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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어떤 식으로든 시대와 사회에 발언해야”

김광보

김영민



좋은 연출가는 많다. 하지만 스크린도 아닌 무대에서 순수 연극을 하면서 그 이름만으로 전석을 매진시키는 연출가는 흔치 않다. 매년 7~8개의 작품을 올리면서도 대한민국연극대상, 동아연극상 등 굵직한 연극상을 놓치지 않는 ‘믿고 보는 연출’(51)가 또다시 대형 신작을 내놨다. 이석준, 이승주 등 ‘김광보 사단’이 총출동하는 LG아트센터 기획 연극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11월 5~18일)다. 지금 한국사회에 들끓고 있는 ‘편가르기’ 현상을 정면으로 다뤘다. 8명의 내로라할 중견 남자배우들이 벌이는 패싸움은 얼마나 뜨겁고 스펙터클할까. 핵심을 찌르는 미니멀리스트가 들춰낸 저 패싸움의 속내는 찌질하기 그지없다. 우리 모두의 ‘찌질함’을 거울처럼 보여줄 배우(44)과 김 연출을 함께 만났다.



연극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연출 김광보와 배우 김영민

 



지난달 21일 늦은 오후. 종로의 한 작은 연극연습실은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바글해 왠지 주눅이 들었다. 여덟 남자가 교도소에서 편 갈라 싸우는 이야기인지라 여배우 하나 없는 살벌한(?) 연극인 것이다. 대충 트레이닝복을 걸친 남자들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오직 인터뷰를 위해 곱게 차려입은의 환한 미소만이 기자를 반겨줬다.



“많이 칙칙하죠. 오늘은 급기야 여자들만 나오는 공연팀과 조인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까지 나왔어요. 하하. 소극장도 아니고 대극장에 남자들만 나와 지지고 볶는 연극은 처음이거든요. 연출님 작품을 전부터 다 같이 했던 사람들이라 분위기는 좋아요. 너무 친해서 탈이죠. 사소한 디테일에도 빵 터져 버리니…그만큼 즐겁게 만들고 있어요.”(김영민, 이하 ‘영’)



연극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는 일본 작가 츠치다 히데오의 2012년작이다. 잡범들을 수용하는 교도소에서 장난삼아 그은 국경선 하나로 인해 변해가는 인간 본성을 신랄하게 그린 블랙코미디다. 몇 년 전 우연히 일본에서 원작을 관람한 김 연출은 ‘대사를 전혀 못 알아듣는데도 재미있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일단 번역부터 하고 보니 심지어 지금 우리 사회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원작은 소극장용인데 1000석 대극장에 가져오게 돼서 배우들이 두세 배로 힘들 겁니다.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특별한 무대장치도 없어요. 모두가 주연이자 조연인 8명 배우가 오직 자신들의 열기로 무대를 다 채워야 하죠.”(김광보, 이하 ‘광’)



재미와 의미 다 잡는 블랙코미디작품은 ‘꾸리아’와 ‘동꾸리아’, ‘고아’와 ‘고주’ 등 가상의 지명과 ‘양갑 성’ ‘장창 우’ ‘이구 허’ 등의 엉뚱한 인명, ‘닭도리탕’ 등 기표와 기의가 다른 말장난이 빚어내는 웃음이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독특한 코미디다. 만담 문화가 발달한 일본 특유의 웃음코드를 우리 입맛에 맞게 살려내야 하는 만큼 미세한 템포와 타이밍을 조절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사실 위험한 작품이에요. 자칫 아무것도 아닌 코미디가 될 수 있거든요. 그냥 코미디가 아니라 블랙코미디어야 하고, 그걸 제대로 하려면 캐릭터의 서브텍스트가 분명해야 하죠.”(광)



“진정성도 있으면서 재미있는 작품이 돼야 하기 때문에 배우들이 줄타기를 해야 되요.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다 날아가 버리는 미묘한 호흡을 사수해야 하죠. 연출님이 배우들 정신 바짝 차리게 집요하게 잡아주고 계세요.”(영)



김영민이 맡은 배역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브텍스트를 가진 ‘수철 용’. 교도소에 가장 늦게 합류한 ‘어리바리 신참’이지만 편이 갈리자 깐죽대며 싸움을 붙이는 얄미운 캐릭터다.



“초등학교 때 금 넘어오지 말라며 싸우잖아요. 그 모습을 어른들에게서 보는 거죠. 대놓고 싸우진 않아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삐진다든가, 치졸한 이기심은 다들 있잖아요. 그런 찌질한 역할이에요.”(영)



잘 생긴 정극배우로서 이런 역이 불만스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그는 밉살맞고 찌질한 캐릭터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했다. 배우가 가진 ‘천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로에서 나름 ‘니마이’(잘생긴 주인공 얼굴을 칭하는 일본식 속어)로 통하는데 5년 전 ‘내 심장을 쏴라’ 때 연출님이 처음 이런 찌질한 역을 주셨어요. 그게 제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모멘텀이 됐죠. 배우로서 제 안의 또 다른 호흡을 찾을 수 있었거든요.”(영)



“잘생긴 사람을 뭉개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럴까요(웃음). 영민씨는 늘 핸섬한 주인공만 하는 사람인데, 옆에서 지켜보니까 의외로 장난스럽고 재미진 행동을 많이 하더군요. 특히 담배피울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민씨 특유의 모습이 있는데, 거기서 잠재된 찌질함을 발견한 거죠.”(광)



인간 내면의 비루한 본성과 욕망들이 부딪치면서 전개되는 작품인 만큼, 모든 캐릭터가 공유하는 서브텍스트가 바로 ‘찌질함’이다. 김 연출의 전작인 ‘M. 버터플라이’에서과 함께 트리플 캐스팅으로 르네 역을 했던 대표적인 ‘미남 배우’ 이석준, 이승주도 피해갈 수 없다.



“승주씨가 이번에 최고로 찌질합니다. 제가 잘생긴 배우 찌질하게 만드는데 선수거든요. ‘의외성’이라고 하죠. 잘생긴 사람이 찌질한 게 훨씬 더 재밌잖아요. 사실 그게 본모습을 보고 캐스팅하는 겁니다. 석준씨는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우기지만.(웃음)”(광)



재미를 위해 ‘찌질함’을 추구할지언정 그의 연극의 본질은 늘 송곳처럼 날카롭다. 집단 따돌림 문제를 다룬 ‘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2012), 로마 공화정의 비극을 정치깡패들의 코미디로 그린 ‘줄리어스 시저’(2014),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2014)와 ‘사회의 기둥들’(2014), 묻지마 범죄자를 키우는 사회부조리를 고발한 ‘나는 형제다’(2015) 등 고전과 현대극, 번안과 창작극을 막론하고 현실 문제를 가장 시의적절하게 반영하는 게 그의 무대다.



“사명감은 아니지만 연극은 어떤 식으로든 발언을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동시대성이 있는 작품을 하죠. 큰 사회나 국가를 얘기할 수도 있고 한 개인의 심리를 다루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작품이 연출하는 맛을 느끼게 해주고 고민스럽게 고통을 주기도 하니까. 코미디라도 그 밑에 숨은 뼈대가 있어서 실컷 웃고 돌아설 때 한번쯤 생각하게 만들려는 거죠.”(광)



“잘 생긴 배우 뭉개는 연출에 일가견” 두 사람의 인연은 2005년 연극 ‘에쿠우스’에서 시작됐다. 대학로에서 ‘꽃미남 배우’로 통하던을 모든 남자배우들의 ‘워너비’ 배역인 알런에 가장 잘 어울리게 갈고 닦은 게 연출이다.



“제가 열일곱 알런을 서른다섯에 했어요. 어려 보이는 외모 덕에 복 받은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오히려 연출님은 꽃미남은 한방에 갈 수 있다며 저를 집요하게 다그치셨어요.”(영)



김 연출은 당시 ‘영민씨에게 맞을 뻔 했다’고 회고했다. 너무 괴롭혀서 원한을 샀다는 것이다. “제가 좀 집요하거든요.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심성을 막 긁어내니까 배우로서는 자존심이 상하죠. 어릴 때는 그런 짓을 많이 했어요. 치기 어린 행동이었죠.(웃음)”(광)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날카로운가 싶었어요. 대사 한 마디로 하루종일 배우를 괴롭히니?. 지금은 안 그러세요. 지금 연출님과 처음 만나는 배우들한테는 운 좋은 줄 알라고 하죠. 대신 요즘은 한마디 던지시는 게 더 무서워요. 그 예민함이 어디 가진 않았겠지 싶어서 스스로 긴장하고 있죠.(웃음)”(영)



김영민은 올해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아 주목받은 영화배우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뿜어내는 강한 존재감과는 달리 ‘인간’은 40대 중반으로 보이지 않는 동안 외모에 착한 미소가 시종일관 떠나지 않는 부드러운 남자였다.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살았느냐가 작품에 드러나는 거겠죠. 영민씨는 늘 하나의 작품을 책임져 왔어요. 겹치기를 안 하니 작품 수가 많지 않은데,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치열해서 그래요. 이 나이 되도록 연습실에 제일 먼저 나오고, 쉬는 날까지 나와서 연습을 합니다. 그게 바로 ‘배우’의 모습인 거에요. 이젠 제가 지켜만 봐도 될 정도죠.”(광)



올해 ‘내 이름은 강’을 시작으로 ‘M.버터플라이’ ‘프로즌’ 등 연극은 물론, 대형 뮤지컬 ‘신과 함께’ 초연에 서울시극단장 취임까지 쉼없이 달려온 김 연출은 “실은 좀 지쳐있는 상태”라고 털어놨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서울시극단에 전념할 계획이라니, 지금처럼 다양한 프로덕션을 통한 그의 폭넓은 활동은 당분간 만나기 힘들 전망이다.



“제 작품이 실험적이거나 신선한 연출이라서 좋아하시는 건 아닐 겁니다. 저는 정통파 연출이고, 완성도로 승부해 왔죠. 장인정신으로 한다고나 할까요. 올해도 한 작품 한 작품 전력투구하면서 한 해의 끝에 오니 힘이 좀 부치네요. 그 에너지를 배우들이 다 채워주고 있어 다행입니다. 연극은 결국 배우의 예술이니까요.”(광)



작품은 죄수와 간수들의 흉기까지 동원한 한바탕 소란 끝에 열린 결말로 끝난다. ‘국경선’이 지워지고 나면, 저들은 과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마지막 대사를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내 속에 편을 가르는 선이 있었다’는 자기 고백인데, ‘혹시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내 맘속에도 선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으면 합니다.”(광)



“재밌고 엉뚱한 장면이 많아서 즐겁게 보실 수 있지만 그 이면에 나와 우리의 모습까지 비춰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소름끼치는 서늘함까지 느끼실 수 있도록 열심히 작업중입니다.”(영)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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