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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메뉴판 없어 매력 있는 식당

지난 1일 저녁 서울시청 앞의 한 프랜차이즈 분식집. 한쪽 벽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메뉴판을 바라보는 순간 어지럼증부터 생긴다. 김밥·소내장탕·닭볶음탕·돈까스·함박스테이크 등 달라도 너무 다른 음식들이 한 메뉴판에 모여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세어보니 모두 107개. 무한대로 느껴지는 선택권 앞에 고민의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 점심 인근의 샌드위치 가게.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자 들른 곳이지만 이곳에선 ‘햄샌드위치 하나요’ 같은 안일한 주문은 용납되지 않는다. 빵의 종류와 길이를 고르는 것은 약과. 10개가 넘는 야채를 선택하고 얇은 햄과 두꺼운 햄의 차이를 고민해야 한다. ‘달콤한 맛’만 네 종류인 소스를 고르라는 종업원의 말에 ‘어쩌라고’라는 짜증 섞인 아우성이 턱 밑까지 차 올랐다.

 한식·중식·양식을 넘어 터키·아프리카 국적의 음식까지 골라 먹을 수 있는 시대. 재료뿐만 아니라 요리 방법까지 내 취향대로 고를 수 있게 선택권을 손님에게 돌려준 ‘민주적’ 식당들이 대세다. 미디어에서는 고기 굽는 정도에서부터 샐러드 드레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섬세한 입맛을 종업원에게 상세하게 얘기하는 이들을 그럴듯한 모습으로 그린다. 하지만 고르는 재미도 잠시.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려 해도 31가지 고민을 해야 하는, 지나치게 많아진 선택권에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밥 먹는 것까지 고민해야 하느냐’는 이들이다. 그래서 ‘맛있는 월요일’이 찾아봤다. ‘선택 과잉의 시대’ 소비자의 고민을 원천봉쇄하고 ‘셰프가 정해주는 대로 드세요’를 고수하는 식당. 이른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대답만 하면 돼)’ 식당들이다.

인원수·예산만 말하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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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재에서 만든 슈하스코(고기·야채 등을 꽂은 브라질 요리).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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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동의 유유재를 처음 찾는 이들은 자리에 앉는 순간 당황한다. 은은한 할로겐 조명이 비추는 가게 어디에도 메뉴판은 없기 때문이다. 종업원에게 인원수와 가격대만 말하면 손님의 역할은 끝. 그 다음부턴 사장이자 셰프인 정유선(46·여)씨가 메뉴 선택에서부터 조리까지 알아서 해준다. 남녀가 함께 간다면 둘의 관계를 묻는다. “소개팅해요”라고 하면 우아하게 먹을 수 있는 오일파스타가, “회사 동기인데요” 하면 다소 먹기엔 불편하더라도 제철인 꽃게 다리를 들고 뜯어야 하는 해물탕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기본은 2인 3만원이다. 1만원씩 비싸질수록 쇠고기 스테이크, 회 등 식재료 단가가 높아진다. 제일 비싼 메뉴는 2인 5만원짜리지만 3만원 메뉴만 해도 맛과 양에 모자람이 없다. 기자가 방문한 지난달 30일에는 3만원 메뉴로 꼬치에 통삼겹살과 닭고기·소시지 등을 끼운 슈하스코(고기와 야채를 꽂아 숯불에 굽는 브라질 전통요리)가 나왔다. 함께 나온 방풍나물 잡곡밥의 산뜻한 향이 기름진 고기와 잘 어울렸다. 정씨는 “‘저 사람이 뭘 좋아할까’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한 요리를 내놓는다”며 “메뉴 선택에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정씨의 선택을 신뢰한다.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지인 손에 이끌려와 ‘강요된 메뉴’를 맛본 뒤 단골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메뉴를 고민할 시간에 어떤 음식이 나올까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 덕분이다. 기계체조 양학선 선수도 이곳을 찾는 단골 중 하나다.

메뉴는 한 상 차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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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해달밥술의 한 상 차림 메뉴. 민어찜과 산낙지, 홍합탕 등이 테이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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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달밥술은 서울 연남동 경의선 숲길 한쪽에 있다. ‘해 떠 있을 때는 밥을, 달 떠 있을 때는 술을 판다’는 뜻이다. 실내엔 역시 메뉴판이 없다.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이곳을 찾은 20대 초반 커플은 자리에 앉은 뒤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메뉴판을 찾자 주방에 있던 사장 편경자(55·여)씨가 “그냥 앉아 계세요”라고 소리친다. 잠시 뒤 설탕이 안 들어간 칼칼한 떡볶이를 시작으로 산낙지·민어찜·올방개묵 등이 차례로 나와 작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접시가 나올 때마다 이들의 표정엔 ‘이번엔 뭐지’ 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날 식사를 한 김동현(31)씨는 “어떤 음식이 나올지 몰라 깜짝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며 “나온 음식 모두 입맛에 맞아 정말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대학교에서 매점을 운영했던 편씨는 요리가 좋아 3년 전 이곳을 열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머릿속에 떠오른 메뉴를 만드는 게 행복”이라며 “단골들이 전날 밤에 와서 ‘내일 점심 뭐해요’라고 물어도 나도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못해준다”고 말했다. 찜과 구이, 국에 각종 밑반찬을 곁들인 한 상 차림이 1인 1만7000원이다. 민어찜·광어회·산낙지처럼 바다에서 나는 재료를 많이 쓴다.

매일매일 바뀌는 코스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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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중심별곡에서 만든 가자미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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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식당 중심별곡 한쪽 벽엔 메뉴판 대신 커다란 지도가 있다. 일명 중심전도다. ‘성게·해삼은 고성, 명태회는 속초, 소금은 목포….’ 이 원산지들을 사장인 이규성(42)씨는 철저히 지킨다. 식재료가 좋으면 뭘 해도 맛있다는 신념이 있어서다. 중심별곡의 메뉴 중심코스의 음식은 날마다 바뀐다. 그날 가장 상태가 좋은 식재료를 쓰기 위해서다.

 “어제 속초에 태풍이 왔다면 오늘 새벽 속초에서 명태를 받기 힘들어요.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구한 재료를 쓰긴 싫거든요. 그날 저희 집에서 명태찜은 못 먹는 거죠.”

 ‘중심코스’ 가격은 1인당 5만원이다. 8가지 메뉴가 포함된다. 기자가 간 지난달 30일에는 지누아리(동해에서 나는 해초의 한 종류) 잡채, 한우 고추장육회와 칼국수 오일파스타가 나왔다. 토마토 짬뽕탕이 국물로 곁들여졌으며 게살 감태주먹밥이 함께 나왔다. 매일 바뀌는 메뉴 덕에 메뉴판은 매일 새로 쓴다. 하얀 A4 용지 오른쪽 귀퉁이에 ‘9/30’이란 날짜를 쓰고 여덟 가지 요리를 또박또박 써놓은 메뉴판을 구경하는 것도 중심별곡의 매력 중 하나다.

김나한 기자 kim.na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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