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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천재’ 발길 따라 서촌에 핀 이야기꽃·노래꽃

23일 오후 서울 서촌 한옥레지던스 호텔 앞마당에서 아름지기 주최로 열린 ?이상 생일 골목 잔치?에 참석한 소설가 김훈이 ‘내 고향 서울’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호성 객원기자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 단편소설 ‘날개’, 시 ‘오감도’를 발표한 근대 문학가 이상(李箱·본명 김해경·1910~37)이 이곳에 살던 큰아버지에게 세 살 때 입양돼 스물세 살까지 자기 삶의 대부분을 보낸 집터의 일부다. ‘이상의 집’이라고 이름 붙여진 야트막한 기와집은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의 자산으로, 2009년부터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가 관리를 맡아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그의 생일(9월 23일)과 기일(4월 17일)에는 매년 다양한 예술가를 초청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가의 탄생과 죽음을 기려왔다. 지난봄에는 ‘십삼야(十三夜)’라는 주제로 소설가·시인·극작가·설치미술가·영화감독 등 13명이 하루씩 이곳에 머물며 각자의 방식으로 13일간 그를 추억했다.


 

1 23일 밤 ‘이상의 집’ 앞에서 이한철씨의 공연을 즐기는 관객들.


105주년 생일을 맞은 23일에는 좀 색다른 잔치가 열렸다. 지금까지 ‘이상의 집’ 안에서만 열리던 행사가 인근 서촌 일대 골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꾿빠이 이상』을 쓴 소설가 김연수가 4명의 문학가(소설가 김훈·김중혁·한강, 시인 유희경)와 3명의 음악가(강아솔·권나무·이한철)를 초대해 기획했다. 하여 추석을 나흘 앞둔 초가을의 서촌 곳곳은 이 ‘박제된 천재’의 탄생을 축하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래와 수다로 저녁 내내 수런수런했다.


 

2 유희경 시인의 ‘삼청동 기록’ 토크.


단풍나무 아래서 부른 ‘내 사랑 내 곁에’ 오후 6시. ‘이상의 집’ 맞은편에 있는 북유럽 스타일의 카페로 들어갔다. 소설가 김중혁이 태블릿PC를 들고 자신의 단편소설 ‘요요’를 읽고 있었다.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부터 거꾸로 읽는 ‘요요리믹스낭독회’였다. 30여 명의 참석자는 색다른 방식의 소설 읽기를 통해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그곳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또 다른 카페에서는 시인 유희경이 참석자들과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년의 방: 삼청동 기록-2005 봄에서 2008 겨울까지’라는 주제로 자신이 삼청동에 살면서 쓴 시와 직접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10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의 삶과 그에 대한 느낌을 들려주었다.


카페에서 나와 또 다른 행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용재 아키텍츠 +SIDE’라는 이름의 한옥 레지던스 호텔. 아직 잎새가 초록인 단풍나무 아래 마당에는 하얀 모래가 곱게 깔려 있었다. 나무 아래 앉아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 강아솔의 음색이 청아했다. 자신이 만든 노래에 이어 앙코르 곡으로 부른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참석자들의 허밍까지 더해져 근사한 하모니를 이뤘다.


오후 7시 이곳 행사의 주인공은 소설가 김훈이었다. 하얀 라운드 티 위에 넉넉한 셔츠를 걸친 야구모자 차림의 등장만으로도 좌중에는 설렘의 물결이 출렁였다. ‘내 고향 서울’이라는 주제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컹컹거리던 두 마리 백구도 귀를 쫑긋 세웠다.


 

3 장독대 위에서 자신의 시와 소설을 읽고 있는 작가 한강.


김훈 “경복궁 일대는 어릴 적 놀이터”“제 본적은 청운동 112번지입니다. 1948년에 태어났는데, 아버님은 1910년생이세요. 나라가 망한 해에 태어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해에 저를 낳으신 것이죠.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와서는 돈암동에서 살게 됐는데, 경복궁 일대가 다 제 놀이터였어요.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습니다. 선조가 궁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돼 300여 개의 누각에서 거의 동시에 불길이 치솟았지요. 조직적인 방화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제가 보기에 조선시대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대원군이 재건할 때까지 270여 년간 경복궁은 폐허였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허물어진 궁궐을 보면서 서촌, 북촌에 살던 사대부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경복궁은 그 뒤 일제에 의해 헐렸고 6·25 때는 더 많이 파괴됐습니다. 어렸을 때 그런 흔적을 보면서 ‘이 세상이 가건물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엉거주춤하고, 남의 집에 들어가 사는 듯한 불안함.


그런 제가 가장 신뢰할 만한 건물이 남대문이었습니다. 남대문을 보면 ‘우리가 고아가 아니구나’ ‘버림받은 자식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남대문이 불탔습니다. 복원은 했지만 제 고향은 이미 황폐해졌습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작은 한옥들이 생각납니다. 어머님은 아주 경우 바른 ‘서울 깍쟁이’셨는데, 두부 한 모의 크기가 달라졌다며 상인들과 싸울 정도로 됫박 같은 도량형에 엄격하셨죠. 여자 속옷 빨래를 보이게 널었다고 이웃과 다툴 정도의 질서와 합리성이 지배하던 곳이 서울이었습니다. 특히 서촌은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과 문화와 교양과 풍류가 어우러지던,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명절이면 기를 쓰고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갑니다. 제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입니다. 그럼 고향은 어디인가. 논두렁 위가 고향인가. 이것은 서울이 고향인 사람의 슬픔과 고뇌입니다. 문 연 가게도 별로 없는 텅 빈 서울. 그때 저는 이곳을 찾아와 커피 한 잔 들고 천천히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경기도 일산의 집으로 돌아가곤 합니다. 이것이 저의 '귀향'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산부터 한강까지, 존재와 생성이 마주치는 이 공간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고향이라는 것은 곧 인간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4 '이상 생일 골목잔치' 스티커.


“서촌을 문화가 숨쉬는 동네로”오후 8시 다시 ‘이상의 집’ 앞. 마지막 콘서트를 기다리고 있는 참가자들로 거리는 북적였다.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꽤 많이 보였다. 보름달 같은 소쿠리에 가득 담긴 고로케를 하나씩 나눠 주는 표정도, 받아 드는 표정도 다들 넉넉하다.


그런 사람들 중에 건축가 김원의 얼굴이 있었다. ‘이상의 집’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이다. 옥인동에 30년째 살고 있는 그는 요즘에는 아름다운 동네 서촌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서촌은 서울이 역사 도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대단한 곳입니다. 역관, 의관 같은 중인 계급이 이곳에서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영·정조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어요. 게다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도 이 부근입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위인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도 제대로 모르고 이곳에 아파트 재개발이나 하려 하니 정말 큰일입니다.”


올해의 생일잔치가 예년보다 확대된 것에 대해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은 “몇 년 전 북촌의 작은 공간에서 국악 산조 듣기 행사를 진행하면서 ‘문화 동네’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고 문화·예술 전통이 곳곳에 남아 있는 서촌에서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름지기 사옥도 통의동에 마련했다”며 “이런 행사를 통해 한국적 문화가 숨 쉬는 문화 동네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5 작가 이상.


이윽고 이날 마지막 무대에 나선 가수 이한철이 전자기타와 드럼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특히 이상이 남긴 동시 ‘목장’(1936)에 맞춰 만들었다는 곡을 처음 들려주며 이날 생일 잔치의 대미를 장식했다. “송아지는 저마다/ 먼산바래기// 할말이 잇는데두/ 고개 숙이구/ 입을 다물구// 새김질 싸각싸각/ 하다 멈추다// 그래두 어머니가/ 못잊어라구/ 못잊어라구// 가다가 엄매-/ 놀다가두 엄매-// 산에 둥실/ 구름이가구/ 구름이오구// 송아지는 영 영/ 먼산바래기.”


이날 무대 맨 앞줄에 서서 공연을 즐기던 디자이너 김수진(33)씨는 “지인의 SNS를 통해 행사를 알게 됐는데 오랜만에 즐거운 공연을 함께 하게 돼 기분이 좋다”고 활짝 웃었다. ‘이상’이라는 한글 자모를 이용해 만든 포스터 속 얼굴도 함께 웃고 있었다.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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