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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하복에 젖은 폴크스바겐 ‘위험한 질주’하다 사고

폴크스바겐은 2차 대전 때 폐허가 된 공장을 되살려 비틀을 생산했다. 사진은 1954년 6월, 서독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한 비틀 공장. 이곳에서 당시에만 하루 900여 대의 차를 생산했다. 오른쪽은 폴크스바겐그룹의 주요 자동차 브랜드. 폴크스바겐·아우디·포르셰·람보르기니·벤틀리(위쪽부터) [AP=뉴시스]


점입가경에 일파만파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에서 폴크스바겐이 일부 디젤 차종의 배출가스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의 상황은 하루 앞을 예측하기 힘들 만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폴크스바겐 CEO 마르틴 빈터코른은 사건이 터진 직후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으나 며칠 버티지 못하고 23일 사임했다.


폴크스바겐그룹은 폴크스바겐·아우디·벤틀리·부가티·포르셰·람보르기니·두카티(모터사이클)·스카니아(트럭) 등 12개 브랜드를 거느린 유럽 최대의 자동차 회사다. 폴크스바겐그룹은 최근 고속성장을 거듭해 왔다. 지난해 판매는 1000만 대 벽을 돌파했다. 37년 창사 이래 최초다. 도요타에 이어 세계 2위로 올라섰다.


올해 상반기에만 판매 504만 대, 매출 1088억 유로를 기록했다. 특히 영업이익이 70억 유로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나 늘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폴크스바겐그룹은 올해 세계 1위로 올라설 참이었는데 이번 ‘디젤 게이트’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폴크스바겐은 어떤 회사일까. 시작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자동차 업계에 “국민 누구나 살 수 있는 소형차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목표는 아주 구체적이었다. 어른 둘과 자녀 셋을 태우고 시속 60마일로 달릴 수 있되 추운 겨울에도 시동이 잘 걸려야 했다.


히틀러가 내건 조건은 당시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했다. 하지만 천재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포르셰는 공랭식 엔진을 꽁무니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소형차를 설계했다. 히틀러는 독일노동전선에 이 프로젝트를 맡겼다.


38년 6월, 국민차(독일어로 폴크스바겐) 발표 행사가 열렸다. 현재 본사와 공장 및 자동차 인도장, 박물관이 자리한 독일 볼프스부르크에서였다. 30만 대 이상이 예약됐다. 그러나 첫 차 출고를 한 달 앞둔 39년 9월,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비틀(당시 이름은 독어로 ‘기쁨의 힘’의 이니셜을 딴 KdF)은 곧장 군용차로 개조돼 전장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났다. 독일은 폐허가 됐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폴크스바겐 공장은 다시 가동됐다. 폴크스바겐은 98년 단종시킬 때까지 비틀을 2200만 대 팔았다.


폴크스바겐이 처음부터 경쟁력 있는 회사는 아니었다. 60년대가 끝나가도록 라인업은 비틀과 가지치기 모델이 전부였다. 혁신의 열쇠는 폴크스바겐이 64년 인수한 아우디(당시엔 아우토우니온)가 쥐고 있었다. 소형차에 유리한 수랭식 엔진과 앞바퀴 굴림 기술이 있었다.


폴크스바겐은 아우디의 두 가지 기술을 활용해 비틀의 후계 모델 개발에 나섰다. 73년 파사트를 시작으로 골프·폴로 등을 잇따라 선보이면서 대중차 브랜드로서 입지를 다졌다. 폴크스바겐을 지금의 덩치로 키운 주인공은 페르디난트 카를 피에히였다. 그는 비틀을 설계해 폴크스바겐의 시작을 이끌었던 포르셰의 외손자다.


피에히는 37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피에히는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작품으로 경주차 엔진을 설계할 만큼 실력이 빼어났다. 졸업 후 그는 외할아버지의 회사 포르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외할아버지처럼 뛰어난 자동차 엔지니어였다. 1000마력 이상을 내는 917 경주차를 개발해 포르셰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외골수였다. 그 때문에 회사와 가문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다. 71년 포르셰와 피에히 가문은 회사 경영에서 모두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이때 피에히도 포르셰를 나왔다.


이후 피에히는 다임러(벤츠)를 거쳐 72년 아우디의 개발 담당으로 옮겼다. 아우디에서 그는 TDI(터보 디젤 직분사) 엔진과 사륜구동(콰트로 시스템) 승용차, 알루미늄 차체 등 수많은 기술혁신을 이끌었다. 92년 말, 수익성 악화로 구조조정 0순위에 꼽힌 폴크스바겐은 피에히를 새 회장으로 임명했다. 피에히의 폴크스바겐 시대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회사의 체질개선에 나섰다. 생산비용을 줄였고 신차 전략을 다시 짰다. 임금도 16~20% 깎았다. 대신 주 4일제를 도입했다. 당시 그의 별명은 ‘불도저 회장’이었다. 아울러 98년 벤틀리와 람보르기니, 부가티, 2000년 스코다, 2008년 스카니아, 2011년 만과 네오플란, 2012년 두카티를 차례로 사들여 폴크스바겐그룹의 덩치를 한껏 키웠다.


2002년 그는 폴크스바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회사와 노조 측 인사로 반반씩 구성된 감독이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폴크스바겐그룹을 실질적으로 통치해 왔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피에히의 시대는 4월 15일 막을 내렸다. 감독이사회의 운영위원회 6명이 투표를 통해 5대 1로 피에히의 퇴진에 찬성했다. 마르틴 빈터코른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마르틴 빈터코른은 피에히가 폴크스바겐 회장 취임 당시 품질보증 파트의 이사였다. 피에히는 후계자가 너무 크면 돌연 견제에 나섰다. 피에히는 올 초 “빈터코른과 거리를 두며 새 CEO를 찾고 있다”고 언론에 밝혔다가 역풍을 맞았다. 그러나 막후 실세와 파워게임에서 이긴 빈터코른 또한 5개월 만에 회장 자리를 내놓게 됐다.


폴크스바겐그룹은 전 세계에 60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매주 4만1000대의 차를 만들어 153개국에서 파는 공룡 기업이다. 니더작센주가 지분의 9%를 쥐고 있어 공기업의 성격도 있다. 정치권과 이해관계도 얽혀 있다. 눈 밖에 난 이는 반드시 제거하는 피에히의 철권통치로 성장해 오면서 독일인의 장기인 토론보단 상명하복 문화가 뿌리내렸다.


미국은 폴크스바겐그룹에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60년대 폴크스바겐은 미국 수입차 시장에서 부동의 1위였다. 그러나 시련도 여러 차례 겪었다. 80년대 아우디의 급발진 의심 사고, 90년대 멕시코 공장에서 만든 골프의 불량 문제로 브랜드 철수설마저 나왔다.


현재 폴크스바겐그룹에 미국은 ‘마지막 카드’다. 폴크스바겐그룹은 세계 1위가 예정보다 빨리 가시화되고 신흥국 판매가 줄면서 미국에 주목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풀뿌리 단계인 디젤 시장을 노렸다. 미국에서는 휘발유와 경유(디젤) 가격이 큰 차이가 없다. 환경오염이 덜한 휘발유차가 전체 판매의 94%를 차지하는 이유다. 더구나 미국의 환경 규제는 유럽보다 까다롭다.


미국의 환경 규제를 맞추기 위해선 배출가스 저감장치가 필요했다. 디젤 엔진의 문제는 저감장치를 작동시키면 주행 성능과 연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판매가 저조한 이유다. 폴크스바겐은 기술력으로 이를 극복했다고 하면서 ‘클린 디젤’을 앞세웠다. 디젤 엔진을 얹은 파사트와 골프 등으로 기네스 연비 세계신기록을 연거푸 경신했다고 알렸다. 하지만 폴크스바겐의 미국 내 판매는 연간 60만 대에 불과했다. 올해 1∼8월 미국 시장 점유율은 3.5%에 그쳤다. 현대·기아자동차(8.1%)보다 낮다. 업계에서는 폴크스바겐이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실험실에서만 저감장치를 작동시키고 일반 도로에서는 멈추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소비자들은 폴크스바겐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한 번 마음이 떠난 소비자를 다시 붙잡기는 어렵다. 회사의 존망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다.


 


 


김기범 객원기자·로드테스트 편집장?ceo@roadte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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