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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달인 구웨이쥔 ‘여성 외교’ 실력도 발군

1947년 10월 펑위샹(馮玉祥)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콜럼비아대학의 중국 유학생들. 구웨이쥔은 1910년 탕샤오이의 방문 때와 비슷했다는 회고를 남겼다. [사진 김명호]



지난 세기 말,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짓궂은 구술을 많이 남겼다. “수 십 년 전, 중국인들의 남녀관계가 보수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이다. 당시 베이핑(北平·베이징)의 남녀관계는 복잡했다. 고관대작의 부인들 중에 애인 없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인간의 얼굴에는 직업과 지위라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그것만 벗겨내면 일반 동물과 다를 게 없다”며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과의 일화를 거론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45-

구웨이쥔은 장쉐량보다 열 두 살 위였다. 장쉐량이 가깝게 지내던 여인이 맘에 들었다. 하루는 “너만 재미보지 말고 내게도 소개해 달라”고 애걸했다. “몇 번 보다 보면 그게 그거”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모른 체 할 테니 재주껏 해보라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구웨이쥔은 뛰어난 외교관다웠다. 얼굴이 두껍고 여자 홀리는 솜씨가 뛰어났다. 보답할 줄도 알았다. 친하게 지내던 여인들을 장쉐량에게 소개시켜줬다. 그 것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구웨이쥔은 네 번 결혼했다. 그 중 한 명이 중국 사교계에 명성을 떨쳤다. 장쉐량은 이 여인의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구웨이쥔이 도망가 있을 때 그 부인은 베이징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구웨이쥔의 소식이 궁금해 찾아 갔더니 내게 추파를 던졌다. 나보다 나이가 두 배 가까이 되는 여인이었다. 그날 나는 죽는 줄 알았다. 그 후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장쉐량은 그날의 부인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암시는 줬다. “첫 번째 부인은 본 적도 없고, 두 번째 부인인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의 딸은 보기 드물게 단정한 여인이었다. 마지막 부인도 아니다.” 이런 말도 했다. “내 친구 아들 중에는 구웨이쥔과 똑같이 생긴 애도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주미 공사 시절, 외교부장 취임을 앞두고 일시 귀국한 구웨이쥔(앞줄 가운데). 1922년 5월 상하이. [사진 김명호]



구웨이쥔은 1888년 1월말, 상하이 병기창 재정주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머니는 이 손자를 유난히 예뻐했다. 옆집에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 “관운이 성하고 장수할 팔자”라는 말을 듣자 기분이 좋았다. 틈만 나면 상하이의 점집을 순례하다시피 했다. 가는 곳마다 점괘가 비슷했다. 열 두 살 때 학질이 걸리자 불안했다. 명의(名醫) 장샹윈(張?雲·장양운)을 찾아가 손자의 사주를 내밀었다. “네 손녀와 정혼하자.” 장샹윈은 사주 풀이에 일가견이 있었다. 한참 들여다 보더니 군 말없이 수락했다. “어릴 때 병마에 시달리겠지만 별거 아니다. 멀리 떠날수록 좋다. 처갓집 덕을 많이 볼 사주다.”



장샹윈은 손녀와 정혼한 구웨이쥔을 정성껏 치료했다. 효과가 없었다. 할머니는 당황했다. 미래의 사돈에게 정중히 제의했다. “웨이쥔을 멀리 보내자. 멀면 멀수록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왕이면 미국 유학을 보내고 싶다. 비용은 반씩 부담하자.” 장샹윈은 지혜로운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구웨이쥔은 태평양을 건넜다. 1904년, 열 여섯 살 때였다. 이듬해 가을 콜럼비아대학에 무난히 입학했다. 대학생활은 화려했다. 학보를 발간하고, 뉴욕타임즈에 실린 중국 관련기사를 번역해 본국에 보냈다. 유학생회 회장에 출마했을 때도 몰표를 얻었다. 1900년, 10여명에 불과했던 중국인 유학생이 500명을 돌파했을 때였다.



유학생은 여러 부류가 있었다. 공부 외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을 문사파(文士派), 외국 것은 무조건 좋다는 학생은 유외파(留外派), 몰려 다니며 놀기에 열중하는 유학생은 류외파(流外派), 몸값 올리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학생은 명예파(名譽派) 소리를 들을 때였다. 구웨이쥔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석사 과정 입학을 앞두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잠시 다녀가라는 할머니의 전보를 받고 짚히는 바가 있었다. 할머니의 분부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장샹윈의 손녀와 혼례를 마쳤다. 신부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했다.



친구의 소개로 망명 중이던 쑨원(孫文·손문)을 만났다. 남에게 말은 안 했지만 허황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진한 아버지가 큰집을 마련하고, 넓은 땅을 매입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런가 보다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을, 그것도 우연히 만나는 바람에, 상상도 못했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인생이다. 조선 땅에서 탕샤오이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구웨이쥔과 탕샤오이의 만남도 우연이었다.



1910년 1월, 청나라 정부는 만주총독 탕샤오이를 미국에 파견했다. 탕샤오이는 만나고 싶은 유학생 명단을 외교부에 건넸다. “이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라. 열흘 간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싶다.” 명단에 구웨이쥔의 이름이 빠질 리 없었다. 초청 받은 유학생들은 구웨이쥔을 대표로 선출했다.



탕샤오이가 베푼 만찬에서 구웨이쥔은 환영사를 했다. 탕샤오위는 대학 후배의 연설에 만족했다. 프린스턴 대학 총장 윌슨(8년 후 28대 대통령에 취임)과 만날 때 구웨이쥔을 데리고 갔다. 구웨이쥔은 윌슨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계속>



 



김명호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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