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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북방외교 돕겠다, 양당 합치자” 노태우 “좋다”…보수대연합으로 정계개편 시동 “진천동지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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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 2일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안양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던 중 티샷을 하던 YS가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자 두 사람이 파안대소하고 있다. 이들은 연이은 골프회동에서 “우정과 소신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두 야당 총재의 잦은 만남은 정가의 주목을 받았고 민주·공화당 합당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JP는 “골프를 치면서 합당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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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는 ‘정치는 단념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정치란 해야 할 일을 어김없이 해내고, 해서는 안 될 일은 단념하는 기술이란 뜻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란 해서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저지르는 과오들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지는 잘못들의 기록이다. 즉 일의 완급과 선후를 가려 순리에 맞게 다스리는 것, 그것이 정치기술의 요체다.

 

 1990년대를 목전에 둔 89년 초 나는 단념할 것과 집중할 것을 가려내기 위한 고민이 깊었다. 88년 4·26 총선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4당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는 대화와 타협, 견제와 균형으로 국정을 이끌고 민주화를 실현하라는 국민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 한계점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나를 비롯한 정당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주의와 분파주의로 정치는 혼선과 낭비에 휩싸였다. 정쟁과 선명성 대결로 국민은 정치를 멀리했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은 집권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집권당의 전략 부재로 대법원장 임명 동의에 실패하면서 민정당과 정부는 무력감에 빠졌다. 오죽하면 노 대통령을 가리켜 ‘물태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치가 삐걱거리고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사회도 불안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연일 계속 됐고 기업은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았다. 치안 부재와 물가고로 국민의 불안과 한숨이 늘어갔다. 나는 제4당의 총재로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지만 국리민복을 위한 정치의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무력감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 속에 전환과 돌파구를 마련코자 했다.

 국제적으로는 대변혁기였다. 소련 고르바초프 당서기장이 ‘페레스트로이카’(총체적 개혁)를 제창하면서 동유럽 공산권 곳곳에서 개혁·개방의 바람이 몰아쳤다.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소련·동유럽·중국 등 그동안 막혀 있던 북방(北方) 대륙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27년 전인 62년 나는 ‘매국노’ 소리 듣기를 각오하고 오히라 일본 외상을 만나 대일청구권 자금을 담판 지었다. 그때는 북쪽으로 소련과 중국에 가로막힌 우리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일본을 딛고 태평양·인도양·지중해·대서양으로 뻗어나가야만 했다. 이제 수십 년간 막혀 있던 서북방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대륙으로 내달려갈 기회였다. 다가올 통일시대를 위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도 북방정책은 중요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출범 초부터 북방정책 추진을 떠들썩하게 홍보했다. 하지만 여소야대 정국을 관리할 수 있는 의지와 전략이 부족한 노태우 정권이 북방외교를 성공시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나는 우리 당이 아닌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내 결론은 북방외교를 위해서라도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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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회담을 연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나는 88년 8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미 보혁(保革)구도의 보수대연합을 말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혁신 쪽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 보이면 보수연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발언에 윤길중 민정당 대표가 “여소야대라는 기형적인 정치 상황을 파괴해야 하며 내각제 찬성세력이 먼저 연립정부를 구성해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이 발언은 파문을 일으켜 사견(私見)이라는 해명으로 끝났지만 여소야대의 변모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그만큼 넓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인 8월 22일 노 대통령과의 첫 오찬회동 자리에서 나는 보혁 구도의 정계개편을 강조했고 노 대통령도 이에 공감했다.

 89년 3월 7일 나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 다시 만났다. 배석자 없이 단 둘이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 시간 가까이 회담했다. 나는 노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를 중지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으로 이렇게 말했다. “북방정책을 포함한 여러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여소야대 정국으로는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북방외교는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하기가 힘듭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한 표정으로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나는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을 꺼냈다. “공화당 35명이 민정당과 합치면 여소야대가 여대야소(與大野小)로 바뀝니다.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북방외교를 포함한 국방·외교 정책을 소신껏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과 합칩시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결심입니다.”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합당(合黨)을 처음으로 제안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정치권의 거대하고 충격적인 변화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깜짝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좋습니다. 곧 합시다”라고 말했다. 서로 뜻이 잘 통했다. 청와대 회담을 마치고 국회 총재실로 돌아와 김용환 정책위의장을 따로 불렀다. 그에게 “우리 합치기로 했다”고 합당 추진 사실을 처음 알렸다. 노 대통령이 실무대표로 정한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과 합당을 위한 실무협의를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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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각기 다른 라인을 통해 민정당과의 합당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앙포토]

 민정당과 공화당의 양당 합당을 위한 논의가 비밀리에 시작됐다. 5공청산 문제를 매듭짓는 대로 두 당이 통합해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자는 구상이었다. 민정당이 129석, 공화당이 35석으로 합치면 과반수(150석 이상)를 확보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통합을 위한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당시 공안사건이 속출하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이 최종 결단을 내리지 않은 채 시간을 끌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한참 시간이 흘러 합당이 성사되기 직전에야 알았다. 나의 합당 제안 사실을 전해들은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이왕 야당하고 합당을 할 거면 민주당(59석)을 끌어들여 거대 여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노 대통령을 설득했다. 박철언은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이다. 처음엔 민정·공화 양당 통합만을 생각했던 노 대통령은 박철언의 설득에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대권에 대한 집념이 누구 못지않게 강한 김영삼 통일민주당(민주당) 총재로서는 반길 만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나와 노 대통령이 양당 합당에 뜻을 모은 지 한 달쯤 뒤부터 박철언은 민주당과 합당 논의를 별도로 진행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내게 귀띔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짐작으로만 청와대 쪽 기류가 달라졌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89년 7월 10일 노 대통령과 오찬회동에서 양당 통합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회담을 마친 뒤 나는 기자들에게 “합리적으로 대동단결할 시기가 오고 있으며 필요한 조치를 서서히 취해나가자고 했다”고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정치권이 정계개편설로 술렁거렸다. 민정당 내 일부 세력은 “공화당과의 합당은 안 된다”면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노 대통령이 결단을 계속 미루고 있던 89년 10월 나는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연이어 골프회동을 했다. 10월 2일엔 안양컨트리클럽에서, 10월 31일엔 관악골프장에서 함께 골프를 쳤다. 두 번 모두 27홀을 돌면서 YS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헛스윙한 YS가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에 우리 둘이 파안대소하는 사진이 그때 분위기를 드러내준다. 두 번째 회동에서 우리는 “민주화가 이뤄질 때까지 두 총재가 우정과 소신을 가지고 협력해 나가기로 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정가에서는 나와 YS의 ‘우정과 소신’의 관계에 주목했다. 양당의 합당설까지 나왔다. 그때 ‘골프장에서 정치9단인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에 대한 추측이 많았는데 사실 별 의미 있는 내용은 없었다. 합당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나도 YS도 민정당과 합당을 추진 중이란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우리 둘의 잦은 회동이 노 대통령에겐 자극이 됐을 것이다.
 
 90년 새해가 밝았다. 연초부터 정계개편설이 무성했다. 그 직전 연말에 박준규 민정당 대표가 “새로운 양당체제로 정계를 개편하고 그 과정에서 민정당을 해체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면서 정치권은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는 5공청산 문제가 주된 의제였던 터라 이런 정계개편은 민정당 의원들도 예상 못한 돌출적인 것이었다. 박준규 대표는 발언 파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노 대통령은 DJ(1월 11일), YS(12일)에 이어 13일 나와 만났다. 이날 회담을 기점으로 민정당과 공화당 합당을 위한 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20일 신라호텔에서 김용환 정책위의장과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합당을 위한 합의각서를 작성했다.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은 구국 일념으로 조건 없이 당 대 당 합당한다. 새로 합당되는 당 명칭은 민주자유당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실무작업은 끝났고 1월 22일 청와대 회담만 남았다. 그 즈음 나는 바둑을 두며 기자들에게 “진천동지(震天動地)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경천동지(驚天動地)보다 더 큰일이 진천동지다. 경천은 하늘을 놀라게 하는 것이지만 진천은 하늘을 흔드는 일이다. 한국 정치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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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소사전 박철언(73)=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고종사촌으로 ‘6공화국 황태자’로 불렸던 인물. 검사 출신에 전두환 정권에서 청와대 비서관과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뒤 청와대 정책보좌관을 거쳐 정무 제1장관과 체육청소년부 장관에 올랐다. 북방정책과 90년 3당 합당에 깊숙이 관여했다. 13대 전국구 국회의원과 14·15대 대구 수성갑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영삼(YS)과 갈등 끝에 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했고 YS 집권 직후인 93년 슬롯머신 사건으로 1년4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에서 부총재를 지낸 뒤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하자 정계를 떠났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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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