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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서 한 시간씩 소설 베끼는 관객 1000명,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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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의 책’은 전시장 속 골방에서 진행되는 문학 프로젝트다. 관객 1000명이 국내외 문학작품을 필사하며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밀려난 손글씨 쓰기를 되살린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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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지방 소도시의 국립병원 의사였다. 퇴근 후엔 빌려온 두꺼운 의학서를 16절 갱지에 필사했다. 책상 앞에서 집중해 글씨를 써 내려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린 아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각인됐다. 그리고 1983년, 서울 여의도 KBS 건물 담벼락에 이산가족 찾기 벽보가 빼곡히 붙었다. 잃어버린 가족의 사연들이 소리없는 아우성을 이뤘다. 스물여덟 안규철(사진)의 머리에 강렬하게 남은 이미지다.

안규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전
제 할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그리움이라는 다리로 연대 모색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안규철-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의 관전 포인트는 예순 살 개념미술가의 머리 속 두 이미지가 어떻게 구현됐는지, 그리고 5개월간 이 전시장을 찾을 수십만 관객이 이 이미지를 어떻게 완성할지다. 전시장 입구에는 9개의 동심원으로 이뤄진 흰 연못이 있고, 금붕어 아홉 마리가 저마다의 원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30일 오전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이곳 연못에 들어가 금붕어를 돌보고 있었다. 맞은편 업라이트 피아노는 조율사가 와서 매만졌다. 피아니스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와서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연주하고, 조율사는 매일 피아노의 해머(건반을 누르면 피아노 선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부품)를 하나씩 빼 간다. 11월 26일이면 피아노는 거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이후 다시 하루 한 음씩 소리를 회복해 내년 2월 6일이면 복원된다.

 전시장 한가운데 흰 골방엔 온라인(ill.ahnkyuchul.com)으로 신청한 참가자가 들어가 꼬박 한 시간을 앉아 카프카의 『성 』, 이상의 『날개』, 김승옥의 『무진기행』 등을 펜으로 옮겨 적었다. 다른 관객들은 먼발치서 그의 뒷모습을 보거나, 방 밖으로 중계되는 그의 글씨 쓰는 손을 본다. 이곳에서의 내밀하고 진지한 작업 결과물은 전시가 끝난 뒤 한정판 책으로 묶여 참가자들에게 우송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뒷모습을 관객 1000명의 책으로 되살리는 프로젝트다.

 금붕어도, 피아니스트와 조율사도, 필경사도, 전시장의 생물들은 모두 각자의 공간에서 제 할 일만을 한다. 그 외로움의 끝에서 만나는 건 8600장의 메모지가 빼곡히 붙은 1400×520㎝의 벽이다. 관객들이 잃어버린 것, 그리워하는 것, 부재하는 것의 이름을 적으며 덮어 나가는 이 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단어는 이렇다. ‘어머니, 아버지, 나, 스무 살, 너, 어제, 할머니, 화목했던 가족, 뜨거웠던 시절….’ 각자도생하는 우리지만 그리움의 빛깔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각각의 계층과 세대로 흩어진 공동체에서 우린 어떤 연대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가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그리움, 글씨를 배우던 어린 시절처럼 집중해 쓰는 순수한 모습이 다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불(51) 개인전에 이은 한국 중진 미술가 지원 전시다. 조각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거부하고 시인처럼 종이에 연필로 작업해 온 이 개념미술가가 국립미술관의 큰 전시 공간과 대기업의 전시 지원금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미술계의 관심사였다. 안규철은 익명의 관객들과 느슨한 연대를 이루는 겸허한 작업으로 그 궁금증에 답했다. 내년 2월 14일까지. 4000원. 02-3701-9500.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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