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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정치국원 실언 한마디, 베를린 장벽 허물었다

  “우리가 의도했던 바를 다 성취한 건 아니다. 지금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인내해야 했다. 그래도 지금의 위치에 이르지 않았느냐. 세계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일이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20여 년이 지나 통일의 주역인 헬무트 콜 총리가 털어놓은 소회다. 그의 재무장관이었던 테오 바이겔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재무장관도 당시 재무장관에게 얼마의 통일비용이 들지 얘기해 주지 못할 게다. 25년간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당시 국민에게 얘기해 줬다면 통일 기쁨이 크게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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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의 발언이 통독의 요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해 1월에도 동독에선 “장벽이 50년이나 100년은 더 버틸 것”(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9월 장벽이 무너졌고 그로부터 329일 만에 통일을 이뤄냈다. 콜의 표현대로 세계사적으로 드문 일이다. 그러나 사실상 파산 상태였던 동독을 끌어올리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야 했고 앞으로도 더 넣어야 한다. 바이겔이 지금도 통일 비용을 추산할 수 없다고 토로한 이유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통일은 여전히 진행형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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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그 출발점인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실로 우연처럼 찾아왔다. 실언에서 비롯됐으니 말이다. 동독 주민들 수십만 명이 평화투쟁을 벌이던 중인 1989년 11월 9일 귄터 샤보브스키 동독 정치국원이 기자회견장에서 “동독 주민들이 서독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시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당장”이라고 답했다. 이 소식에 동독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쏟아져 나왔고 결국 현장에서 장벽을 허물었다. 원래 발효 시점은 다음날 이후였다.

 하지만 장벽에 구멍을 내는 작업은 오래 전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다. 그와 그의 ‘헨리 키신저’로 불리는 에곤 바는 작은 통행의 구멍을 내 서베를린 시민들이 동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게 했다. 63년의 통행증 협정이다. 브란트가 69년 총리가 된 이후엔 동방정책이 본격화됐다. 74년 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기조는 유지됐다.

 80년대 말 냉전체제가 무너지는 걸 보곤 콜은 통일 기회라고 여겼다. 당초 동독 측에선 92년 말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옛 소련의 해체가 예견된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봤다. 콜의 조기 통일론은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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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

 콜은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동독 정부가 근본적으로 개혁하면 모든 걸 지원해 준다”고 약속했다. 11월엔 단계적 통일론을 제시했다. 모스크바를 설득하는 노력을 병행했다. 이듬해 2월 고르바초프를 만나 “독일 통일은 독일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확인을 받았다. 이후엔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도 회유했다. 독일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제2차 세계대전 4대 전승국을 포함한 ‘2+4’ 회담의 틀이 만들어졌다. 동·서독과 소련·미국·영국·프랑스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당시 서독 외무장관은 “2+4는 아마도 달리 말하면 2+0.5일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 대목에서 2는 서독과 소련, 0.5는 미국을 뜻했다. 소련이 그만큼 결정적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9월 외교적 합의에 이르렀는데 통독의 군사력 위협을 우려하는 소련의 입장을 감안, 통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잔류하며 군 규모를 37만 명으로 제한하고 소련군 철수 비용으로 150억 마르크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 사이 3월 동독 첫 자유선거에서 서독의 기민당(CDU)과 함께하는 동독 CDU 주도로 로타어 데메지에르 내각이 출범했다. 5월엔 화폐·경제·사회 통합 조약을 체결했고 7월엔 통합 마르크화 사용을 결정했으며 8월엔 통일 협정에 서명했다. 10월 2일 동독 의회가 해산됐고 3일 동독이 서독에 공식적으로 편입됐다. 물리적 통일의 완성이었다.

 갈 길은 멀었다. 6년간 공공부문에만 1조1700억 마르크(640조원)가 투자됐다. 지금껏 동독 지역에 들어간 돈은 2조 유로(2689조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다. 통일 전 ‘우린 한 민족’이라고 외쳤지만 곧 오시(Ossi·동독)와 베시(Wessi·서독)로 갈라져 갈등했다. 당시 혼란상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가 출산율이다. 통일 무렵 동독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52로 서독(1.45)보다 높았다. 그러나 95년엔 0.84까지 떨어졌고 서독 수준으로 회복된 건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2000년대 중반 이후였다. 에곤 바는 지난해 11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내적 통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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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