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서촌 지킴이 체부동 교회, 예술 벨트 베이스캠프 된다

기사 이미지
 
기사 이미지

체부동 교회 매각 위기를 다룬 본지 2월 14일자 1면.

서울 경복궁역 2번 출구 앞 금천교 시장. 좁은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양편으로 철물점과 고깃집, 호프집 같은 아담한 가게들이 펼쳐진다. 2층짜리 건물이 가장 높다. 50m 남짓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상가 뒤편으로 하늘로 치솟은 이질적 모습의 첨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1931년 지어져 85년째 서촌을 지키고 있는 체부동 성결교회다.

서울 미래유산 ⑤ 근대 문화의 산실

다양한 근대양식 적용…가치 높아
한때 중국인 사업가에게 팔릴 위기
서울시가 매입 리모델링하기로

이상·박노수·윤동주·노천명…?
동네 곳곳에 예술가들의 자취
서촌 문화자원 엮는 작업 본격화

 이 교회는 다양한 근대 건축 양식이 한 건물에 적용됐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작은 쪽문이 있던 자리를 두고 좌우로 벽돌이 쌓인 방식이 개성 있는 차이를 보여준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부 교수는 “처음 지을 때는 한 단에 벽돌의 긴 면과 짧은 면이 번갈아 보이도록 쌓는 프랑스식 쌓기(왼쪽)를 했다. 증축할 땐 한 단에는 긴 면만, 다른 단엔 짧은 면만 보이도록 하는 영국식 쌓기(오른쪽) 방식을 썼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서울에 있는 근대 벽돌 건축물 중 프랑스식 쌓기를 볼 수 있는 건 이곳이 유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사 이미지

[펜화=안충기 기자]

 교회를 둘러싼 개량 한옥들도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회 건물과 서까래 지붕을 얹은 키 낮은 한옥, 오래된 상가가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독특한 정취를 만들어낸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한을 달래줬던 서구 신앙이라는 사회사적 의미도 크다.

 서울시는 중국인 사업가에게 팔려 헐릴 위기에 놓여 있던 체부동 교회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고 지난달 17일 밝혔다. 강석 서울시 문화정책팀장은 “매입 예산 38억원이 투자심사를 통과함에 따라 내년 초 정식으로 매입 계약을 할 것”이라며 “매입 후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해 보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매입이 결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교회 측은 지난해 7월 공공 감정가(26억원)에 건물을 팔겠다고 시에 제안했다. 서촌의 상권 성장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높아진 임대료로 원주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현상)으로 신도 수가 줄면서 교회를 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 염희승 목사는 “처음 건물을 부동산에 내놓았을 때 50억원에 사겠다는 중국인 사업가의 제안을 듣고 이러다 (교회가) 허무하게 헐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며 “건물을 보존하려면 소유권을 공공기관에 넘겨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후 시가 행정 절차 등을 이유로 결정을 미루는 사이 ‘중국인 매입’ 논란이 커졌다(본지 2월 14일자 1, 12, 13면). 결국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시의 결정도 급물살을 탔다. 서울시는 교회 본관을 서울시민 오케스트라단의 연습공간으로 리모델링할 계획이다.

 체부동 교회 리모델링 계획은 현재 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촌 예술 벨트’ 조성과도 맞물려 있다. 이 일대에 모여 있는 문화예술인의 가옥들과 근대 건축물들을 관광 자원으로 묶는 작업이다. 서촌엔 소설가 이상과 화가 박노수, 시인 윤동주와 노천명 등이 살았다. 27세에 요절한 이상이 23세까지 머문 통의동 154-10번 가옥 터엔 ‘이상의 집’이란 문화공간이 조성돼 있다. 서울시 미래유산인 이곳에서 주민 누구나 무료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상이 쓰고 그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집에서 50m쯤 떨어진 곳엔 ‘선소운(仙簫韻)’ ‘월향(月響)’ 등의 작품을 통해 한국 최고의 동양화가로 평가받는 박노수 선생의 가옥이 있다. 1937년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이 집을 72년 박노수 선생이 매입해 2013년 작고 전까지 살았다. 지금은 박노수 미술관으로 개방됐다. 한양대 전우용 교수는 “서촌에 살던 하급관리들이 일제강점기에 일자리를 잃고 하숙을 많이 쳤다”며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둘 서촌에서 셋방살이를 했고 자연스럽게 모여 살게 됐다”고 설명했다.

 누상동의 시인 윤동주 하숙집은 지금 헐리고 없다. 하숙집 자리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양옥이 들어섰다. 담벼락에 붙은 흑백사진에서 당시 하숙집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누하동 노천명 가옥은 주인만 바뀐 채 그 자리에 있다.

글=김나한 기자, 정현웅(성균관대 철학과) 인턴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kim.nahan@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