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단테와의 텔레파시

나는 단테의 『신곡』을 읽고 있다.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에 대한 정의 14가지 중 하나는 고전이란, 사람들이 “나는 그 책을 다시 읽고 있어” 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그 책을 읽고 있어” 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단테의 『신곡』은 그야말로 고전이다. 나는 단테의 『신곡』을 다시 읽고 있다.



독서는 하나의 텔레파시다. 700년 전 이탈리아의 한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한 것을 2015년 한국의 한 인간이 자신의 집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한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 온전한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신기하고 경이롭다. 가끔 나는 운율과 라임을 맞추기 위해 같은 뜻을 가진 낱말들 가운데 어떤 단어를 고를지 고민하는 단테의 표정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는 발견하는 일이다. 이번에 『신곡』을 읽다가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열린책들 세계문학’에서 2009년에 발간한 번역본이다. 연옥편 제12곡 88행부터 99행까지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창조물이,마치 새벽 별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얼굴로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더니두 팔을 벌리고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이리 오너라. 이 근처에 층계가 있다.이제는 손쉽게 올라갈 수 있으리라.”이런 초대를 받고 오는 자는 드무니, 오, 위로 날기 위해 태어난 인간들이여,왜 그렇게 약한 바람에도 떨어지는가?천사는 우리를 암벽이 갈라진 곳으로 인도하여 거기에서 날개로 내 이마를 쳤고 나에게 안전한 길을 약속하였다.



번역본에는 천사의 말이 두 행, 그러니까 “이리 오너라. 이 근처에 층계가 있다. / 이제는 손쉽게 올라갈 수 있으리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뒤의 세 행 역시 천사의 말이어야 문맥상으로 자연스럽다. 아마 어떤 실수나 착오로 그 문장은 천사의 말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닐까?



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장서에 비해 집이 좁은 편이라 책을 나누어 보관한다. 대부분의 책은 작은방에 있고 안방과 거실에는 일부가 있다. 나는 거실 책장에서 등짝이 근사한 장식용 영문판을 꺼내어본다. 그것은 브리태니커에서 나온 그레이트북스 중 한 권이다. 거기에는 내 추측대로 뒤의 세 행도 천사의 말에 들어가 있다. 역시 그렇지. 나는 내 발견을 아내에게 떠벌렸다. 얼굴 가득 교만한 웃음을 지으며.



아내는 안방으로 가더니 책을 한 권 꺼내왔다. 그것은 ‘동화출판공사’에서 1970년 초판 인쇄한 컬러판 세계의 문학대전집 중 한 권이었다. 세로쓰기로 되어 있어 요즘엔 읽지 않는 책인데 그곳에도 천사의 말은 열린책들 판과 같이 두 행만 큰따옴표 속에 들어있었다. 아내는 “이번 번역에 사용한 원본은 바오로 출판사의 1965년 판과 누오바 이탈리아 출판사의 1968년 판을 취하였다”고 적혀 있는 서지정보를 읽어준다. 나는 김이 살짝 샌다.



아내는 작은방에 있는 민음사 번역본도 확인해 본다. 역시 천사의 말은 두 행으로만 되어 있다. 그 책은 번역과 주해를 위해 이탈리어 판으로 움베르토 보스코와 조반니 레조가 주해를 단 판본과 주세페 반델리가 주해를 단 판본을 참고했다고 한다. 나는 아내에게 투덜댄다. 그래도 브리태니커가 틀릴 수는 없잖아.



아내가 베아트리체처럼 웃는다. 이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단테가 직접 쓴 원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쇄된 판본이 나오기 전인 14세기, 15세기에 이미 수많은 필사본이 있었다잖아.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해도 800종이 넘는다면서요. 무려 800종이.



인터넷에서 영문본과 이탈리아어본도 확인했지만 아내의 말처럼 여러 판본이 있었다. 뒤의 세 행이 천사의 말에 포함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그러나 『신곡』 연옥편 제12곡에 교만으로 인한 벌을 받는 자들이 나오는 내용은 모든 판본이 같았다. 그렇게 그 구절은 내게로 왔다. 마치 천사가 교만한 내게 주는 말처럼.

“이런 초대를 받고 오는 자는 드무니, 오, 위로 날기 위해 태어난 인간들이여, 왜 그렇게 약한 바람에도 떨어지는가?”



아내는 가을 볕이 좋으니 책은 덮고 이불을 널자고 한다. 마치 천사가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리며.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