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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445>이혼부터 하고 탕샤오이 호출 기다린 구웨이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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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국제연맹 이사회 의장 시절, 중국 내에 있던 외국의 조계(租界) 회수와 영사재판권 취소, 관세 자주권 협의를 하기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구웨이쥔과 세 번째 부인 황후이란. 왼쪽은 수석대표로 참석한 대리원(大理院. 대법원에 해당) 원장 왕충후이(王寵惠).]


중화민국 최고의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일생을 보면 외교관은 장가를 잘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고 그런 집안 사위가 됐다가는, 변두리만 맴돌다 매너 좋고 무책임한 훈수꾼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911년 10월 10일 새벽 '호북신군(湖北新軍)'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 성(省)이 동조했다. 청 제국은 고향에서 눈치만 살피던 '북양(北洋)신군' 설립자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국의 실력자로 부상한 위안스카이는 혁명세력과 연합했다.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제를 선포했다.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수십 년 간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를 초대 내각총리에 임명했다. 탕샤오이는 위안스카이에게 구웨이쥔을 추천했다. “미국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총기가 넘치는 청년이다. 총통부 비서로 제격이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논문에 열중하던 구웨이쥔은 본국의 동향에 촉각을 세웠다. 총리 탕샤오이가 자신을 모른 체 할 리가 없었다. 귀국 요청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우선, 부인 장(張)씨에게 이혼을 제의했다. “너나 나나, 얼굴 한 번 못 보고 결혼했다. 첫날밤 나는 엄마 방에서 잠을 잤다. 그 후에도 그랬다. 할머니가 억지로 네 방에 집어넣었을 때,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했다. 미국에 와서도 우리는 떨어져 살았다. 말이 부부지 콧김 한번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다. 너도 그걸 당연시 여겼다. 나는 겨울날 네 손에 쥐어진 부채나 다름없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다.” 부인이 먼저 도장을 꺼내들었다.

이듬해 2월, 구웨이쥔은 주미 공사의 호출을 받았다. 총통부 비서로 임명됐다는 말을 듣자 호기를 부렸다. “박사논문을 마치고 귀국하겠다.” 탕샤오이는 귀국한 구웨이쥔을 위안스카이에게 데리고 갔다. 내각비서도 겸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위안스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삼기로 작정을 했구나.” 구웨이쥔은 총통부와 내각을 분주히 오갔다.

탕샤오이는 야유회를 좋아했다. 딸 바오밍(寶明)과 베이징 교외에 갈 때마다 구웨이쥔을 불렀다. 바오밍은 어릴 때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구웨이쥔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이유를 밝혔다. “매너가 너무 좋다. 뭔가 수상하다.”

탕샤오이와 위안스카이의 밀월은 6개월 만에 끝났다. 총리직을 내던진 탕샤오이가 텐진(天津)으로 가자 구웨이쥔도 뒤를 따랐다. 텐진 조계(租界)의 영국호텔에 거처를 정하고, 틈만 나면 탕샤오이의 집을 찾아갔다.

탕샤오이는 구웨이쥔을 총애했다. 볼 때마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내 처신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직원을 제출하지 마라. 너는 일류 외교관 자질을 타고났다.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외교부에 들어갈 궁리를 해라.” 딸과 만날 기회도 어거지로 만들어줬다. 자주 보다 보면 정도 드는 법, 구웨이쥔과 바오밍은 단둘이 차도 마시고 시장도 같이 다녔다. 탕샤오이는 딸이 늦게 들어올수록 좋아했다.

탕샤오이의 권유로 귀경한 구웨이쥔은 외교부 비서도 겸임했다. 영국과 티벳 문제 담판에 참여해 외교능력을 인정받았다. 1913년, 25세 때였다. 그 해 6월 3일, 상하이에서 바오밍과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은 화젯거리를 남겼다. 원인 제공자는 탕샤오이였다. 원래 결혼일은 6월 2일이었다. 며칠을 앞두고 탕샤오이가 딸과 사위에게 사정했다. “내가 깜빡했다. 2일은 내가 네 번째 부인을 맞는 날이다. 어쩌다 보니 장소도 같은 곳이다. 부녀가 같은 날 결혼식을 하는 것은 전통에 어긋난다. 유사 이래 이런 일이 없었다. 너희들이 3일이나 4일로 바꿔라.” 구웨이쥔은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바오밍은 뭇 여인들의 시샘을 받았다.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 매이란팡(梅蘭芳·매란방)과 함께 3대 미남인 청년 외교관을 어린애가 채갔다.” 구웨이쥔은 고관 부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결혼 2년 후 구웨이쥔은 주미대사 임명장을 받았다. 27세, 세계 외교사상 최연소 미국대사였다. 구웨이쥔은 장인덕을 톡톡히 봤다. 부임 첫 번째 가을, 미국 대통령 윌슨의 재혼식이 조촐하게 열렸다. 탕샤오이와 친분이 두터웠던 윌슨이 구웨이쥔과 바오밍에게 참석해 축하해 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냈다. 대사 생활이 순조로울 수 밖에 없었다. 맘만 먹으면, 어느 때건 대통령 면담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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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가을, 아들과 함께 구웨이쥔과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탕바오밍.]


바오밍은 명이 짧았다. 결혼 5년 후 미국에서 2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귀웨이쥔은 슬퍼할 틈도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산물인 파리 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해 기염을 토했다. 패전국 독일이 누리던 산둥반도(山東半島)의 권익을 승전국 일본이 차지하려 하자 명연설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산둥은 콩푸즈(孔夫子·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중국이 이곳을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바오밍의 빈자리를 인도네시아 화교의 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이 차지했다. 황후이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엄청난 사람들이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계속)

#탕샤오이 #중국 #구웨이쥔 #황후이란 #화교 #위안스카이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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