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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딱정벌레차 신화, 그 뒤엔 80년 핏줄의 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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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까지 경제성과 친환경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완성차 업체가 되겠다.”

 마르틴 빈터코른(68) 전 폴크스바겐그룹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초 발간한 연례보고서에 연비와 친환경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가 굳게 믿고 있던 무기는 TDI(Turbocharged Direct Injection) 디젤엔진이었다.

 지난 4월 빈터코른은 자신의 오랜 후견인이자 ‘자동차 황제(Kaiser Auto)’로 불렸던 페르디난트 피에히(78) 전 폴크스바겐 회장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폴크스바겐그룹은 올 상반기 504만 대의 자동차를 팔아 일본 도요타(502만 대)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회사로 올라섰다.

 그로부터 3개월. 폴크스바겐의 최대 경쟁력이라던 TDI 엔진은 그룹의 존망을 위협하는 암 덩어리가 됐고 빈터코른은 불명예 퇴진했다. 중저가 자동차부터 고급차와 스포츠카까지, 오토바이부터 상용차까지 최고의 포트폴리오와 기술력을 겸비했다던 ‘자동차 제국’ 폴크스바겐그룹은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후진적 지배구조를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오너 가문이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BMW그룹이나 지분이 공개된 다임러그룹(메르세데스-벤츠 모기업)과 달리 폴크스바겐그룹은 두 오너 가문이 78년 동안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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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피에히(左), 볼프강 포르셰(右)

 폴크스바겐은 1937년 나치정권하에서 설립됐다. 아리아 민족주의를 표방한 나치정권은 각종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어용 기업가·노동자 단체였던 ‘독일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에 자동차 생산을 맡겼고, 국민이란 뜻의 ‘폴크스(Volks)’와 자동차란 뜻의 ‘바겐(wagen)’이 합쳐진 이름을 붙였다.

 ‘오토바이 가격에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을 태우고 시속 100㎞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실현한 건 천재 공학자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였다. 딱정벌레 모양의 유선형 차체 뒤쪽에 직렬 4기통 수평대향 엔진을 장착한 이 차는 이후 ‘비틀(Beetle)’이란 별명이 붙었다.

 군용차량을 생산했던 ‘전범기업’ 폴크스바겐은 종전 후 공장이 있던 볼프스부르크를 점령한 영국과 미국을 거쳐 독일 정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독일 정부는 60년 폴크스바겐을 주식회사로 전환했지만 공기업과 유사한 지배구조를 갖게 했다. ‘폴크스바겐법’을 만들어 니더작센주가 20%의 지분을 소유하고 대주주라 해도 20%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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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크스바겐의 아버지’ 포르셰 박사는 1남1녀를 뒀다. 딸 루이제는 법률가 안톤 피에히와 결혼했다. 피에히는 포르셰 박사의 아들 페리와 함께 폴크스바겐과 포르셰의 경영에 참여했다. 80년 가까운 ‘가문전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포르셰 박사와 두 사람은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포르셰·피에히 가문은 포르셰의 지주회사인 포르셰SE의 지분을 90%까지 늘려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 한편 ‘가업’의 일부였던 폴크스바겐의 지분도 사들이기 시작했다. 3세들의 지분이 늘면서 70년 포르셰 경영권을 놓고 두 가문이 분쟁을 빚자 페리 포르셰는 오너 일가 경영진의 전원 사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두 집안은 포르셰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로 신사협정을 맺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피에히 가문에서는 포르셰 박사의 외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두각을 나타냈다. 공학박사 출신인 피에히는 경영권 분쟁 이후 아우디로 옮겨 폴크스바겐그룹을 장악해 나갔다. 피에히는 아우디 기술담당 사장·이사회 의장을 거치면서 콰트로 시스템(4륜구동 기술), TDI 엔진, 알루미늄 차체 개발 등 아우디의 대표기술 개발을 주도했다. 폴크스바겐그룹 회장·감독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하며 영국 고급차 벤틀리, 이탈리아 수퍼카 람보르기니 등을 인수했고 브랜드만 남아 있던 프랑스 부가티의 부활을 주도했다. 전 세계 완성차 업체 가운데 가장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갖춘 폴크스바겐 제국의 완성을 이끈 피에히는 ‘자동차 황제’란 별명을 얻었다.

 포르셰 가문에서는 포르셰 박사의 친손자인 볼프강 포르셰가 선두주자였다. 페리 포르셰의 막내아들이었던 그는 경영권 분쟁 후 다임러-벤츠에서 경력을 쌓았다. 79년 포르셰에 복귀해 지주회사인 포르셰SE 감독이사회에 참여했고 2007년엔 회장 겸 이사회 의장이 됐다. 2009년 포르셰와 폴크스바겐의 인수·역인수 전쟁이 끝난 뒤엔 포르셰 부활의 일등공신이었던 벤델린 비데킹 전 회장을 몰아내고 포르셰의 ‘원톱’이 됐다.

 포르셰 가문과 피에히 가문의 ‘권력다툼’은 2005년 폴크스바겐법 폐지와 함께 본격화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유럽경제공동체 협약에 위배된다’며 폴크스바겐법을 EU 사법재판소에 제소한 데 따른 것이다.

 포르셰·피에히 가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동차 황제’ 피에히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를 설득했다. ‘국민기업’ 폴크스바겐을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포르셰와 피에히는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그해 10월 포르셰SE가 폴크스바겐AG 지분 18.53%를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4년 만에 50.7%가 넘는 지분을 확보했다. 폴크스바겐 감독이사회 의장인 피에히는 일가인 포르셰SE에 지분을 넘겼다. 주식을 처분하는 이도, 매입하는 이도 결국 같은 편이었던 셈이다. 폴크스바겐 주가 상승으로 포르셰SE는 4년 만에 80억 유로(현재 환율로 10조8300억원)를 ‘앉아서’ 벌었다.

 포르셰-폴크스바겐의 인수·역인수 전쟁이 이때 벌어졌다. 폴크스바겐 인수를 주도했던 비데킹 포르셰 회장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재정부담이 커지자 ‘희생양’이 됐다. 2009년 피에히는 크리스티안 불프 당시 니더작센 주지사(이후 연방 대통령 역임)를 설득해 포르셰SE가 갖고 있던 포르셰AG의 지분 전량을 폴크스바겐AG가 인수하는 데 니더작센주가 동의하게 했다. 피에히는 “무리한 인수전을 주도한 비데킹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언론들은 “포르셰가 폴크스바겐을 인수하려다 역인수당했다”고 보도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전문경영인인 비데킹이 주인 자리를 노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포르셰·피에히 일가는 잃은 게 없었다. 오히려 큰돈 들이지 않고 폴크스바겐 제국의 지배자가 됐다.

 외견상 포르셰가 폴크스바겐에 인수되면서 적자(嫡子)인 볼프강 포르셰가 자존심을 구긴 것도 사실이었다. 지난 4월 피에히는 30년간 몸담은 회사에서 쫓겨났다. ‘세계1위’에 집착한 피에히는 수익 증대를 앞세워 자신에게 반기를 든 빈터코른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사회 멤버들과 노조, 대주주인 니더작센주는 오히려 빈터코른의 손을 들어줬다. 자동차 업계에선 ‘반란’의 배후에 볼프강 포르셰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5개월 만에 빈터코른 역시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불명예 퇴진했다. 후임엔 ‘피에히의 사람’인 마티아스 뮐러 전 포르셰 CEO가 임명됐다. 최대 위기를 맞은 두 오너 가문은 일단 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새로 임명된 경영진 역시 두 오너 가문의 사람들이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SZ)은 폴크스바겐의 지배구조를 북한의 지배구조에 비유하면서 “독재적 리더십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정상적 지배구조가 실종된 상태”라고 꼬집었다.

 규모의 유혹에 흔들린 폴크스바겐은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다. 세계 1위를 꿈꿨지만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 격전지인 미국의 시장점유율(2%)은 너무 초라했다. 전제적 지배구조는 사기극을 벌일 토양을 마련했다. 내연기관을 만든 오만과 대주주 중동자본의 입김도 화석연료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과 미국이 전기차에 사활을 거는 동안 폴크스바겐은 ‘클린디젤’이란 거짓 신화를 만든 셈이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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