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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羅生門·1950)

1 영화 포스터

[영화 속에서]?인간성 회복이 환상 속 믿음일지라도?그 ‘환상’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단편 소설 덤불 속과 나생문을 원작으로 인간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녹인 작품.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기 위해 ‘나생문’ 아래서 만난 세 사람은 산적과 여인, 그리고 사무라이가 얽힌 기묘한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화자에 따라 증언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1951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으로 일본 영화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름을 서구에 알렸다.


‘라쇼몽’에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나생문’ 앞에 모인 세 사람, 법정에서 증언하게 된 세 사람, 사흘 전 살인사건.


‘라쇼몽’은 어떤 진실도 확정짓지 못하는 ‘공허함’을 향해 달려간다. 한 사무라이가 죽임을 당했지만, 그와 대결을 펼친 산적의 말도, 사무라이 아내의 말도, 무당의 몸을 빌려 자기 죽음을 증언하는 사무라이의 말도 모두 진실을 확정하지 못한다. 이 영화로 인해 파생된 ‘라쇼몽 효과’라는 표현처럼,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기억하는 것만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서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영화라거나 포스트모던의 효시와도 같은 작품이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세 사람의 증언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단순히 자기 합리화에 빠진 것이 아니다. 흔히 법정에서의 합리화는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기 위함이지만, 산적도, 아내도, 사무라이도 모두 자신을 스스로 살인범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가 살인범”이라고 말하기 위해 법정에 선다. 덕분에 이 작품은 ‘살인범이 누구일까’를 찾는 장르적 규범을 넘어, 저들이 자신을 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숙고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살인자’란 죄명을 자청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영화의 배경인 헤이안 시대는 기근과 전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나생문 앞에 시체가 쌓였던 시대다. 이 타락한 시대에 사람 하나 죽는 일은 그리 대단한 사건이 되지 못한다. 각자의 명분을 들먹이며 이렇게 살(살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항변이야말로 ‘죽음’을 압도한다. ‘라쇼몽’은 관아에서 벌어진 법정을 세상을 향한 심판대로 확장해 간다.


자기 합리성의 모순과 파괴에 대한 지지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려고 하면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 사회가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유 찾기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라쇼몽’이 얽힌 당대 역사와의 교차점을 강력히 비판하기는 어렵다. 저예산으로 완성된 ‘라쇼몽’을 이해하는 동시대 일본 관객은 극히 드물었고, 구로사와 아키라 (黑澤明)감독은 베니스영화제에 작품이 출품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1950년 개봉된 ‘라쇼몽’은 이듬해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으면서 뒤늦은 유명세를 치렀다.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구인들이 이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영화를 본 서구인들은 자기 합리성의 모순과 파괴, 그리고 영화의 결말인 인간성 회복 의지에 대해 지지를 보냈다.


나무꾼과 승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남자는 살인 현장에 나무꾼도 있었는지 추궁한다. 이 지점에서 ‘4’라는 숫자가 새롭게 등장한다. 나무꾼은 네 번째 진술자다. 사무라이와 산적이 싸우게 되었고, 사무라이는 산적의 칼에 우연히 찔려 죽는다. 사무라이의 증언처럼 명예스러운 자결도 아니었고, 산적의 말처럼 23번의 합을 나눈 결투 끝의 살해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우발적인 ‘해프닝’이었다.


그러나 나무꾼의 말은 신뢰를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현장에 있던 값비싼 단도를 훔쳤기 때문이다. 나무꾼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단도’의 존재 여부를 두고 거짓말을 한다. 영화 말미에는 나생문 뒤편에서 버려진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를 발견한 남자는 아이의 옷가지와 이부자리를 빼앗는다. 나무꾼은 그 행위가 파렴치하다고 지적하지만 남자는 “당신 역시 거짓말쟁이이자 단도를 훔친 도둑”이라며 나을 것 없는 인간임을 환기한다.

4 사무라이와 산적이 결투를 벌이는 장면. 산적은 23번의 합을 벌였다고 거짓 증언한다. [사진=마티]

2 나생문 아래서 만난 낯선 남자와 나무꾼 그리고 승려. 영화 ‘라쇼몽’은 이들의 대화에서 시작해 플래시백으로 진행된다.


버려진 아이는 새 시대 살아야 할 인간나생문 앞에서 관념적인 윤리성을 획득하고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남자가 떠난 후 나무꾼은 버려진 아이를 거둔다. 이 행동을 목격한 승려는 인간을 향한 ‘신뢰’를 회복했다고 말한다. 숫자 4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세 사람 위에 덧붙여진 나무꾼의 네 번째 객관적 진술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나생문’에는 탈락한 세 명의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할 네 번째 인간, 즉 아이가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네 번째 증인 나무꾼은 아이를 돌보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행동과 결단이다.


나생문의 앞쪽은 시체가 쌓이는 죽음의 공간이지만, 뒤편에서 내다보면 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삶이 있다. 그중에는 거짓말하는 인간, 자기 합리화에 빠진 인간이 즐비하지만 한편으로 회심하는 인간, 살아내려고 견디는 인간도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살다(生きる)’라는 동사를 강조하면서 끝내 인간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환상 속의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이 환상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타인을 향한 감수성이 없다면?진실과 공동체는 뜬구름에 불과

3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는 겁탈당한 자기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이 분노와 증오의 눈빛이었다고 증언한다.


울창한 숲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산적이 여자를 겁탈했고 남편(이하 사무라이)은 살해당했다. 수일 후, 관련자가 모두 관아에 잡혀와 취조를 받게 된다. 고인이 된 사무라이의 진술은 무당의 입을 빌린다. 그런데 문제는 산적, 사무라이, 그리고 아내가 진술하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셋 다 모두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묘한 일이다.


물론 셋 모두 자신이 살인한 데에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단다. 아니 정확히 말해 추한 살인이 아니라 아름다운 살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왜일까. 이들은 살인이라는 결과는 너무나 쉽게 인정(심지어 주장)하면서 왜 살인의 이유는 그토록 구구절절 설명하는 걸까.


자신만 챙긴 세 명의 에고이스트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가해지는 오명을 피하려 했던 것이다. 산적은 그 지역에서 악명이 자자한 자신의 평판을 중히 여겼고, 사무라이는 자살로써 명예를 지켰다는 인정을 얻으려 했다. 아내는 불가항력적인 겁탈을 경멸했던 남편을 죽임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을 얻으려 했다. 결국 이 셋은 모두 지극히도 자신만을 위하고 사랑했던 에고이스트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개입된 두 명의 목격자가 있었는데, 숲을 지나는 부부를 보았던 승려와 살인 현장을 발견한 나무꾼이다. 그들은 세 주인공이 나서서 살인자임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며 혼돈에 빠진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한 가지 반전이 일어난다. 나무꾼마저도 지금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는 살인이 벌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살인 현장에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고 말하지만, 그의 진술은 힘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인의 값비싼 단도를 훔쳤다는 사실을 들켰기 때문이다. 자신의 도둑질은 은폐한 목격담, 혹은 그가 주장하는 진실이란 과연 얼마만큼 믿을 만한 것일까.


아기를 안음으로써 이기심 벗어나는 나무꾼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패전국 일본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패전국의 국민이 느끼는 자괴감이 엿보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패전 때문에 모든 국민이 지독한 에고이스트가 되었다고 진단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 구도가 구로사와 감독의 보수성을 드러낸다. 수많은 동아시아인의 삶을 파괴했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처절한 반성, 혹은 군국주의에 방관하거나 열광했던 죄악에 대한 준엄한 자책이 영화에서 조용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처절하게 반성하기보다는 그저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주어진 사실로부터 출발하려 한다. 그러니까, 자신들도 나름 피해자라는 얘기다.


이런 시각으로 영화를 만나면 살인범이지만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세 사람의 상이한 주장이 영 불편하게 들린다. 살인범은 살인범일 뿐이다. 날조된 정당성은 후에 살인 자체를 정당화하게 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살인이 범죄가 아니라는 논리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자기애는 진실과 공동체를 와해한다는 구로사와의 도저한 통찰마저 부정하기는 힘들다. 엔딩은 무척 인상적이다. 낯선 남자, 승려, 그리고 나무꾼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생문 뒤쪽에 아기가 버려진다. 남자는 아기를 감싼 담요와 옷가지들을 훔친다. 그 광경을 보고 나무꾼이 남자를 나무란다. 그러자 남자가 조롱한다. “살인 현장에서 값비싼 단도를 훔쳐서 팔아먹은 너는 뭐가 다른데?” 나무꾼은 저항하지 못하지만 애절한 체념을 담아 말한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가 여섯이나 있소. 하지만 여섯을 키우나 일곱을 키우나 힘들긴 마찬가지요.” 나무꾼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면서 승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며 ‘라쇼몽’은 마무리된다.


남의 아기는 즉 타자일 뿐이다. 나무꾼은 그 ‘아이’라는 타자를 품에 안는다. 바로 이 장면으로 감독은 이기심을 벗어나는 극적인 계기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법이나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것,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말한 ‘타자에 대한 책임’이다. 책임이란 뜻의 ‘리스판서빌러티(responsibility)’는 ‘반응’을 뜻하는 ‘리스폰스(response)’와 ‘할 수 있음’을 뜻하는 ‘어빌리티(ability)’로 구성된 글자다. 결국 책임이란 ‘타인에게 반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법률이나 규범에 대한 의무로, 혹은 주위의 평판 때문에 하는 행동이 사실은 ‘책임’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법과 규범과 평판에 의지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감수성. 이것이 없다면 우리에게 진실과 공동체란 뜬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이 주제를 영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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