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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부산(釜山)이야기

 ‘동래의 부산’에서 ‘부산의 동래’
요즈음 뜨고 있다는 부산을 최근에 다녀왔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많이 운사람 일수록 부산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부산을 배경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국제시장’ 이외에도 ‘변호인’ ‘해운대’ 등이 있다. 얼마 전 해운대에 짓는 고층 아파트의 분양가가 국내 최고가라 하여 다시 한 번 부산이 뉴스에 올랐다.

[백가쟁명:유주열]부산(釜山)이야기


옛날에는 부산하면 동래(東萊)를 생각하였다. 지금은 동래가 ‘부산의 동래’이지만 과거에는 부산이 ‘동래의 부산’이었다. 부산보다 동래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부산 전체가 동래였는데 지금은 다 내 놓고 작은 구(區)로 남았다. 부산의 서면(西面)도 본래 동래군 산하 서면이었다.
동래에 사는 사람들은 ‘동래’ 발음이 잘 안되어서인지 ‘동네’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동래 출신의 지인이 들려 준 ‘설렁개그’ 같은 경험담 이야기가 기억난다. 서울에 가서 ‘부산 동래’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면 ‘부산 동네? 어느 동네?‘ 하고 되묻는다고 한다. 부산의 동래를 ’동래‘라고 발음해도 ’동네‘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서복(徐福)이 다녀 간 영도 봉래산
그런데 그 동래(東萊)의 뜻이 봉래산(蓬萊山)의 동쪽이란 의미라고 한다. 봉래산이라면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서복(徐福)을 보냈다는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생각하지만 진짜 봉래산은 부산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부산 지도를 놓고 봉래산을 찾았더니 영도(影島)의 최고봉이 봉래산이다.

지리적으로 영도 봉래산의 동쪽 방향에 동래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서복을 연구하는 학자에 의하면 서복의 일행이 우리 남해안의 남해도 거제도와 부산 영도를 거쳐 경주와 울산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바다에서 바라 본 영도의 산을 신선이 사는 봉래산으로 이름 지었는지 모른다.

영도는 절영도(絶影島)를 줄여 부른다는데 절영도는 그림자가 없는 섬이란 뜻이다. 옛날 삼국시대에 이 섬에서 준마(駿馬)를 방목했는데 너무 빨라 그림자를 남기지 않았다하여 절영도로 불렀다는 설과 고려시대 공도(空島)정책으로 사람의 그림자(人影)을 남기지 않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진성여왕이 즐겨 찾은 해운대 온천
부산 지역은 고대 신라와 가야국의 세력이 충돌하는 곳으로 두 나라의 전장 터였다고 한다. 신라가 가야국을 합병하고서는 신라의 왕과 귀족이 이곳에 자주 왔던 것 같다. 태종대는 신라의 태종 무열왕의 고사가 있는 곳이다.

부산 해운대는 조선 8경의 하나로 알려진 경승지이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동백섬에 다녀가면서 바위에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을 새겨 해운대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해운대 일대는 온천이 유명하여 신라의 진성여왕이 온천치료(湯治)를 위해 수차 다녀 간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알려진 해운대 온천이 부산이 개항되면서 일본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부산(해운대 동래)이 온천도시로 관광 휴양객을 끌어 왔다.
 
부산(富山)과 부산(釜山)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자 부산은 한반도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게 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왜구의 침공으로 한반도 남해안이 해방(海防)의 기지가 되었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왜구를 회유하기 위해 경상도 해안의 부산포(富山浦) 제포(창원) 염포(울산) 등 삼포에 일본인의 거주를 허가하였다. 그 후 삼포(三浦)에서 반란이 일어 나 일본인이 삼포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부산포는 지금의 부산(釜山)과는 한자의 표기가 다르다. 고려시대 이래 이곳의 어촌을 부산포(富山浦)로 불렀다. 일본의 동해안 쪽에 도야마(富山)현이 있다. 부산(富山)은 산이 많다는 의미가 있다.

부산의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솥(釜)처럼 생겼다 하여 부산(釜山)으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동구 좌천동의 증산(甑山 시루산)이 떡시루 즉 가마솥(釜)과 닮았다고 부산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1470년 성종실록에서 처음으로 부산(釜山)이란 표기가 나타난다.
 
부산에서 한일외교의 길을 묻다
부산이 일본과 가깝다는 것이 부산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 사람들의 부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았다. 부산의 고급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든가 기네스북에 오른 센텀시티의 세계 최대의 백화점의 손님으로 일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실 해운대에서 대마도까지 50km 밖에 안 되어 일 년에 60일은 대마도(쓰시마)가 육안에 보이고 후쿠오카와 시모노세키도 200km 밖에 안 된다고 한다.

부산과 후쿠오카는 같은 경제권으로 그쪽 사람들이 쇼핑하러 오사카나 도쿄에 안가고 부산으로 온다고 한다. 부산은 세계의 주요 도시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주요 도시와도 자매관계를 맺고 도시외교에도 활발히 하고 있다. 부산 시와 일본 후쿠오카 시의 민간단체가 2006년부터 ‘부산-후쿠오카 포럼’을 만들어 놓고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에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에 있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 개최의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신조 총리 취임 후 처음 갖는 정상회담이 된다.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끝나가는 2개월을 남기고 겨우 만들어진 정상회담이다. 4년 가까이 경색된 한일외교가 정상회담 한번으로 해결될 리 없다. 일본과 교류가 많은 부산에서 보면 서울의 한일외교가 답답하게 느껴질 것 같다.

지난 10월 24일에는 부산과 대마도에서 동시에 한일 국교 50주년 기념하는 불꽃 축제를 하였다. 한일관계가 불꽃처럼 시원하게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 같다. 부산 사람들이 바라는 한일외교는 화해와 협력의 외교 그리고 도시 외교의 활성화로 보인다. 부산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마중물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의 첫 피해지
과거에는 부산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독(毒)이 되었다. 임진왜란 대에는 부산이 1차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592년 4월12일(음력) 대마도를 출발한 일본의 침략 제 일진은 4월13일 영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병선 700척에 1만8700명의 군인이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일본의 대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청야(淸野)작전으로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고 병선을 가라앉히고 도망을 쳤다. 당시 경상 우수사 원균도 상황이 급박하여 병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4월13일 고시니 군은 짙은 안개를 틈타 부산진에 상륙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남문은 바로 바다에 닿을 정도로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부산진성의 정발은 죽기로 싸워 전사하고 일본군은 배후를 우려하여 다대포진도 함락시켰다. 다음 목적지는 동래성이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경상 좌도의 총책임자이다. 고니시는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동래성을 교두보로 삼아야 했다.
 
‘싸우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동래성을 5중으로 포위한 고니시 군은 동래성을 향하여 목찰(木札)을 던졌다. 목찰에는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가 쓰여 있었다. 송상현은 즉시 그 목찰에 다음의 글귀를 써서 고니시 군에게 다시 집어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

송상현은 박홍 원균 등 무신이 도망가는 가운데 문신으로 죽음을 두려워 않고 조복을 입은 채 진두지휘로 끝까지 싸워 장열한 전사를 하였다. 송상현 부사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연로한 아버지를 두고 먼저 가는 불효를 용서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무너지니 일본의 10만 대군이 부산을 통해 속속 상륙하였지만 수군으로 막을 수 없었다. 당시 한반도의 남해안을 지키는 4명의 수사(水師)가 있었다. 서울에서 보면 가장 왼쪽의 수사가 경상좌수사(박홍 59세) 본영은 동래(지금의 수영)다. 경상좌수사는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까지 관할한다. 낙동강 서쪽에서 섬진강 동쪽까지는 거제도에 본영을 둔 경상우수사는 원균(53세)이 맡고 있었다. 섬진강 서쪽부터 장흥군의 홍거천(洪巨川)까지 여수에 본영을 둔 이순신(48세)의 전라좌수사가 있다. 홍거천 서쪽의 전라우수사는 이억기(32세)가 해남 본영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임진년 4월 이순신 장군이 경상좌수사였다면
선조의 인사정책이 임진왜란을 가져왔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본군의 주공격선인 경상도 좌우 수사에 나이가 많고 무능한 수사가 배치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순신이 경상좌수사 박홍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이순신이 잘 싸워 일본군이 상륙을 포기하고 물러갔을까. 오히려 기습공격을 받은 이순신은 부산진성의 정발 장군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전사했을 것이다. 그 후 이순신이 없는 남해안은 일본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조선왕조는 명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망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나가사키 데지마와 부산의 초량왜관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일본의 신정부는 화해정책을 편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에도(江戶) 신정부 치하의 260년간 조일 두 나라는 조선통신사 교류를 통하여 성신(誠信)의 길을 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대마도 번주의 노력이 컸다.

일본과 조선의 화해를 위해 대마도 번주(藩主)는 동래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포에 조정의 허가를 얻어 지금 용두산 공원 주변 (초량)에 왜관(무역관)을 설치했다. 초량왜관은 10만평 규모로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의 화란 무역관의 4000평에 비하면 25배의 크기이다.

일본은 화란과는 데지마를 통해 통상(通商)을, 조선과는 대마도와 초량왜관을 통해 통신(通信)하였다고 한다. 초량왜관은 거주 일본인 400-500명으로 일본 마을의 축소판인 ‘리틀 재팬’이었다. 교역장 재판청 신사(神社) 등을 갖추어 있고 동의보감으로 유명해진 조선의 의학을 배우고자 일본 전역의 의사들이 찾아 왔다. 초량왜관은 일본이 가진 유일한 해외공관이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대일 외교의 원점이었다.
 
부산에서 만난 아메노모리 호슈와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의 대 조선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초량왜관에 체류하면서 조선어 독본을 저술하여 조선 외교에 종사할 후진을 양성하였다. 왜관이 다시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명치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정책 이후였다. 대마도 번주가 없어지고 현이 되자 명치정부의 외무성은 대마도 번주가 관리하던 초량왜관을 접수하여 주 조선 외교공관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1872년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후에 일본의 초대공사)가 부산에서 이러한 작업을 지휘하였다.

당시 실력자 대원군은 초량왜관의 소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주장하고 일본 외무성 직원의 퇴거를 명령하였다. 한때 일본과 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 수 있는 급박한 상황으로 발전되어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75년 조일 수호조규에 의해 일본의 외교사절이 서울에 주재하게 되자 초량왜관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간 조일 간 교역의 중심이 되어왔던 초량왜관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과 부산
일본으로서는 지근거리의 부산에 대한 매력을 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얻어 1905년 1월1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을 개통시킨다.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다.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폐해를 회복하지 못한 조선은 가해자 일본에 의해 다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일본은 부산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다. 1925년4월1일 경상남도의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부산은 대륙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대륙으로 가는 양방향 출입구(gateway)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국 전쟁 기간(1950-53)에는 임시수도의 기능을 했다. 1990년대 북방정책으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관심은 부산을 일시적으로 침체시켰다. 더구나 부산의 중심 산업인 조선 신발 등 은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부산의 루네상스
다시 부산의 루네상스가 왔다. 해운대의 개발과 함께 해운대 땅 값이 오르고 있다고 한다. 해운대에 가면 옛날 학창 시절에 들은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는 시골 부모님에게 부산에서 사립대학을 다닌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매년 등록금과 하숙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에는 다니지 않고 일용근로자 생활로 숙식을 해결하고 시골에서 부쳐준 목돈으로 해운대 인근의 땅(논밭)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 선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금쯤 큰 땅 부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수년 후에는 해운대 센텀(Centum 라틴어의 100의 의미로 100% 완벽을 기한다는 뜻과 100년을 내다본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시티의 월드 비즈니스 타워(107층), 과거 극동호텔 자리에 건설되는 엘시티 타워(108층)와 87층 주거용 건물 2동, 그리고 부산시청이 있던 곳에 건설되는 부산 롯데타운 타워(108층)등 부산의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된다.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고층 건물은 마치 바다 건너 일본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 하는 것 같다. 부산은 동북아시아의 중심 도시로 거듭나면서 400만 전후 부산 인구가 다시 탄력을 받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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