사게 했다.

하담은 “귀마개가 달린 털모자와 성별이 느껴지지 않는 칙칙한 점퍼를 고르고 싶었다”고 했고, 가장 여성스러운 수향은 “손빨래를 하더라도 흰 바지를 골랐다”고 했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옷을 입고 배우들은 거리로 나왔다. 매섭게 춥고 긴 겨울이었다. 배우들에게 그 겨울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수향은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니 집단 최면에 걸렸던 것 같아요(웃음).”

“감독님이 역할처럼 살아줬으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다른 작품보다 그걸 받아들인 편이었어요. 지금은 약간 뿌연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이제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 뿌옇게 된 것 같아요.”(은수) “뭔가 씌였던 것 같아요. 그게 나인 줄 알고 살았으니까요. 신들린 애처럼 내가 미쳤었나 싶어요.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수향) “잘 기억이 안 나요. 그 순간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영화를 보고 뒤늦게 저렇게 연기했구나, 이런 영화구나 알게 됐어요.”(하담)

감독이 얼마나 밀어붙였기에 그렇게 몰입했냐고 묻자 수향은 “누구도 몰아붙이진 않았다. 그저 내 삶이 가혹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리허설을 했던 1월부터 두 달 동안 바퀴벌레가 나오는 여관방과 아현동 흙바닥에서 생활했다. 온몸에 핫팩을 두르고 추위를 견뎠지만 시린 마음까진 수습되지 않았다.

‘들꽃’은 거리에 사는 세 명의 10대 소녀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따라가는 작품이다. 따뜻한 여관방이 있다는 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소녀들은 성매매를 알선하는 남자에게 감금되고 만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세계의 위험 속에 있다. 왜 아이들은 거리에 사는가, 왜 아이들은 도움을 요청하거나 쉼터에 가지 않는가.

이런 질문에 스스로 어떻게 답을 구했느냐고 묻자 하담이 말했다.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왜 위험한 일이 닥쳤을 때 경찰을 부르지 않을까. 감금 상태에서 벗어나도 다시 아이들끼리 살잖아요. 너무 궁금해서 실제로 1388(청소년 상담 전화)에 전화를 걸어봤어요. 그때 느꼈어요. 오히려 보호 시설이 더 힘들고 답답할 수 있겠구나.”

하담의 말이 끝나자 은수가 거들었다. “영화에 멀쩡한 어른이 한 명도 안 나오잖아요. 사실 현실에서도 괜찮은 어른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거리에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을 거고, 이미 쉼터도 경험했겠죠. 결국 자기들끼리 지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는 거죠.”

 
시나리오는 시시각각 달라졌다. 원래 시나리오와 다른 감정으로 장면이 흘러가면 감독은 뒷이야기를 새로 썼다. 예컨대 지문에 ‘오열한다’고 나와도 배우가 그 상황에서 눈물이 날 것 같지 않다고 말하면 이야기를 바꾸는 식이었다. 자연스레 결말도 달라졌다. 박 감독은 “완벽하게 캐릭터를 짜고 촬영에 돌입한 게 아니라, 배우들과 처음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연기의 부정직함은 근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과 어느 때보다 끈끈하게 이어졌다. 세 사람은 “영화 속 인물이 자신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고, 역할과 자신을 혼동하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의 후반부에 수향이 하담을 내치는 장면을 찍던 중, 감정이 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은수가 당시 상황을 묘사하길 “시나리오에 없는 대사였는데 수향이가 갑자기 하담이에게 ‘세상에서 네가 제일 싫어!’라고 말하더라고요. 연기였는데 하담이가 정말로 상처를 받았어요.” 수향이 “감정을 타고 가다가 절로 그런 대사가 나왔어요”라고 말하자 하담이 덧붙였다. “원래 언니가 저를 아꼈기 때문에 억지로 떼어 놓으려고 독하게 말한 걸 알면서도 많이 속상했어요. 촬영 직후 저는 이쪽에서 울고, 수향 언니는 저쪽에 앉아서 울었어요. 한동안 정말 서먹했어요.” 본능과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촬영 현장이 은수는 “실험 카메라 같았다”고 했다.

박 감독은 마지막까지 드라마틱한 순간을 연출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삶에 개입하거나, 이해했다는 태도도 취하치 않는다. 아이들은 거리에 있고 계속 거리에서 살아갈 것이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세 사람이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짐이 되기도 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한 뼘씩 자랐다는 것이다.

은수는 홀로 남은, 가장 마지막 장면을 찍으면서 떠나버린 하담이의 털모자가 계속 생각났다고 했다. “카메라엔 잡히지 않았는데 한쪽에서 계속 눈물이 났어요. 하담이가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은 촛불 하나에 온기를 나누고, 눈발이 날리는 길을 함께 걸었다. 가로등 아래서 서로 가만히 껴안기도 했다. 그런 몇몇 순간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하담은 “수향 언니와 강아지풀을 가지고 놀다가 머리를 기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유일하게 따뜻했다. 돌이켜보면 눈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행복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촬영 후에도 ‘들꽃’의 여파는 이어졌다. “죄책감이 들었어요. 이렇게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게 사치스러운 느낌. 뭔가 그 전과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달까요.”(하담) “촬영이 끝나고 한참 뒤에 제 역할의 실존 인물이었던 친구의 근황을 들었어요. 기분이 이상하다가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때 죄책감이 든 것 같아요. 나는 이렇게 웃으면서 배우로서 꿈과 희망을 갖고 살고 있는데, 내가 못됐구나.”(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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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도 ‘들꽃’과 함께 자랐다. 세 사람에게 이 영화가 자신의 이력에서 어떤 분기점이 될 것 같냐고 묻자, 이들은 오래 고민하고 신중하게 답했다. 세 사람 중 제일 먼저 연기를 시작한 은수는 “권은수란 배우의 첫 장의 마무리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영화가 마냥 좋아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한 그는, 옴니버스 영화 ‘시선 1318’(2009, 김태용·이현승·전계수 감독)로 데뷔했다. ‘들꽃’은 그가 주연으로서 온전히 극을 이끈 첫 번째 장편영화다. 이 영화를 끝내고 극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은수는 “연기하지 않을 때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앞으로 2·3·4장을 잘 헤쳐나갈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수향은 “‘들꽃’은 내 젊은 시절의 모습과 영혼을 기록한 영화”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영화를 보는 게 힘들지만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서 은수, 하담과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수향은 안양 예고와 동국대 연극학부를 졸업했다. 꿈도 없고 자존감도 낮았던 어린 시절, 그는 연극 무대에 서고 나서 새로운 사람이 됐다고 했다. 신성한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고결한 존재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들꽃’ 이후 드라마 ‘후아유-학교 2015’(6월 종영, KBS2)를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수향은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끈질기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며 “나 자신에게 떳떳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연기 경력이 전무했던 하담에게 이 영화는 언니들과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서 연기를 했던 그는,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가 연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들꽃’에선 연기뿐만 아니라 각색에도 참여했다. 박 감독은 10대의 말투·생각·친구와 관계 맺는 방식 등을 가장 어린 하담에게 물었고, 하담은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만들었다. 하담과 박 감독의 인연은 차기작 ‘스틸 플라워’(2016년 개봉)까지 이어졌다. 하담은 “연기는 긍정의 기운이 많은 작업인 줄 알았는데, 조금은 내 삶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촬영하면서 받은 어떤 기억이나 충격이 마음에 남더라. 그럼에도 욕심이 나는 건 그것 자체가 훌륭한 예술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 배우에게선 이제 갓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사람 특유의 풋풋한 내음이 났다. 두려움과 설렘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들꽃’이 피었다.


"난 배우로서 꿈을 갖고 사는데 실존 인물의 근황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 조수향

"수향 언니와 강아지풀을 갖고 놀다가 머리를 기대는 장면이 유일하게 따뜻했던 장면이에요. " - 정하담

"현실에서도 괜찮은 어른을 만나기 힘들잖아요. 결국 믿을 건 자신밖에 없는 거죠." - 권은수


글=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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