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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바다는 큰 물 작은 물 안 가린다” 자민련 TK서도 약진 ‘신3김 체제’ 등장 … DJ “JP와 함께 연설 상상도 못해” 반YS 투쟁이 DJP 공조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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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5월 26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4·11 총선 민의수호 결의대회’에 참석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왼쪽)와 김종필(JP) 자민련 총재가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여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빼가기에 항의하는 장외집회로 양당 간 공조의 시작이었다. JP는 “김대중 총재는 지난 30년간 나와서 있는 자리는 달랐지만 나름대로 오늘이 있게 한 거목”이라고 말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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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9일 나는 YS와 결별하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탈당했다. 90년 1월 3당 합당을 한 지 5년 만에 내가 합친 당을 떠나는 나의 심사는 복잡했지만 ‘더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야 했다. 나는 그해 초 ‘종용유상(從容有常)’이란 휘호를 쓰면서 나의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 “무슨 일에도 의연하게 법도를 지킨다”는 자세로 나의 길을 차근차근 다시 정비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6> 자민련 창당과 DJP공조 전야

 나와 함께 민자당을 떠난 의원은 이종근·구자춘·정석모·조부영·이긍규 의원이었다. 정 의원은 전국구 의원이라 탈당을 하면 의원직을 상실하는데 그 손해를 감수하면서 흔쾌히 나의 길에 합류했다. JP와 그 측근들이 정치적 황야(荒野)에 내몰렸다는 비관적 시선이 정치권에 있었지만 나는 젊을 때부터 좋아했던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읊조렸다.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가야 한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가야 한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신당 창당에 나섰다. 92년 대선 무대에서 나를 떠났던 김용환 의원도 합세했다. 탈당과 신당 창당 대열에 옛 공화계 출신만이 아니라 여러 정치 계파와 사람들이 동참했다. 그 대표적 사람이 박준규 전 국회의장으로 그는 93년 공직자 재산등록의 파란 속에 민자당을 떠나고 국회의장직도 그만뒀다. 대구·경북(TK)의 원로이면서 나의 정치역정에서 여러 차례 충돌을 빚던 인물이기도 하다. 3월 30일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대회가 열렸고 그 후에 정주영씨의 국민당 후신으로 김복동씨가 이끌던 신민당도 우리 당에 합쳤다. 92년 대선에서 반(反)YS를 표방했던 박철언씨도 입당했다.

 자민련의 구성원은 출신, 성향, 정치이력이 다양했다. 민자당 내에서 김영삼(YS)씨 민주계의 푸대접을 받거나 속앓이를 하던 사람, YS 정권의 역사란 이름으로 정치적 입지에 상처를 받은 사람을 비롯해 그냥 정치권 주변에 떠돌면서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까지 들어왔다. ‘왕자불추 내자불거(往者不追 來者不拒,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나의 오랜 인간관계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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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15일 마포 당사에서 열린 15대 총선 당선자대회에서 김종필 자민련 총재(오른쪽)와 박준규 최고고문이 얼싸안고 있다. [중앙포토]

 자민련의 창당 모습을 놓고 여러 가지 비판과 비아냥이 있었지만 나의 자세는 해불양수(海不讓水)였다. 바다는 큰 물, 작은 물을 가리지 않으며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대양을 이룬다. 그런 통찰과 지혜에 내가 의존한 것은 ‘가야 할 길’에 대한 의지와 오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YS 정권의 포용력 부족과 독주에 밀려 고전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민련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나는 95년 6월 지방선거에 나설 채비를 갖춰야 했다. 대부분 언론에선 ‘JP의 자민련 창당과 내각제 도전은 미지수’라고 보도하는 등 자민련의 장래에 대체로 비관적이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이때가 처음으로 자민련의 운명이 판가름 날 판이었다. 자민련의 등장은 YS 정권의 ‘충청 홀대론’의 상징이었다. 그 무렵 김윤환 정무장관이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을 해 시끄러웠다.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선전(善戰)을 했다. 대전 시장과 충남·충북·강원의 도지사 등 광역단체장 4군데에서 승리했다. 김영삼 정부의 독선과 오만, 포퓰리즘적 요소가 짙은 개혁의 피로감 등이 선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선거 후 나는 “자민련이 이번에 많지 않은 곳이지만 거점을 마련했다. 앞으로 이 거점을 선(線)으로 묶고 면으로 다지자”고 당원들을 독려했다. 나의 제3의 정치 도전은 일단 기반이 다져졌다.

 그 무렵 김대중(DJ)씨가 정계복귀를 했다. DJ는 92년 12월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DJ가 정계를 완전히 떠난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든 다시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집념은 그만큼 강하고 끈질겼다. 귀국해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설립, 이사장이 된 DJ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조순 후보를 민주당에 천거·지원해 당선시켰다. 복귀의 수순과 방식도 단계와 논리, 설득을 중시하는 DJ 방식이었다. 선거 때는 “유세 지원은 하지만 복귀는 아니다”고 하더니 선거가 끝나자 “민심은 나를 원하고 있다”고 한발 나아갔고 95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2년7개월 만에 은퇴를 번복하고 정치현장에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때 “DJ가 마지막 승부를 걸고 신당을 창당한 것 같다. 옆에서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다”고 평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역경과 도전, 장애물로 이어졌다. 96년 4·11총선에서 국민적 재평가를 받아야 했다. 95년 하반기는 전두환·노태우의 구속과 비자금 수사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나는 96년 새해를 맞으면서 “과거사의 법정이 아니라 미래사의 산실로서 보다 진취적인 해가 돼야 된다”고 외치면서 ‘출사무적(出師無敵)’이란 말로 총선 승리를 다짐했다. 총선 전에 29석으로 출발한 자민련은 총선에서 50석을 얻는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대구에서 8석을 얻었으니 자민련이 충청도 지역당이라는 이미지를 씻어낼 수 있었다. 나 개인적으로도 고향 부여에서 다시 당선돼 국회의원 8선을 기록했다. 이제 자민련은 제3당으로서 정국의 확고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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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7일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단식 중 누워 있는 김대중(DJ) 평민당 총재를 찾아가 중단을 권유하고 있다. DJ는 내각제 개헌 포기 등을 내걸고 13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다.


 김대중씨의 국민회의는 기대에 못 미치는 79석을 얻는 데 그쳤고, DJ 자신도 전국구에서 고배를 들었다. 세간에서는 이때를 ‘신(新)3김 정국체제’라고도 했다. 집권 신한국당은 수도권에서 선전했지만 과반수에 미달(139석)했다. 신한국당은 과반수(150석)를 채우기 위해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 빼가기에 나섰는데 나는 “선거 민의(民意)를 무시하는 이런 행태는 아무리 혹독한 정권에서도 없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나는 4·11총선 직후(4월 19일) 청와대에서 만난 김영삼 대통령에게 의원 빼가기를 지적하고 항의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신한국당 공천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당선 후 다시 오겠다는데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초점을 흐렸다. 한편 나는 “의원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지만 YS는 “내각제는 남북 대치상황에서 적절치 않고 부패정치의 근원이다”는 말로 피해 나갔다. 자민련의 성취에 대한 집권당의 시기와 압력은 더욱 교묘해졌다. 5월 가정의 달에 나는 “아이들 울리지 마라/ 지내온 길인걸/ 늙은이들 탓하지 말라/ 다 가는 길인걸”이란 일본 작가의 동시(童詩)를 주위에 전하면서 “세상일은 어떤 경우에도 무한이 아니고 유한(有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정권의 위압적인 행태를 지적했다.

 YS 집권당의 정치도의를 무시하는 행각은 나와 DJ의 접근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그해 5월 말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신한국당의 의원 빼가기 규탄대회’가 자민련과 국민회의 공동 주최로 열렸다. DJ는 “김종필 총재와 내가 한자리에 서서 연설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독재가 우리를 손잡게 만든 공로자”라고 주장했고, 나는 “여기 김대중 총재가 있는데 나와는 지난 30년간 서 있는 나름대로 오늘이 있게 한 거목”이라고 화답했다. 그 장면이 다음 해 대선 때 DJP 공조의 출발이었는데, 그때는 나 자신이 실감하지 못했다.

 양당 공조는 9월 보궐선거로 이어졌다. 우리 당의 김용채씨가 연합공천을 받아 야당 단일후보로 서울 노원구청장 선거에 나갔다. 국민회의는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DJ와 나는 중계동 근린공원에서 열린 노원구청장 재선거 정당연설회에 나란히 참석해 지원유세를 했다. 야권 후보 연합공천은 그때가 선거 사상 처음이었다. 총선 이후에도 나는 “내각제 실현을 위해 집요한 노력을 경주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내각제에 대한 나의 전략마련과 고민을 계속했다. 하지만 당내 TK 출신 등 일각에선 나를 포함한 양김 2선 후퇴론, 제3 후보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내각제에 뜻을 같이하는 세력과 손을 잡겠다”는 합종연횡을 시사하는 말로 대응했다.

 96년 가을 DJ 쪽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내년 대선에서도 야당 공조로 정권교체를 이뤄내자”고 요청해 왔다. 10월 김대중 총재는 주간지 인터뷰에서 “97년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후보 단일화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내각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나를 향한 구애의 손짓이었다. 나는 김용환 사무총장을 은밀히 불러 국민회의 쪽과의 접촉 창구를 맡겼다. 11월 1일 밤, 김대중 총재의 서울 목동 처제 집에서 DJ와 김용환 총장이 만났다. 그때부터 1년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DJP대선공조 협상이 시작됐다.

 나는 12월 초에 97년 대선의 해를 맞는 신년휘호를 썼다. 줄탁동기(?啄同機)란 말로 나의 생각을 담았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과정은 쉽지 않다. 어미 닭과 병아리가 안과 밖에서 동시에 껍질을 쪼아야 새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절인연의 천시(天時)가 맞아떨어져야 ‘가야 할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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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소사전 정석모(1929~2009)=충남 공주 출신으로 김종필(JP) 전 총리가 나온 공주중학을 졸업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뒤 경찰에 투신해 치안국장(현 경찰청장)에 올랐다. 이후 강원·충남도지사를 거쳐 78년 공화당에 입당, 10대 의원에 당선됐다. 전두환 정권 이래 민정·민자당에서 내무장관과 11·12·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95년 JP를 도와 자민련을 창당, 15대까지 6선을 기록했다. 정진석 전 국회의원의 부친.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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