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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게 삶, 길이 있어 가는 게 아니다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한 청년이 있다. 20대 중반에 고졸 기능공. 얼마 전 한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지방에 있는 공장 합숙소에 묵으면서 수습을 시작했다. 월급은 100만 원 남짓. 3개월 수습기간이 지나면 150만 원쯤 받을 수 있단다. 근무시간은 꽤 길었다. 하루 열두세 시간은 기본이고 토요일 근무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첫 직장이니 뭐든 배우는 자세로 임했고, 일단은 자립이 급선무였던 터라 불평 없이 잘 참아냈다. 근데, 얼마 전 수습기간 세 달도 채우기 전에 해고를 당했다.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것이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그렇게 금방 ‘짜를’ 거면 대체 왜 뽑은 거지? 헐값에 잠깐 부려먹고는 확 내다버린 느낌이었다.



[길 위의 인문학] 길에서 만난 멘토

이 청년은 나의 조카다. 나 자신은 평생 백수로 지낸 터라 구조조정이니 정리해고니 하는 말을 간접적으로만 체험해왔는데, 조카 덕분에 노동현장의 열악함을 생생하게 엿보게 되었다. 마음이 크게 상하지 않았을까 싶어 격려차 만났는데, 녀석은 의외로 담담했다. 주변에 워낙 백수가 많기도 하지만, 일은 많고 월급은 적은데, 그렇다고 첫 직장을 금방 때려치울 수도 없던 차에 ‘짤리게’ 되니 한편으론 속이 후련했단다.



인건비 몇 푼 아끼려고 제멋대로 쓰다 버린 회사와 기대에 맞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직장에 임한 청년. 자존심의 차원에서 보자면 후자의 승리다. 젊다는 게 참 좋구나, 싶어 흐뭇했는데, 그 다음 반응이 더 뜻밖이었다. 직장을 구하려고 서두를 줄 알았더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을 하고 싶단다. 그것도 해외여행을. 돈이 좀 들긴 하지만 그래도 꼭 가고 싶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세대는 우리와는 아주 다른 감각과 신체성을 지녔다는 것을. 거침없이 길 위에 나서고 가볍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희노애락의 파노라마 원하는 게 생명하긴 대하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칠두령도 그랬다.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사농공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마이너들이었다. 그런 처지면 신분적 열등감에 몸부림칠 것 같은데, 그들은 오히려 반대였다. 그들은 그 어디에도 귀속될 생각이 없었다. 각자 자기만의 공부-표창·활쏘기·돌팔매 등-를 익힌 다음 거리낌없이 길 위에 나섰다. 길이야말로 그들에겐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다. 벗을 만나고 라이벌과 맞장 뜨고, 웃고 떠들고 싸우고. 그들은 길에 내몰린 약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길 위에 나선 ‘진짜 사나이’였다. 처음엔 그들이 아주 특별한 존재처럼 보였는데, 몇 번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망과 행로야말로 모든 청춘, 아니 모든 세대의 ‘원초적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정규직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심일까? 안정된 직장에서 평생이 보장되는 삶을 진짜로 원할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몸은 그런 식의 안정을 격렬히 거부한다. 생명은 운동과 순환을 원한다. 발산과 수렴, 상생과 상극, 노동과 휴식, 사랑과 미움 등등. 한마디로 희노애락의 파노라마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길 위에 나서야 한다. 하긴 인생 자체가 길이 아닌가.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12세기 스콜라철학자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고향을 떠나고 익숙한 데서 멀어지는 것이 곧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돈·노동이 인간의 본성·목표일 순 없어하지만 우리 시대는 하도 정규직 타령을 듣다 보니 그것이 마치 삶의 척도인 양 착각이 일어난다. 경제적 자립은 중요하다. 하지만 화폐와 노동이 인간의 본성이거나 목표일 수는 없다. 삶의 목표는 삶 그 자체일 뿐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마치 정규직이 궁극의 과제인 것처럼 말해진다. 당연히 오산이다. 거기에서 오는 모순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급 정규직을 얻은 이들은 연봉의 대가로 소외와 공허에 시달리고, 얻지 못한 이들은 거기에 집착하느라 삶 전체를 방기해버린다. 그러다 보니 회사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데만 골몰하고, 직원은 자신의 노동을 오직 연봉으로만 환산해 버린다. 그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노동과 주체, 직원과 회사 등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완전히 실종된다.



내 조카가 겪은 것도 그런 케이스다. 회사의 사정상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고,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기본기는 지켜야 한다. 첫 직장을 그런 식으로 겪어야 하는 청년의 입장 같은 것 말이다. 그 정도의 ‘역지사지’가 불가능하다면 그 회사는 이미 위험하다. 그렇게 해서 부를 증식하기도 어렵지만, 그렇게 축적된 부는 각종 갈등의 원천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참 이상한 노릇이다. 위아래 모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과는 갈등폭발이라니. 마치 “불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꼴이 아닌가.



솔직히 직장인들의 로망은 여행이다. 최고경영자(CEO)들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청년도 그렇지만 중년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모든 사람은 길 위에 나서기를 열망한다. 평생직장도 거의 없지만 평생 직장을 다니겠다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한다. 미래산업은 오직 관광사업만 남게 되지 않을까. 예컨대, 중국인 유커들이 한국으로 흘러오면 그들과 관련된 서비스업에 종사해서 돈을 벌고, 한국인들은 다시 그 돈으로 중국을 가거나 혹은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쉽게 말해, 여행자가 되거나 가이드가 되거나. 그것이 자본의 획책이든 본성의 발현이든 앞으로 이런 흐름이 가속화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출발점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정규직을 위한 스펙이 아니라 여행의 지도다. 노동과 휴식, 정주와 유목, 만남과 헤어짐을 동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지도. 언제든 길 위에 나서서 삶의 형식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는 지도.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잘리자마자 여행을 하고 싶었다는 조카에게 기꺼이 노잣돈을 보태준 것도 이런 맥락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렇게 길을 갈망하는 청년들에게 두 명의 멘토를 추천하고 싶다. 장자와 조르바가 그들이다.



장자가 보기에 세상은 카오스요 난세다. 당연히 삶은 더럽고 괴롭다. 그렇다고 피할 방법은 없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것이 장자의 출발점이다. 그럼 그 다음엔? “아! 사물들은 본래 서로 연루되어 있구나. 이로움과 해로움은 서로를 불러들이는구나”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 이것을 얻으면 저것을 잃는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을 조율하는 삶의 기예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양생의 도(道)다. ‘정기신(精氣神)’을 보존하고 본성을 잃지 않는 ‘자기배려’의 윤리. 그럴 때 비로소 낯선 세상과 거리낌없이 맞장을 뜰 수 있다. 또 그 마주침 속에서 기꺼이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 “명예도 비난도 없이,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시절인연에 따라 변할 뿐 한 가지만 고집하지 않는다.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오며 조화를 도량으로 삼는다.”(이희경 풀어읽음, 『낭송장자』) 양생술과 변용력. 이것만 있다면 언제든 길 위에 나설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여기’한편, 조르바는 60대 후반의 노인이다. 평생을 길 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국가나 신, 가족 등 그 어떤 초월적 척도나 규범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가 터득한 이치는 간단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여기’라는 것.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그는 사랑의 화신이자 노동의 달인이다. 사랑하되 소유욕에 빠지지 않고, 노동하되 화폐에 종속되지 않는다. 소유와 소외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현존성’의 원동력이리라.



우리 시대는 청년들에게 꿈과 열정을 촉구한다.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고. 성공하면 저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유를 향한 비상이 아니라 현란하고 위태로운 게임일 뿐이다. 삶이 온통 화폐로 환원되는 머니 게임. 이 게임에선 사랑은 지독한 소유욕을, 노동은 끔찍한 소외감을 야기할 뿐이다. 하여, 그것은 결코 삶의 지도가 될 수 없다. 단언컨대, 인간은 성공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정규직을 위해 태어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또 노후대책을 위해 청춘을 바쳐야 한다면 그건 너무 허망하다. 그러면? 길 위에 나서기 위해서다. 오직 두 발에 의지하여 자신만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다. 그 길에는 목적지가 없다. 매순간이 곧 삶의 전부다. 요컨대,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된다. 장자가 그렇고, 조르바가 그렇듯이.



 



고미숙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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