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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탄 녜웨이핑, 구급차 불러 놓고 150명과 맞짱

1991년 12월 KBS 바둑대축제에서 서능욱 프로가 9단 승단을 기념해 111명을 상대로 다면기를 하고 있다. [한국기원]


1990년 서능욱 9단은 9단 승단 기념으로 바둑을 두었다. 모두 111명과 두었다. 소위 다면기다. 기념할 만한 자리에서 프로가 많은 팬들과 만나고 싶을 때 다면기는 좋은 수단이다. 2014년 9월에도 다면기 행사가 있었다. 서울의 ‘차 없는 날’ 행사에서 프로 100명이 아마추어 1004명과 다면기를 했다. 프로 1명이 아마추어 10명과 두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Fields)상은 4년에 한 번 수여된다. 4년마다 한 번 열리는 세계 수학자대회에서다. 수학과 관련한 부대행사도 많이 열리는데 2010년 인도 대회에서는 체스 다면기를 열었다. 2014년 서울 대회에서는 바둑 다면기를 열어 많은 수학자들이 직접 다면기에 참여했다. 재미있는 것은 다면기에 대한 이해. 기사들은 다면기를 별 거 아니라고 보았는데 반해, 수학자들은 바둑의 다면기를 신기하게 여겼다.


 

1994년 서울 88체육관에서 120명과 다면기를 해 기네스북에 오른 김희중 기사. 왼 손에 백돌을 한줌 가득 담고 있다. 일일이 돌 통에 손을 넣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150명과의 대결이 세계 최고 기록중국의 바둑 영웅 녜웨이핑(?衛平) 9단도 150명의 아마추어와 다면기를 둔 적이 있었다. 아마도 세계 기록일 것이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두었고 행사 보조원이 뒤에서 밀어 주었다. 급할 때 호흡에 도움을 줄 산소통도 옆에 두었다. 그는 심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이 좋은 기사라도 100명이나 되는 아마추어와 동시에 두려면 주의해야 한다. 구급차를 불러놓아야 한다. 1995년 김희중 9단이 88체육관에서 120명과 다면기를 둘 때에도 구급차를 대기시켰다.


프로는 돌을 한 손에 한 웅큼 쥐고 걸으면서 판마다 돌을 하나씩 놓아간다. 멀리서 보면 돌을 주르륵 놓아간다고 여길 정도의 속도다. 하지만 점점 느려진다. 두다 보면 손가락과 손목은 물론이고 어깨와 다리까지 무리가 간다. 위험한 노동이다.


동선(動線)을 줄이기 위해 아마추어의 자리를 둥글게 배치하므로 프로는 끊임없이 돌아야 한다. 그런데 돌고 돌다 보면 정신이 어지러울 때도 있다. 대국이 끝난 판은 진행요원이 빨리 치워 동선을 줄여주어야 한다. 사실 10명도 힘들다. 두세 시간 왔다갔다 돌아다녀 보라. 운동량도 상당하다. 힘이 든다고 해서 불리한가? 그건 아닌 듯하다.


체스 배운 날 지역 챔피언 꺾은 조훈현1959년 4월 일본기원은 미국 바둑협회의 초청을 받아 이와모토 가오루(岩本薰) 8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이와모토는 독일과 브라질 등에 자비로 바둑회관을 짓는 등 바둑의 세계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 이와모토는 뉴욕 바둑클럽을 방문했는데 클럽 회원 벤 켄(Ben Ken)이 14명의 아마추어와 동시 대국을 제안했다. 이것이 바둑 최초의 다면기였다. 체스의 경우 다면기는 보편화된 지도 방법이었지만 바둑에선 그때까지 없었다.


프로의 승률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70%는 넘을 것이다. 95년 김희중 9단은 95승 25패를 기록했다. 많은 상대와 두면 프로가 매우 불리할 것 같은데, 약간은 이상도 하다. 프로가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까지 아마추어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생기는 반면, 프로는 한 수에 1초도 생각지 않고 두어가는데!


이유가 있다. 프로들은 모양만 일별해도 급소를 찾을 수 있다. 바둑은 패턴의 놀이. 중요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바둑은 세간의 이해와 달리 생각해서 하는 놀이가 아니다. 조훈현 9단이 80년대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어느 도시의 체스 챔피언과 체스 게임을 했다. 조훈현은 그날 체스를 막 배운 상태였다. 그런데 그 챔피언을 첫 판에 이겨버렸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다. 조훈현은 “배울 때 눈에 잡아 두었던 것이 우연히 체스판에 등장했다”고 겸손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체스의 핵심 패턴을 직관적으로나마 감 잡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프로의 수준에서는 한 눈에 급소가 잡힌다. 계산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모양으로 수를 읽는다. 계산과 형세 판단, 급소 파악을 동시에 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 일별해서 한 눈에 전체 국세가 눈에 잡히는데, 그건 프로의 수준이 되면 누구나 가능하다.


다른 이유도 있다. 프로가 돌아와 둘 차례가 되면 아마추어는 착점해야 한다는 강박에 잡힌다. 프로는 척척 두어가는데 자신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초조감을 피할 수 없다. 프로의 자신감은 아마추어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자신감은 승부의 큰 자산. 여하튼 아마추어는 충분한 수읽기가 안 된 상태에서 착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점도 프로의 승률을 높인다.


또 하나는 치수 문제다. 주최 측은 아마추어의 실력을 일일이 알 수 없다. 그래서 아마추어에게 기준을 준다. 하지만 아마추어들은 대개 돌을 적게 놓고 승부를 해보고 싶어 한다. 4점 치수라면 돌을 3개만 놓고 싶다. 그 결과 치수부터 이미 아마추어에게 불리한 경우가 적지 않다.


프로가 조심할 것도 있다. 체력 소진도 적이지만 가끔 승부에 끈질긴 아마추어가 있다. 그런 아마추어들은 던져야 할 바둑도 끝까지 두고자 남아 있어 프로를 피곤하게 한다. 승부 기질은 반상에 다 드러나니 프로는 상대의 완고한 기운에 그만 지친다.


프로도 작전을 세울 때가 있다. 이길 바둑과 질 바둑을 애초에 구별하는 것이 그것이다. 두다 보면 곧 알 수 있다.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분들은 애초에 돌을 적게 놓기에 스스로 불리한 입장에 서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이 분들에게는 이기기 쉽고, 그 반대는 이기기가 힘들다.


 

기보 백1은 형태의 급소. 반대로 흑이 둔다면 흑도 백1 자리에 두는 것이 좋다.


다면기의 비결은 형상의 패턴화다면기에 비결은 없다. 있다면 바둑의 본질을 살리는 방식을 사용할 뿐이다. 프로 수준에서는 뭐든지 갖고 놀 수 있다. 턱턱 두어가는 것으로 족하다. 기보는 여섯 점 접바둑의 한 장면. 백1은 형태의 급소. 이렇게 급소만 찔러도 흑은 아프고 착수의 빠른 속도 또한 흑의 심중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몇 명과 두면 편하게 진행할 수 있을까. 작은 모임에선 서너 명 정도가 좋다. 네 명이 넘어가면 만만찮다. 인류학에서도 말한다. 세 명이 모이면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다섯 명이 되면 대화는 나뉘어진다. 주역에도 재밌는 효사가 있다. 세 명이 가면 한 명을 잃지만 혼자 가면 친구를 얻는다(三人行 則損一人 一人行 則得其友).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인터넷으로 하는 다면기가 오히려 어렵다는 점이다. 화면이 순간순간 바뀌기 때문에 반상이 다소 어지럽게 다가온다. 그와 달리 바둑판 사이를 걸을 때엔 여유가 있다. 언제나 여유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것.


중국 아마 고수는 눈 가리고 다면기프로들은 민감하다. 그렇게 빨리 두어도 돌 하나 고쳐진 것이 있으면 프로들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난기 많은 대국자가 슬쩍 돌을 두 개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보자마자 이상한 낌새를 챈다.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곧 안다. 그렇다면 의문이 있다. 그 정도로 모든 바둑을 기억하고 민감하다면 눈을 감고서도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걸까. 사실 이는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는 문제다. 고사(故事)도 있다. 당나라 현종 때의 국수 왕적신(王積新)이 현종의 몽진을 따라가다가 그만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 그래 하룻밤 유숙하는데 주인 할머니와 며느리가 밤중에 바둑을 대화로 두더라는 이야기. “나는 여기 두었다.” “저는 여기 두었어요.” 그리 말이다.


바둑의 속성에 답이 있다. 장기와 비교하면 쉽다. 중국 장기계의 대사형이라 불리는 류다화(柳大華)는 눈을 가리고도 척척 둔다. 그의 기록은 1대19였다. 하지만 바둑은 두세 명은 고사하고 1대1조차도 종국까지 두기가 쉽지 않다.


이유가 있다. 장기는 수순이 진행될수록 말의 수가 적어져서 기억하기 쉽다. 바둑은 다르다. 반상에 점(点, 돌 놓는 자리)이 361개나 될 뿐 아니라 둘수록 돌이 많아져 변화는 더욱 복잡해진다.


하지만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2년 11월 중국의 아마추어 강자 바오윈(鮑云)은 국제 바둑문화절에서 눈을 가리고 1대2의 대국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의 기록은 1대4였다면서 “동시에 더 많은 사람과 두어도 전혀 바쁘지 않다”고 자신만만해했다.


바오윈은 “눈을 가리고 대국하면 머릿속에 쾌속 사진기가 있는 것 같다. 아주 빨리 대국 상황이 자세하게 떠오른다. 머릿속이 환히 열려 있는 느낌”이라 했다. 또 “머릿속의 사진기가 가끔 한 곳에만 집중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한 곳에만 집착하면 대국관이 나빠지고 시야가 좁아져 진다. 이것이 넘어야 할 한계”라고 요령을 설명했다.


바오윈이 식당에서 구리(古力) 9단을 만났을 때다. 그는 아내에게 “이분이 중국 최고의 기사”라고 소개를 했다. 그러자 구리는 “아니다. 바오윈이 최고다. 만약 눈을 가리고 바둑을 둔다면 나는 두 눈(目)만 남길 수 있어 359집이나 질 것”이라고 농담했다. 바둑판은 361개의 점이 있는데, 그 점을 눈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재치 있게 받은 것이다. 눈은 모눈종이의 눈금과 같은 어감이고 뜻이다.


2013년 3월 바오윈은 자비로 100만 위안(한화 약 1억8000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상대를 구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큰소리쳤는데, 한국의 안달훈 9단이 한번 해보겠다고 대응한 적이 있다. 안 9단은 “연습하니까 되더라”고 했다. 아직 성사되지는 않았다.요약하면 다면기는 특별하지 않다. 형상을 패턴화해 노는 것이 바둑 고수의 할 일이라, 다면기는 프로에게 매우 쉬운 놀이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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