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활달했던 사도, 대리청정 후 ‘영조 스트레스’에 조울증

영화 '사도'의 사도세자(유아인). 영화는 왕실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인믈의 드라마로 풀었다. [사진 쇼박스]



사도세자의 죽음은 여러 차례 사극의 소재로 다뤄졌을 만큼 대중의 관심이 큰 역사적 사건이다. 조선 왕실에서 부왕과 왕자가 대립하고 반목한 사례는 많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아비는 아들이 뒤주에 갇혀 있는 동안 살릴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왜 이토록 악화되었는지 해석은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세자에게 정신병적 증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의학으로 분석한 사도세자의 정신세계

이는 문헌을 통해 의학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이 임오화변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다. 혜경궁 홍씨가 말년에 쓴 『한중록』에 대해선 사도세자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기록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렇더라도 『한중록』은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정신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상상해 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 “대리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병이 발작할 때는 궁비와 환시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썼다.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관리하기 위해 『영조실록』 편찬에 적극 개입했다고 한다. 사관이 당대 왕의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기 어려웠을 것이란 점을 감안할 때 ‘천성을 잃고 발작을 일으켰다’는 표현만으로 사도세자의 광증(狂症)을 읽어낼 수 있다.





13세부터 불안 증상, 성인된 후 조울증 사도세자는 영조가 첫 아들을 잃고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다 41세에 얻은 아들이다. 출생 즉시 원자가 됐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됐을 만큼 기대가 컸다. 어렸을 땐 영특했다고 전해진다. 혜경궁 홍씨도 “천성이 크게 너그러우시고 도량이 활달하시며 사람에게 신의가 두터우셔서 아랫사람들에게도 믿음직하게 말씀하시고, 타고난 성질이 침착하고도 무게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썼다. 성군(聖君)의 자질을 지녔다는 의미다.



그러나 영조 24년(1748년), 사도세자가 13세였을 때부터 정신병적 증상을 의심할 수 있는 언행이 기록된다. “소조께서는 날이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 치면, 또 무슨 꾸중이나 나실까 근심하시고 염려하여 일마다 두렵고 겁을 내므로, 사악하고 망령된 생각이 다시 들어 병이 점점 깊어지는 징조가 드러났다” “늦은 밤에 정신이 아득하시어 ‘뇌성보화천존이 보인다’고 하시고 무서워하시며…” 등의 기록은 극심한 불안 증상이나 환시 같은 정신병적 증상으로 볼 수 있다.



20~21세(1755~1756년)에는 우울감, 기분과민성, 흥미 저하, 의욕 저하를 보이며 자기 관리도 소홀히 하는 등 기분 증상으로 인한 기능 저하가 엿보인다. 혜경궁 홍씨는 “문안도 더 드물게 하시고 강연에도 전념하지 못하시며, 마음의 병이시라 늘 신음이 잦아서 병폐하신 모양이니” “병환이 점점 깊어 강연도 더듬으시고…소세(얼굴을 씻고 빗질하는 것)도 단정치 않으셨다”고 기록했다. 자살 행동도 보였다. ‘자살하련다’ ‘아무래도 못살겠다’는 말뿐이 아니었다. 우물로 투신하려는 걸 가까스로 구했다고도 했다.



21세 여름부터는 조증을 보인다. “지나친 행동도 하시며…나인들을 데리고 노시니, 그 내관들이 나팔 불고 북 치는 것까지 했다고 한다.” 고양된 기분은 난폭한 행동으로 이어져 “내관들에게 매질하시는 것이 더하시었다”고 하더니 이듬해엔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당번 내관 김환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나인들에게 효시하시매…사람을 죽이고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나인 여럿이 상하시매…” “순종치 않으면 쳐서 피가 흐르고 살이 터진 후에라도 가까이 하시니 누가 좋아하리요” 같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1761년엔 세자빈에게 바둑판을 던지고, 자신의 아이를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 죽인 기록도 나온다. 나인과 내관도 계속해서 죽였다.



사도세자의 본래 성격은 폭력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폭력 행동은 성격 탓이 아니라 병적인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판단력 저하와 충동성·폭력성은 조증에 합당한 증상이라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1762년 5월, 27세로 사망할 때까지 울증과 조증이 지속되다 호전되고, 또 재발하는 경과를 반복한 듯하다. 망상·환각이 간혹 동반됐지만 지속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조현병(정신분열증) 같은 정신병적 장애보다는 기분장애, 즉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합당한 진단이다. 양극성 장애 환자들에겐 다른 정신질환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생 동안 강박증을 진단받는 경우는 21%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김창윤 교수



옷 입지 못하는 ‘의대병’ 증세도 보여사도세자에게도 강박증에 해당하는 병이 있었다. ‘의대병(衣帶病)’이다. 옷을 입지 못하는 병인 ‘의대병’이 사도세자에게 생긴 건 1757년이다. “의대 병환이야 더욱 형용할 수 없고 이상한 괴질이니, 대처 의대를 한 가지나 입으려 하시면 열 벌이나 이삼십 벌이나 하여 놓으면 귀신인지 무엇인지를 위하여 놓고, 혹 태우기도 하고…시중 드는 이가 조금만 잘못하면 의대를 입지 못하시어 당신이 애쓰시고 사람이 다 상하니, 이 아니 망극한 병환이냐!”



사도세자가 고질적으로 앓은 ‘울화병’, 즉 현대의 진단 분류 체제에서의 양극성 장애는 대리청정 이후 발병해 죽기 4~5년 전부터 심해졌다. 양극성 장애는 주로 청소년기에 시작되는데, 대리청정을 시작했을 때는 14세였다.



우울증이면 침울하고 슬퍼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비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조울증의 우울증’은 무기력하고 멍하고 잠이 많아져 게을러 보인다. 수행력도 떨어져 질책 받고 자책하게 된다. 병을 알아채지 못하고 탓하는 사이 악화되기 십상이다. 무기력하고 의욕 없던 사도세자 역시 대리청정 중 영조에게 많은 질책을 당하면서 나빠졌을 가능성이 크다. 혜경궁 홍씨도 성격이 과격하고 급했던 영조가 세자를 수시로 꾸짖었고 이로 인해 세자가 천성을 잃게 됐다고 썼다.



양극성 장애는 조증 상태가 되어 들뜨면 안하무인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성격장애가 있는 것으로 오인하기 한다. 사도세자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반사회적 성격장애(사이코패스)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지만, 보통 때는 별탈이 없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성격장애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족력이 있는 경우 양극성 장애의 발병 위험은 커진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병을 추정하는 데 있어서도 가족력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자의 혈족 중에도 기분장애를 의심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 영조의 이복형제 중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은 어머니가 사사(賜死)된 후 내성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숙종에게도 미움 받아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실록 곳곳에도 ‘이상한 병’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경종이 반복적으로 호소한 화열이 오르는 증상은 우울증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체 증상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기분장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의 삼년상 상복을 벗고 일주일 만에 죽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병이 있었다면 혜경궁이 자주 병문안을 했을 텐데 그런 기록은 없다. 대신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혜경궁 홍씨의 일기는 영빈 이씨가 죽은 후 갑자기 중단된다. 영빈 이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혜경궁에게 충격이었고, 자살이 영빈 이씨의 유력한 사인이었을 것이란 추론이 나오는 이유다. 단정할 수 없지만 사도세자가 유전적 소인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생모도 우울증 의심 … 가족력 가능성도양극성 장애는 유전적·환경적 요인이 상호작용해 발병하는데, 전문가들은 유병률이 3%를 넘는다고 본다. 유전적 소인을 가진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이 있으면 발병 위험은 커진다. 사도세자 역시 영조와의 성격 차이와 갈등, 반복된 양위 파동과 당쟁 등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양극성 장애가 발현했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수 있다.



당시의 의학이 알지 못했던 양극성 장애는 현재도 조기 발견과 치료가 쉽지 않다. 본인도 알아채기 어렵고 전문가조차 진단하기가 까다롭다.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도 이렇게 표현했다. “증상을 꼭 꼬집어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야말로 양극성 장애에 들어맞는 표현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자료는 제한적이다.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중록』이 상세하게 증상을 기술한 덕에 사도세자의 정신 증상을 현대 정신의학으로 고찰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영조는 훗날 잘못을 뉘우치며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을 되살릴 수는 없으되 혼이나마 달래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 수 없다.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역사를 밝히는 노력을 할 따름이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태그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