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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⑪

?일본 군부는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업 재벌과 결탁해 확전의 길로 나섰다. 메이지헌법의 통수권(統帥權) 개념 때문에 일본군에는 황군(皇軍)이란 개념과 민간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위험한 개념이 생겨났다.



히로다 내각은 군부의 위세에 눌려 ‘총리·외무·대장(大藏)·육군·해군’의 다섯 대신이 참석하는 오상회의(五相會議)에서 주요 국책을 결정했는데, 이 오상회의에서 1936년 8월 7일 ‘국책(國策)의 기준’을 작성했다. ‘국책의 기준’은 외부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후 일본을 미친 전쟁으로 몰고 간 기본 국책을 결정한 것이었다. ‘국책의 기준’은 “제국(帝國) 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근본 국책은 외교와 국방 모두 동아(東亞) 대륙에 있어서 제국의 지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남방해양으로 진출해 발전하는 데 있다”고 결정했다. 북방의 중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남방, 즉 미국·영국도 전쟁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국책의 기준’ 원 입안자는 만주사변의 주모자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였다. 그는 1935년 8월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부임해서는 ‘전쟁계획’을 주창하면서 ‘전쟁 지도계획’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육군의 이른바 ‘국방국책(國防國策)’인데 그 골자는 군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군수공업을 일으켜 세계 최종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주국을 중화학공업기지로 만들겠다는 방침은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11- 폐허와 희망

일제가 만주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장개석(蔣介石)이 내부의 공산당을 먼저 격멸한 후 일제와 전면전을 전개하겠다는 ‘선내양외(先內攘外) 방침’에 따라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에게 ‘부저항(不抵抗) 철군’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은 서안까지 날아가 장학량에게 공산당 토벌에 적극 나서라고 요구했지만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을 서안 화청지(華淸池)에 감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공산당 내에서는 장개석 처형 목소리가 높았지만 모택동(毛澤東)은 주은래(周恩來)를 서안으로 파견해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조건으로 오히려 장개석의 석방을 종용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서안사변의 기본적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당초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더욱 반공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반겼다. 그러나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인 장개석은 12월 25일 장학량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귀환하면서 중국인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1937년 1월에는 모택동이 서안에 입성했다. 제2차 국공합작, 즉 항일민족연합전선 결성이 눈앞에 드러나면서 전 중국이 항일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여전히 중국을 얕보고 전쟁 확대에 나섰다. 이런 점에서 중일전쟁 발발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1937년 7월 7일 밤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밤 북경 서남쪽 노구교 부근에서 일본의 천진 주둔군 1여단 1연대 3대대는 이치키 기요나오(一木?直) 소좌의 지휘로 야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노구교 사건에 대해 일본과 중국 양측 모두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측은 한밤중에 몇 발의 탄환이 날아온 뒤 3대대 8중대원 135명 중 한 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중대장 시미즈 세쓰로(淸水節郞) 대위는 병사를 찾으라고 지시했는데 이 병사는 용변을 보러 간 것이어서 곧 복귀했다. 일본 측은 다시 중국군 쪽에서 여러 발의 탄환이 날아왔다고 주장했다. 노구교 사건은 일본군의 공작 결과였다. 만주를 고스란히 내주고도 현상 유지에 바빴던 중국군이 먼저 도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북(華北)의 지배권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제29군장 송철원은 7월 11일 ‘노구교의 인도, 대표자 사과, 책임자 처벌, 항일단체 단속’ 등 일본군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를 종결지으려 했다. 이렇게 ‘노구교 사건’이 국지전으로 끝나려던 바로 그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이를 ‘북지(北支:북중국)사변’으로 부르면서 본토에서 2개 사단을 급파하는 화북(華北) 파병안을 승인하며 확전에 나섰고 북경과 천진을 점령했다. 고노에는 내부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확전이 ‘국내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다. 확전이 일본이 갖고 있는 모든 사태의 해결책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던 언론들도 현지협정 체결 기사는 구석에 조그맣게 게재하면서도 전쟁 선동 기사는 1면부터 여러 면에 걸쳐 대서특필했다. 만주를 손쉽게 점령했던 과거 경험에 마취된 일본의 정계·군부와 언론계는 일본군이 전면전을 전개하면 전 중국을 곧 점령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국제여론을 의식해 전선 불확대 방침을 표명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전선 확대를 추진했다.



중일전쟁은 국민당의 토벌에 쫓기던 공산당을 살린 것은 물론 이후 전 중국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모택동에게 제공해주었다. 일본 수뇌부의 희망과는 달리 일본은 이제 모택동의 말대로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중국 영토를 탈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은 11월에야 항주만(杭州灣)에 대병력을 상륙시켜 겨우 상해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를 빠져나간 군사들은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으로 집결했다. 마쓰이(松井石根)가 이끄는 상해파견군과 제10군이 또다시 상부의 진격명령서도 없이 남경으로 진격하자 참모본부는 부랴부랴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란 명칭을 새로 부과해서 남경 점령을 지시했다.



장개석은 중국군의 자체 역량으로 남경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1월 20일 당생지(唐生智)를 남경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는 한구(漢口)를 임시수도로 삼아 중앙기관을 이전했다. 이와 함께 중경(重慶) 천도를 선언했다. 남경을 점령하더라도 일본군은 종전은커녕 다시 한구와 중경까지 점령해야 했다. 일본군은 공군의 폭격까지 수반한 대공세 끝에 12월 7일 남경 외곽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12월 9일 남경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부터 총공격을 개시해 사흘 후인 13일 남경을 점령했다. 그 이전부터 주변 촌락에서 일본군의 살상행위가 보고됐는데, 남경 점령 후 6주간에 걸쳐 무자비한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 ‘남경학살(南京虐殺)’이었다. 성내(城內)는 주로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가 지휘하는 16사단이 학살의 주역이었다. 학살 규모에 대해 중국 측은 30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의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에서 1938~39년 발간된 『시사연감(時事年鑑)』 등에는 “적방(敵方:중국 측) 유기 사체(遺棄死?) 8만4000, 포로 1만500”이라고 적시하고 있어 일본 측 주장을 따르더라도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천인침의 장본인들은 살인귀·강간귀로 변해버렸다. 남경을 점령했지만 종전(終戰)은 요원했다.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군은 무한삼진(武漢三鎭)으로 불리는 양자강 내륙 유역의 한구(漢口)·무창(武昌)·한양(漢陽)으로 주력부대를 포진시켜 항일을 다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점령한 도시들은 점(點)에 불과했다.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線)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선에 의해 거꾸로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일본 본토에선 연일 승전고가 울려 퍼졌지만 정작 일본군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일본 정계와 군부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일본이 국민정부 수도인 남경(南京)만 함락하면 전 중국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만주국 학습효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 본토는 전혀 달랐다. 중국 점령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일본군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트라우트만의 중재로 장개석의 국민정부와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정부 사이에 강화협상이 전개되어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노에가 느닷없이 중국 측에 ‘배상’을 요구했다. 남경학살까지 자행한 일본에 배상금까지 쥐여주면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트만 조정’이 1938년 1월 15일 결렬된 배경이다. 협상이 결렬된 채 전선이 고착화되자 일본은 드디어 1938년 8월 한구(漢口) 진격 명령을 내렸다. 한구를 점령하면 전 중국을 지배하리라는 망상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한구 진격은 일본군의 전 역량을 동원한 것이었다. 한구 함락 소식에 일본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전국적으로 축하 제등행렬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노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39년 5월 만주 서북부 노몬한에서 소련과 충돌한 것이다. 만주국은 소련 및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몽골인민공화국과 무려 4000㎞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던 소련은 국경선을 새로 획정하지 않고 청나라 때 국경선을 고수했다. 병력 숫자는 일본이 많았지만 중화기는 소련이 우세했다. 소련도 8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소련과 몽골의 의도대로 호롱바일 초원 전부가 몽골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결국은 일본의 패배였다. 한마디로 관동군의 실제 전력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호되게 당한 이들이 미국·영국과 맞서는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태평양전쟁의 발단이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304호 2013년 1월 6일, 제305호 2013년 1월 13일, 제306호 2013년 월 20일, 제307호 2013년 1월 27일, 제308호 2013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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