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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 최후의 격돌 … YS “김대중과 손 떼고 나와 내각제 하자” … DJ 청구동 집 바닥에 앉아 “도와주십시오” JP “한 풀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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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19일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오른쪽)와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양당 합동 송년회에서 함께 ‘고향의 봄’을 부르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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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선의 해가 밝았다. 대한민국의 20세기를 매듭짓고 21세기를 열어나갈 대통령을 선출하는 시기다. 언론이 신3김시대라고 부른 90년대 정치는 나와 김영삼·김대중의 역정과 신념이 흩어져 부딪히고 새로 조합돼 재구성하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97년 1월 4일 신년회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대선은 마지막 3김씨의 싸움이다. 제3의 후보가 나오긴 힘들 것이다. 3김의 싸움은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고 현실이며 순서다.” 3김 최후의 격돌을 예고했다고 할까. YS는 자신이 출마할 수 없지만 평생 경쟁자인 DJ의 집권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후계구도를 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DJ는 오매불망(寤寐不忘) 대통령을 향한 도정(道程)에 나를 끌어들여 반드시 당선하겠다는 집념으로 넘쳐났다.

 나는 나라의 전환기적 도약과 정치발전을 위해 내각책임제를 대선 정국의 핵심카드로 던졌다. 내가 대통령이 돼 직접 내각제를 구현하든지 아니면 내각제를 받아들일 정당과 힘을 합쳐 대선후보를 단일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열기와 대립 속에서 3김씨와 관계없는 제3의 후보는 사실상 등장하기 어렵다. 이회창·이인제 후보는 나중에 변색(變色)되긴 했으나 처음부터 YS가 직접 키우고 길렀던 후계자들이었다. 구태정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시대 흐름은 거쳐야 하는 과정과 단계를 거쳐야 하는 법이다.

 97년 대선 무대의 반은 나와 김대중, 즉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공조로 굴러갔다. 그전 96년 11월 1일 김대중·김용환 간에 서울 목동 비밀회동이 있었다. 요지는 DJ가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면 양당은 단일후보를 낸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원칙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약속했다. 다만 그 약속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DJ는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야당의 길을 걸었지만 이념과 이력에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판·이미지가 쌓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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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대선 다음 날인 1997년 12월 19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운데)가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왼쪽에서 둘째)와 함께 중앙선관위가 전달한 대통령 당선증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왼쪽부터 JP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 JP, DJ, 이희호 여사, 박태준 자민련 총재. [중앙포토]

 우리 당의 김용환 사무총장은 일처리가 딱 부러지고 야무진 사람이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풍산개 같다고 스스로 표현한 적이 있다. 김 총장은 목동 회동 때 “총재님(DJ)은 거짓말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맞습니까”라고 대놓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DJ는 “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 약속을 못 지킨 적은 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약속은 깨도 거짓말은 안 한다’는 말이 기묘하고 우스웠다. 그렇다 해도 김용환의 당돌한 질문에 거짓말을 안 하고 논리적으로 진정(眞情)을 전하려는 DJ의 성의가 느껴졌다. 자민련과 국민회의는 내각제 개헌을 보장하는 장치와 후보를 단일화하는 방식을 두고 밀고 당기는 막후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채널은 우리 당의 김용환 사무총장과 국민회의의 한광옥 부총재였다. 국민회의는 일찌감치 5·19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을 대선 후보로 선출했으나 내각제 개헌을 당의 강령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자민련한테 후보 단일화를 확약받지 못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강령 개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YS의 독선 정치는 97년 새해 들어 국정 곳곳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노동법 날치기에 이어 한보·기아 부도사태가 터지면서 민심이 요동쳤다. 급기야 대통령 아들의 비리사건이 터지자 신한국 건설, 문민개혁, 역사 청산은 위선과 기만이라는 국민적 비판이 들끓었다.

 자민련과 국민회의는 양당 합동 의원총회, 보궐선거 후보단일화, 공동유세 등으로 공조의 틀을 견고히 짜갔다. 7·21 전당대회 직후 50% 지지율을 보였던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8월 들어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으로 지지가 급락했다. 이에 따라 김대중의 1위 흐름이 고착됐는데 전통적인 여권과 보수세력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혁명이나 정변에 의하지 않고는 교체된 적이 없는 정권이었다. 그 내부에서 ‘김대중 비토론’이 급부상했다. 어떤 방법을 쓰든 DJ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기류였다. 비토론은 DJ가 용공(容共)분자인데 대통령이 되어 대한민국의 체제와 정체성을 파괴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주장이었다. 6·25 참전 장교이자 반공을 국시로 5·16혁명을 일으킨 내가 어떻게 DJ 같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정서적인 압박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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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대선 두 달 전인 1997년 10월 16일 김종필 자민련 총재(왼쪽)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함께 경남 김해시 수로왕릉에서 열린 가락국 시조대왕 추향대제에 참석해 관복을 입고 있다. [중앙포토]

 이런 분위기를 타고 9월 들어 김영삼 대통령 쪽에서 은밀한 접근이 있었다. DJ와 손을 떼고 YS와 내각제를 추진해 보자는 것이었다. 정부의 한 고위인사는 간접 경로를 통해 내게 다음과 같은 뜻을 전했다. “김 대통령이 95년 탈당하는 총재님(JP)을 붙들지 못한 걸 몹시 안타까워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 총재님과 손을 잡자고 했더니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자민련 안에서도 김대중의 색깔을 의심하는 의원들이 이회창을 도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YS의 은밀한 제안은 진정성은 있다고 봤지만 현실성은 떨어졌다. 김대중과 나는 없었던 걸로 하기엔 너무 먼 길을 함께 걸었고 여권에서 김영삼이 이회창 세력의 반발을 물리치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기엔 대통령으로서 너무 힘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여권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는 있었다. 이 다음에 ‘가야 할 길’에 대한 나의 집착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9월 5일 기자회견을 열어 “김 대통령이 내각제를 결심하고 선두에 나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면 적극 협조할 생각이다. 개헌을 위해서라면 대선을 연기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YS의 비공개 제안에 공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여권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역시 반응이 없었다. 나의 요구 조건은 여권이 합의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을 것이다.

 9·5 회견으로 DJ와 국민회의는 바싹 몸이 달았다. 김용환-한광옥 라인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국민회의 쪽에선 우리 쪽의 내각제 보장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줬다.

97년 10월 25일 김용환·한광옥이 ‘대선 후보단일화 합의문’을 만들었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국무총리는 내가 맡기로 하고 내각제 개헌은 공동정부 2년째인 99년 12월 말까지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명을 서둘지 않았다. 그 전에 DJ를 직접 만나서 해야 할 말, 들어야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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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97년 10월 27일 밤 8시30분. 김대중 총재가 한광옥 부총재를 데리고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나는 마당으로 마중 나가 그를 기다렸다. 김 총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포옹했다. 감정이 상당히 북받치는 모습이었다. DJ가 이런 방식으로 친밀함을 표시하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김 총재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DJ를 소파에 앉도록 권하며 “그러잖아도 도와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총재님(DJ)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寃)과 한(恨)을 다 풀어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이 시키지도 않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른 일을 떠올렸다. 그 일은 이후락이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낸 ‘자기가 죽을 꾀’였다. 내가 김대중에게 직접 고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점에서 나 외에 박 대통령을 대신해 그의 가슴에 맺힌 원(寃)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답을 들은 DJ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총재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첫째, 대통령이 되시면 임기 중에 내각제 개헌을 꼭 해주십시오.” DJ는 “내각제, 하겠습니다. 해야죠”라고 받았다. 나는 또 “국민화합 차원에서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을 하나 세워주십시오. 박 대통령이 이 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기 때문에 김영삼이나 총재님이 다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DJ는 내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아, 여부가 있겠습니까”라며 흔쾌히 약속했다. 이로써 나는 합의문에 쓰지 않은 별도의 중요한 약속을 김대중 후보와 맺었다. ‘내가 박정희를 대신해 당신을 도울 테니 당신은 박정희기념관을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인격과 신뢰에 바탕한 역사의 해원(解寃) 의식이었다고 할까.

사실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은 92년 대선을 앞두고 내가 김영삼을 지지할 때 반대급부로 그가 약속했던 사안이었다. YS는 대통령이 되고는 이 약속을 묵살했다. 반면 DJ는 대통령이 되고 기념관 건립 비용으로 200억원의 예산을 책정해 2002년 1월 건축공사를 착공했다. 2012년 개관한 서울 상암동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DJ가 마련해 준 그 예산에서 시작됐다.

97년 12·18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1032만 표(유효투표의 40.3%)를 얻어 이회창 후보를 40만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그 40만 표는 충청권에서 김 후보가 이회창에게 앞선 40만 표와 일치하는 표차였다. 나는 이날 투표결과를 보면서 63년 10월 군사정부를 민정으로 이양할 때 박정희와 윤보선 후보 간 대선 경쟁이 생각났다. 그때 박정희 후보는 윤 후보한테 총 15만 표차로 승리했는데 전남에서만 박 후보가 이긴 격차가 28만 표였다. 호남이 박정희를 도와 대통령을 만든 지 30여 년이 흘러서 박정희를 뒷받침했던 내가 호남 대통령 탄생을 도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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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소사전  한광옥(73)=김대중 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을 지내고 현재 박근혜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고 있는 전직 4선 의원.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 영문학과를 다니다 1964년 6·3사태 때 제적됐다. 신민당 신도환계로 정치에 입문, 80년 민한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88년 평민당 총재 비서실장으로 김대중계에 참여했다. 97년 DJP 후보 단일화 때 공을 세워 98년 초대 노사위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 2012년 대선에서 김용환씨를 통해 박근혜 캠프에 참여했다. 98년 민화위(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를 지낸 이래 동서 통합과 남북 화해에 집중하고 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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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