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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부터 『빨간 모자』까지 … 이 남자의 그림을 만나면 모두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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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린의 동물 등장 기법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안데르센 동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꽃에도 표정이 있는가 하면 눈의 여왕인 곰에게서도 사람의 형상이 드러난다. 사진 모니카 실바(Monica Silva)·서울국제도서전]


사실 고전 속 악당들은 억울할 것 같다.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들도 있었을 텐데, 무조건 싸잡아서 욕을 먹으려니 말이다. 그것도 두고 두고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유럽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로 꼽히는 파비안 네그린(Fabian Negrin·52)은 신선한 생각으로 원작에 변형을 가한다. 예를 들어 『빨간 모자』에 토대한 그의 작품 『늑대 천사(In Bocca al Lupo)』는 순진하고도 사랑스러운 늑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지금껏 보아온 중 가장 예쁜 생명체인 소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가갔지만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소녀가 슬리퍼에 걸려 넘어지면서 제 입속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식이다. 수 세기에 걸쳐 구축된 공고한 악당의 이미지에 슬며시 면죄부를 얹어준달까.

게다가 그의 그림은 기존의 동화책에서 좀처럼 만나보지 못한 스타일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하기보다는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때론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로 사뭇 공포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독특한 작품상을 형성해냈을까. 7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2015 서울국제도서전에 마련된 일러스트 원화전 ‘행운을 빌어’를 앞두고 파비안 네그린을 e메일로 미리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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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Bestie)』를 그리고 있는 파비안 네그린의 손. 숲에서 길을 잃은 두 형제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특정 동물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두려움을 느낄 때는 토끼로, 노래를 부를 때는 새로 그려지는 식이다. 사진 모니카 실바(Monica Silva)·서울국제도서전]


21회 서울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로 선정돼 단독 일러스트 원화전을 갖게 됐다. 소감은.

“매우 영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원화 65점과 관련 도서 11권을 만나볼 수 있다. 멋진 전시를 열 수 있게 해 준 주최측과 안젤로 조에(Angelo Gioe)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장에게 감사드린다. 더불어 주제처럼 ‘숨겨져 있던 이탈리아의 매력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길 바란다.”

지금은 밀라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도 작품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무대를 옮긴 특별한 이유는.

“나는 18살 때 아르헨티나를 떠났다. 양부모님이 파시스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멕시코에서 8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에칭(동판화)을 배웠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82년 멕시코 일간지 ‘우노마스우노’에 처음으로 내 만화가 실렸다. 이주를 결심한 정확한 이유를 밝힐 순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럽에서 살고 싶었다. 아르헨티나는 유럽 국가로 떠나는 이민자들로 인해 인구가 줄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고, 사람마다 맞는 장소는 따로 있는 법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일 같다. 그곳에서는 지금 여기 만큼 많은 일을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 이탈리아에서도 미술을 따로 배웠나. 두 대륙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 달라.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미술을 공부했다. 특히 컬러에 매료됐다. 중세에서 벗어나 르네상스를 연 지오토(1267~1337)부터 환상적이면서도 혁신적인 벽화를 선보인 티에폴로(1696~1770)까지 존경해 마지 않는 거장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피트레의 시칠리아 동화』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우고 폰타나(1921~85)가 다시 부활시킨 글리세린이 섞인 수채화 기법을 처음 적용해 봤다. 복합적이고 자연적인 암석의 질감이 표현돼 이야기가 지니는 서민적인 특성과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아동문학의 역사가 유구한 반면 남미에서는 그림책에 대한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막 첫 발을 뗀 정도의 수준이랄까. 그래서 나는 이탈리안 방식의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머리와 손은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어린이책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건 아니었나 보다. 강렬하면서도 동적인 그림이 인상적이면서도 아이들에겐 너무 사실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20년 전 처음 어린이책을 작업할 땐 나도 몰랐다. 성인용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작업은 훨씬 어렵다. 어른들은 그림을 보면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패셔너블하고 쿨한 것을 좋아한다. 반면 아이들은 쿨하지 않다. 그들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이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그림보다는 사실적인 그림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어른들은 많은 정보가 없어도 상상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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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로르와처 감독의 영화 ‘더 원더스’(The Wonders)의 포스터.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이탈리아 영화제에선 최고의 영화포스터상을 받았다. 사진 모니카 실바(Monica Silva)·서울국제도서전]

 
그림은 언제 처음 그렸나.

“서너살 때부터? 신기하게도 나는 항상 이야기와 관련된 것을 그렸다. 이를테면 TV에서 본 장면을 이어 그린다거나 장난감 군인을 가지고 노는 또 다른 방법을 그리는 식이었다. 어릴적부터 형성된 이 ‘그림과 이야기의 조합’이 결국 나를 두 가지가 결합하는 직업의 세계, 즉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인도한 것 같다.”

한국에선 직접 이야기를 쓴 작품보다 그린 작품 위주로 소개돼 스토리 작가와 협업을 선호하는 줄 알았다.

“맞다. 쓰기와 그리기 둘 다 좋아하긴 하지만 다른 작가의 텍스트에 그림을 그리는 걸 더 좋아한다.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 같은 좋은 고전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의 텍스트는 내가 직접 쓰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좋다. 긴 이야기를 몇 페이지로 줄여서 표현하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내가 그린 그림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직접 쓰기도 하는데 이 경우 보통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 그림에 숨겨진 역사가 무엇일까 한참 동안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자면.

“이미 100권이 넘는 책이 출간됐다. 엄청나지! 이제는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다 좋은 책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다. 많은 책이 있지만 『늑대 천사』에 대해선 특히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실 이 책은 가장 처음 그렸던 책이자 내가 재탄생시킨 책이다. 대회를 위해 전통 동화 스토리에 맞춰 그림 5점을 그렸고, 몇 년 뒤 늑대의 관점에서 다시 써 보기로 결심했다. 그 후로 또 몇 년에 걸쳐 그림이 완성됐다. 안데르센상 등 상도 여럿 받았다. 어릴적 유치원 선생님이 숲 속에서 이 동화를 읽어주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와 친구들은 숲 속에서 진짜로 늑대가 나타나 우리를 먹어치우지 않을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문학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읽고 있는 순간 그것을 현실로 느끼게 하는 힘.”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도 받았다. 최근 한국 작가들도 이 상을 많이 받고 활약도 많은데, 혹시 아는 사람이 있나.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중 마지막 장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강둑(The Riverbank)』으로 2010년 넌픽션 부문에서 수상했다. 여러 모로 내게 의미있는 전환점이 됐다. 한국 작가들은 볼로냐 라가치상 뿐만 아니라 유럽 출판업계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잘 알진 못하지만 김세나, 고경숙 작가의 그림을 좋아한다. 흑백의 정교한 스케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꼭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면.

“글쎄, 내 생각에 일러스트레이터는 훌륭한 조립공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테크닉과 스타일을 배울 필요가 있다. 좋은 책에 맞는 그림을 그리려면 다양한 그림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의『두 도시 이야기』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말괄량이 삐삐』를 같은 스타일로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모든 이야기는 그에 부합하는 스타일이 필요하고 일러스트레이터는 이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당연히 좋은 독자여야 하고, 독서를 사랑해야 한다. 아티스트와 데코레이터는 다르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다기 보다 그냥 다르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어리석음이 아닌 현명함의 세상임을 자각해야 한다. 한 때 우리가 머물렀던 그 세계와 계속 연결되어 있어라. 아이들에게 당부하자면, 절대 선 안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

#파비안네그린 #서울국제도서전 #볼로냐라가치 #늑대천사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모니카 실바(Monica Silva)·서울국제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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