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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총 맞은 창사 임정 청사 … 당시 한국어 라디오 방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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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염원 임정 대장정’ 참가자들이 지난달 28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다. 충칭은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곳이다. 참가자들이 사진을 찍은 이곳 청사 계단은 1945년 광복을 맞은 임시 정부 주요 인사들이 환국 전 기념사진(아래 사진)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청사 건물은 현재 기념관으로 운영 중이다. [사진 민주평통,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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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을 맞은 임시 정부 주요 인사들이 환국 전 기념사진. [사진 민주평통, 중앙포토]

중국 남부 광시(廣西)자치구의 류저우(柳州)는 한국인은 물론 어지간한 중국인에게도 생소한 지명이다. 한국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 교민은 5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곳만큼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도 드물다. 류저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38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주재했던 곳이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시 정부는 임정 요인들이 머물던 2층 건물을 복원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전시관’으로 꾸몄다. 관내엔 김구 선생의 흉상과 당시 임시정부의 활동을 설명해주는 사료·전시물이 가득하다. 임정은 류저우에 머문 반년 동안 좌우 합작에 성공하고 군사위원회를 설치해 광복군의 전신인 ‘광복진선 공작대’를 조직했다.

광복 70년 임정 흔적을 찾아 <상>
일제에 쫓겨 8개 도시 옮겨다녀
“상하이만 알지만 타지역서 더 활약”
류저우 머물 땐 광복군 전신 창설
충칭선 ‘정부’손색없는 조직 갖춰
“영화 ‘암살’에서 본 그대로였다”

 안타까운 건 개관 10여 년이 지나도록 이곳을 찾는 한국인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교통이 불편한 탓도 있지만 존재 자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근본 이유다. ‘광복 70주년 임정대장정’ 참가자 33명과 관계자들 모두 “이런 외진 곳에까지 임시정부가 와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현지 대학에서 어학연수 중인 김성연씨는 “세 차례 와 봤는데 한국인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전시관은 잘 꾸며놨지만 입구에서 현지인들이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때우는 장소로 쓰이고 있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현지 관광가이드는 “두 시간 거리의 유명 관광지 구이린(桂林)에 한국인 단체 여행객을 수없이 안내했지만 이곳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 이런 시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청소년·대학생 33명과 함께 임시정부가 옮겨 다녔던 중국 도시 8곳을 답사했다. 광저우(廣州)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크든 작든 임시정부 유적지를 복원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했다. ‘임시정부=상하이·충칭’ 정도만 알고 있는 이들에겐 의외의 사실이다. 임정 유적 기념관들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적 사실들을 손에 잡히듯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었다.

 “1938년 5월 김구 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생애 첫 번째 총탄을 맞았습니다.” 중국인 안내원 궁자(鞏佳·여)가 설명한 이곳이란 후난성 창사(長沙) 난무팅(楠木廳)에 있는 조선혁명당 옛 건물 회의실을 말한다. 창사 시는 민간인이 살던 이 건물을 매입해 문화재로 지정하고 2009년 임시정부 기념관을 열었다. 백범은 창사에서 처음으로 김구란 본명으로 활동하며 한국어 라디오 방송까지 개설했다. 궁은 “한국인 관람객들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해주면 대부분 처음 듣는 얘기라며 숙연해한다”고 말했다.

 “김구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주재하다 반대파에게 저격당한 겁니다. 처음 진단한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됐습니다. 김구 선생은 불편한 몸으로 일어나 다리를 절면서도 임시정부를 제 궤도에 올렸습니다. 그로부터 11년 뒤 김구 선생은 두 번째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로 서울 경교장에서입니다.”

 청사 원형을 살린 충칭(重慶)의 기념관에선 임시정부가 ‘정부’란 이름에 손색없는 조직을 갖추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행정부인 국무원과 입법부, 사법부, 외교부 등이 독립된 집무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장지훈(25)씨는 “비록 남의 나라 땅에 세운 임시정부였지만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고 별도의 집무실을 둔 점, 외교관 증명서를 발행하고 당당하게 외교활동에 임한 점 등을 처음 알게 됐다”며 “영화 ‘암살’에서 본 그대로였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는 헌법전문에도 나와 있듯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현행 헌법 1조도 실은 임시정부 헌장 1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다. 특히 임정 후반부에 대한 지식이 그렇다. 임정은 일본의 중국 침략 격화와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의 검거 선풍으로 중국 대륙 8개 도시를 옮겨 다니다 40년 충칭에 정착해 해방을 맞았다. 초창기를 제외하면 상하이 임정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활동이 미약했고 본격 활동은 상하이를 벗어나며 시작됐다. 한시준 전 단국대 교수는 “일제의 추격을 받는 고난 속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잃지 않고 임정을 지킨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위대한 역사지만 교과서 분량 제약 등의 이유로 자세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정유적지=예영준 특파원, 윤정민 기자
서울=신준봉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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