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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1990)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인간은 날 때부터 ‘죽음과 동거’?좋은 시절은 영원할 수 없는 법



 



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거울 앞에 선 남자가 맘보 가락에 맞춰 춤을 춘다. 그의 이름은 아비(장궈룽·張國榮). 아비는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춤을 춘다. 거울을 보는 그의 도취된 모습은 자신을 끔찍하게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의 현신이다. 영화 ‘아비정전’은 이 장면 하나로 시대의 거울이 되었다.



영화는 아비를 비롯해 서로 엇갈리는 인물들을 따라간다. 아비는 축구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위·張曼玉)을 유혹한다. 그들이 이별을 맞이했을 때, 수리진은 두 사람이 함께 한 1분이 그토록 영원할 줄 몰랐다고 토로한다. 그녀는 아비의 집 앞을 서성인다. 루루(류자링·劉嘉玲) 또한 아비에게 목을 매는 여인 중 하나다. 그녀는 필리핀으로 떠난 아비를 쫓아가기로 결심하다. 아비는 자신을 길러준 양어머니가 떠난다는 사실에 화를 내며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비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다. 집에서 나오는 길에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비의 친구(장쉐여우·張學友)는 필리핀으로 떠나려는 루루를 위해 경비를 마련해준다. 아비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첫눈에 반해버린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2 거울을 보며 맘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아비.

3 아비를 잊지 못해 괴로워 하던 수리진은 우연히 만난 경찰관에게 위로를 받는다. [사진 마티]



상실한 것을 붙잡으려는 청춘의 몸짓‘아비정전’의 모든 인연은 거짓말처럼 엇갈린다. 그들은 현재보다는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고(어머니, 옛사랑, 흘러간 시간) 그것을 붙잡으려 애쓴다. 부질없는 노력,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절망이야말로 청춘의 모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흔히 청춘은 미래의 시간을 향해 열려 있다고는 하지만, ‘아비정전’은 ‘상실’한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몸짓이 청춘의 언어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한국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함께 다가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의 1분간을 기억하는 이 영화는 놀랍게도 1990년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자 우울한 날들을 나르시시즘의 몸짓으로 날갯짓하는 영화가 되었다. 그것은 심층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프로이트가 남긴 유명한 논문 중 하나인 ‘애도와 우울증’은 우울증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시도한 유명한 글이다. 애도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상실의 감정이라면, 우울증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할 뿐 아니라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불확실한 모호함으로 차 있는 상태다. “상실감에 대해서는 분명히 의식하면서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깊은 우울과 찬란한 순간의 교차점소위 멜랑콜리라고 불리는 우울증의 감성은 새로운 역사적 전망이 사라지는 시대를 대변하는 청춘의 표정이다. 그들은 배고픔 때문에 우울한 것이 아니라 풍요로움 속에 갈 길을 몰라 절망한다. 확고한 자기애가 있지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어머니, 지나간 사랑 그리고 청춘의 거울뿐이다.



그리하여 ‘중경삼림’(1994)에서는 “굳이 통조림의 유효기간을 적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해야지”라며 시간의 봉인을 상상하고, ‘화양연화’(2000)는 제목이 말하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끄집어낸다. 이들의 우울증은 봉인된 시간을 차 한 잔과 함께, 맥주 한 병과 함께 언제든지 끄집어낼 수 있는 합리화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이나 공간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기며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에 어디로 가든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하면서도 느끼한 대사 중 하나는 “발 없는 새” 타령일 것이다. 발 없는 새는 평생을 날다가 땅에 닿으면 죽을 수밖에 운명이다. 그러나 영화 막바지에 이르면 이 신화는 아비의 입을 통해 정정된다. “발 없는 새는 땅에 닿기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이는 나르시시즘의 캐릭터가 도달한 결론이다. 청춘의 모습에 취해 한 시절을 살았지만 끝내 늙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통찰력은 비극의 빛을 발한다. 중요한 것은 좋았던 그 시절의 향수가 아니라 좋은 시절은 영원할 수 없다는 자연의 진리인 것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사랑하는 이의 사랑 얻지 못하면?우리는 죽은 새와 뭐가 다를까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삶만을 바라는 듯한 아비는 어느 날 축구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을 유혹한다. 수리진은 아비와 헤어진 뒤에도 그를 잊지 못하지만, 아비는 새로운 여자 미미와 사랑을 시작한다. 하지만 미미의 헌신적이고 열렬한 사랑도 아비의 방황을 잠재우지 못하고, 양어머니로부터 친어머니가 필리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아비는 필리핀으로 떠난다.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사뿐히 몸을 일으켜 턴테이블에 LP를 한 장 얹는다. 맘보가 흘러나오자 하얀 속옷 차림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춤추기 시작한다. 보일 듯 말 듯 감춰진 미소, 잘 빗겨진 머리칼과 날렵한 뒷모습, 리드미컬하고 느릿한 스텝. 남자는 방 안을 이리저리, 쓸쓸하지만 충분하다는 듯 유유히 움직인다.



이 영화의 함정은 장궈룽·장만위·류자링·장쉐여우·류더화(劉德華)·량차오웨이(梁朝偉) 등 초절정 매력을 발산하는 스타들의 아우라에 있다. 왜냐하면 이 멋진 배우들로부터 빠져나와야 비로소 숨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춘의 사랑들 뒤편에 숨겨진 기묘한 애정아비의 어머니는 생모가 아니다. 어머니는 아비가 열여덟이 될 때까지 생모로부터 매달 양육비를 받아왔다. 아비는 어머니에게 따지듯 묻는다. 입양 사실을 왜 끝까지 숨기지 않았느냐고, 그걸 자신에게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던 어머니가 알고 보니 양육비 때문에 자신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과 보살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 되었으니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으리라는 불안. 이것이 아비의 내면 상태다.



아비의 불안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한 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어머니를 미워했다면,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 큰 상처가 되었겠나. 영화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아비의 말은 어머니를 송곳처럼 찌르고, 어머니는 아비를 다그치고 원망하지만, 그럼에도 생모의 주소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아비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모에게 보내기 싫은 것이다.



이 기묘한 모자 관계는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위태롭게 유지된다. 불안과 상실감을 해소하려 아비는 많은 여자를 만나지만 사랑에 관해서는 냉소적이다. 여자로부터 사랑을 얻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아비에게는 불안이 잦아든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트라우마가 열병처럼 도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아비는 그녀들에게 차가워진다. 미리 준비하는 이별. 그녀들에게 차가워져야 버려질 때 덜 아플 테니까.



 



버려지거나 버리거나, 모두 사랑의 강박스피노자는 ‘소심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에티카』를 보면 “소심함(timor)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라는 정의가 등장한다. 그의 정의가 맞다면, 아비는 극도로 소심한 남자였다. 아비가 가장 두려워한 큰 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작은 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버리는 것’이었다.



라캉이라면 아비의 이런 불행한 상태를 강박증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강박증은 타인의 욕망을 부정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견지하려는 증상이다. 라캉은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는 양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강박증 환자일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그러니 단순히 ‘남성적인 것’을 ‘강박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강박적인 사람, 즉 대부분의 남자는 사랑도 먼저 시작하고 당연히 이별도 먼저 하려고 한다. 결국 강박적인 남자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태는 자신이 욕망하는 여자, 즉 사랑하는 여자가 그녀만의 욕망을 피력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경우라면, 여자로부터 먼저 버려지는 상황 같은.



‘아비정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어머니가 마침내 아비에게 생모의 주소를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이제 강박은 좌절로, 허무로 치닫게 된다. 기실, 생모를 찾아간 아비의 필리핀 여행은 마지막 이별 여행이었다. 그러니 생모를 만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가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은 생모가 아니라 자신을 기른 어머니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총에 맞은 그는 세상을 떠나며 초반부 자신의 내레이션을 담담히 수정한다.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던. 하지만 그 새는 그 어느 곳도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새는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다리 없는 새, 아니 이미 죽은 새라는 것. 왕자웨이 감독이 우리에게 건네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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