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이천수 “천재 아닌 악바리로 기억되고 싶다”

기사 이미지

‘풍운아’ 이천수가 축구선수 24년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톡톡 튀는 언행 때문에 축구계 대표적인 악동으로 불렸던 이천수는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은퇴의사를 밝혔다. 그는 “선수로선 1등을 못 했지만 축구 해설가로는 1등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양광삼 기자]

 
기사 이미지

2006년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 토고전에서 프리킥 동점골을 넣고 환호하는 이천수(오른쪽). [중앙포토]

‘풍운아’ 이천수(34·인천)가 축구화를 벗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지 24년 만이다. 이천수는 5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다. 발목 부상 탓에 지난 9월 12일 수원전 이후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던 이천수는 “스스로 아쉽지 않을 때 떠나고 싶었다. 그 시기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며 은퇴 배경을 설명했다. 이천수는 평범한 축구선수가 아니었다. 경기 전부터 주눅이 들었던 선배들과 달리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때로는 당당함이 지나칠 정도로 톡톡 튀는 선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4강 신화’의 주축 멤버였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조별리그 토고전에서는 그림 같은 프리킥 골로 온 국민을 들썩이게 했다. 그러나 튀는 언변과 행동으로 구설수에도 자주 올랐다.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을 돌이켜본 이천수는 “천재가 아닌 악바리처럼 뛴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현역 은퇴를 선언한 5일 그를 서울 상암동 JTBC 본사에서 만났다.

JTBC해설위원으로 제2인생
24년 축구인생 난 70점짜리 선수
타의로 유니폼 벗고 싶진 않아 결심
안정환·이영표 형과 이젠 라이벌
잘 준비해 해설자로는 1등 도전

 -갑작스런 은퇴 선언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함께 뛴 형들을 보면서 어떻게 은퇴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봤다. 타의에 의한 은퇴보다는 스스로 아쉽지 않을 때, 박수치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떠나고 싶었다. 은퇴에 대해 생각해본 건 올 시즌 전반기를 마치고 난 뒤였다. 구단에서는 ‘더 뛰라’고 했지만 욕심부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은퇴를 결정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들었나.

 “주변 동료들뿐 아니라 은사님들께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마 많은 스승님들이 화내실 것 같다(웃음). 부모님과 아내가 내게 힘이 됐다. 특히 아내는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 열심히 살자’고 얘기해줘서 큰힘을 얻었다. 딸 주은이 생각도 많이 했다. 작년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주은이가 나를 축구선수라고 알 때까지 뛰고 싶다’고 올린 적이 있는데 최근에서야 주은이가 내가 축구선수인 걸 안다. 앞으로 은퇴하고 나면 주은이 기저귀 값을 벌기 위해서 더 뛰어다녀야 한다.”

 키 1m74cm인 이천수는 체격이 작은 편이다.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과 근성으로 약점을 넘어섰다. 담력과 근성을 키우기 위해 야간에 집 근처 공동묘지를 오르내린 일화는 유명하다. 프리킥을 잘하고 싶어 훈련이 끝나면 혼자 운동장에 남아 데이비드 베컴(잉글랜드)의 킥을 따라하기도 했다.

 
기사 이미지
 -어린 시절은 어땠나.

 “키가 작다는 말이 가장 힘들었다. 그걸 넘어서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집에서 부평고까지 6㎞ 되는 거리를 매일 새벽 뛰어다녔다. 실력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작아서 안 된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고교 3학년 때였던 1999년, 모교(부평고)의 전국대회 3관왕을 이끌었던 이천수가 전국구 스타로 뜬 건 2000년 1월이었다. 일본에서 열린 19세 이하(U-19) 신년축구대회에서 파라과이·이탈리아를 상대로 화려한 발재간을 앞세워 2경기 연속 골을 뽑아냈다. 한국 대표팀의 우승을 이끈 것도 그였다. 한국 축구가 간절히 바랐던 기술과 스피드, 결정력을 갖춘 이천수의 등장에 ‘밀레니엄 특급’이라는 화려한 별명이 나왔다. 이천수는 “밀레니엄이란 말은 ‘2000년’과 내 이름의 ‘이천’이 맞물려 나온 수식어였다. 그래서 ‘밀레니엄(1000년) 특급’이라는 별칭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튄다”며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거스 히딩크(69) 감독 앞에서도 그는 주눅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실력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 멤버에 뽑혔다. 오른발잡이였지만 히딩크 감독이 자신을 왼쪽 공격수로 꾸준하게 기용하자 왼발잡이로 새롭게 태어난 결과였다. 생애 두 번째 월드컵이었던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선 이을용이 차려던 프리킥을 “내가 한번 차보겠다”며 나서서 보기좋게 골을 터뜨렸다. 스위스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0-2로 져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엔 그라운드에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02년의 영광도 컸지만 개인적으론 2006년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을 때였다. 월드컵에서 골을 넣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작아서 넌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던 아픔이 싹 없어지는 것 같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천수는 그라운드뿐 아니라 바깥에서도 언제나 거침없고 당당했다. 인터뷰 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상투적인 말보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혀 화제를 낳았다. 그러나 이천수의 거침없고 당당했던 성격은 독(毒)이 됐다. 상대 팀 서포터들에게 손가락 욕설을 날리기도 했고, 심판에게도 독설을 퍼부어 징계도 수차례 받았다. 스페인·네덜란드 등 해외 무대에 진출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2009년엔 전남에서 무단으로 이탈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일본 등을 전전하는 ‘저니맨’(journey man·자주 팀을 옮기는 선수) 신세로 전락했다. 오해도 많이 샀다.

 -축구 선수로서 스스로를 평가해서 점수를 매긴다면.

 “나는 운이 좋았던 선수다. 좋은 지도자와 감독님을 많이 만났다. 솔직히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한 것만은 분명하다. 점수를 매긴다면 70점 정도다.”

 이천수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인천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싶어했다. 임금 체불·감독 선임 난항 등으로 어수선했던 인천에서 맏형 역할을 자처했다. 김도훈(45) 인천 감독은 “그라운드에 뛰지 못해도 뒤에서 어린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천수가 고마웠다”고 말했다. 이천수는 스스로 주연 대신 조연을 택하며, 자신의 바람대로 고향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제 그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는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도자에 대한 욕심도 강하다. 내게 선수로서 마지막 기회를 준 인천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그는 JTBC 해설위원을 맡기로 했다.

 -TV해설을 하게 됐다.

 “축구 해설에 나서는 안정환·이영표 형 같은 선배들을 보면서 관심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구의 재미를 알려드리고 싶다. 정환이형, 영표형도 해설에선 라이벌이다. 나는 현역 때 1등 선수가 되지 못했다. 대신 항상 1등을 긴장시키려고 노력했다. 잘 준비해서 해설은 1등을 하고 싶다.”

글=김지한 기자 hanskim@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