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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논란의 김성근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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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프로야구는 김성근으로 시작해서 김성근으로 끝나고 있다. 지난해 말 한화 이글스 팬들은 김성근 감독의 선임을 한화 그룹에 요구했다. 프로야구의 소비자운동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크고 거센 물결이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팬들의 외침에 응답했다. 김성근은 만 73세에 한화 지휘봉을 잡았다.

프로야구의 '경계인(景界人)' 김성근, 그를 보는 엇갈린 시선 사이에서...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즌이 시작된 후에도 김성근 감독은 뉴스와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과거 6년 동안 5차례나 최하위를 했던 한화는 시즌 초부터 중위권을 오르내렸다. 숱한 역전 승부와 끝내기 승리부터 선수 혹사 논란까지 수많은 화젯거리가 쏟아졌다.
 
김성근 감독은 또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 시즌 초 기대와 찬사 일색이었던 팬들의 반응도 한결같지 않다. 그의 선수 기용법과 리더십 스타일에 대한 반감도 있다. 그럴수록 김성근은 더욱 김성근답게 말하고 움직인다. 한평생 그는 논란을 피한 적이 없다. 그걸 정면 돌파하며 살아왔다. 비난을 찬사로 바꾸기도 했고, 찬사가 비난으로 변하기도 했다. 짧게는 1984년 OB 베어스 감독으로서 프로야구 사령탑에 오른 이후부터, 길게는 50년 전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영구귀국을 한 뒤부터 그는 그랬다.
 
누군가에겐 야구의 신이라 추앙 받고, 누군가에겐 냉혹한 독재자라 불리는 김성근은 한국 프로야구의 경계인(境界人)이다. 기자 또한 김성근에 대한 엇갈린 시선의 경계에서, 그를 다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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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60년 야구인생 타임라인. 클릭하면 확대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비난과 찬사 사이
 
지난 4월 14일 대전 삼성전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은 취재진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나흘 전 부산 롯데전 얘기를 꺼냈다. 권혁이 9회부터 2와 3분의1이닝 동안 불꽃투를 했으나 9-8이던 연장 11회 말 투아웃에 김 감독은 권혁을 송은범으로 교체했다. 송은범은 초구를 던져 장성우에게 역전 끝내기 투런홈런을 맞았다.
 
이날 한화는 5회까지 2-8로 밀리다 9회 5점을 뽑아 8-8 동점을 만들고 연장 승부를 벌였다. 공 하나로 극적인 한화의 대역전승이 더욱 극적인 롯데의 재역전 끝내기 승리로 바뀌었다. 김 감독은 “내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김 감독의 특징. 그는 다른 감독과 달리 실패를 이야기하길 꺼려하지 않는다. 앞선 경기를 복기할 때 김성근 감독은 주로 패한 경기에 대해 말한다. 다른 감독, 특히 노(老) 감독일수록 누군가 패한 경기를 떠올리게 하면 매우 불쾌해 한다.
 
김성근 감독은 반대다. 패한 경기도 몇 번을 되돌아보며 실패와 실수를 찾아낸다. 패인을 말하는 게 고통스럽지만 다음에 또 지는 게 더욱 두려워서다. 말하고 자책하며 나무란다. 김 감독은 가능하다면 실수 한 번 없이 완승하고 싶을 것이다. 시즌 144경기를 모두 이기고 싶을 것이다. 이런 점이 야구 장인(匠人)의 풍모이며 자비 없는 승부사의 면모다.
 
승리에 대한 지독한 열망. 이것이 김성근 감독이 찬사를 받는 이유인 동시에, 비난을 받는 이유다. 치밀한 전략을 짜고, 상대의 전의를 꺾고, 전력을 다 쏟아 부으며 이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는다. 그가 태평양·쌍방울·LG·SK를 강하게 만든 비결이다.
 
승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안티 세력을 만들었다. 4월 초 롯데전 빈볼 시비, 8월 불펜투수 혹사 논란, 9월 청주구장 CCTV와 스마트워치 의혹 등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팬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CCTV 의혹이나 스마트워치 논란은 진위를 따져보면 해프닝에 가깝다. 논란에서 ‘김성근’이라는 이름을 빼면 휘발성이 약해질 사안이 많다. 김성근의 팀이기 때문에 전반기 한화의 상승세가 가팔라 보였고, 후반기 하락세가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김성근 감독 자체가
논란을 생산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게 찬사든, 비난이든.


혹사와 무리 사이
 
김성근 감독의 연관어는 혹사(酷使, 혹독하게 일을 시킴)다. 실제 두 단어는 포털사이트의 연관 검색어로도 뜬다. 지난해 11월 가을캠프부터 올해 봄캠프까지 이어진 강도 높은 훈련은 단련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할 만큼 빡빡한 스케줄은 김 감독이 과거 LG, SK 시절부터 이행한 것들이었다. 그건 그만의 매뉴얼이었고, 항상 성과를 냈다.
 
시즌 초 한화는 이른바 특타(특별타격훈련)으로 화제를 모았다. 휴일인 월요일은 물론 홈경기가 끝난 후 자정까지 특타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건 과거보다 빈도와 강도가 더 높았다. 선수단 평균 나이가 30대인 한화에서, 국가대표급 타자인 김태균·정근우·이용규까지 특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의문이 논란으로 번진 지점이 마운드 운용이었다. 시즌 초부터 권혁·박정진·송창식이 많은 투구와 보직 파괴로 한화 마운드를 떠받들었다. 불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혹사 논란이 일었다.지난 8월 29일 한화의 서울 숙소 삼정호텔에서 만난 김성근 감독은 혹사 논란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혹사…? 물론 무리지. 오버워크(overwork·과로)야. 그러나 그런 과정 없이 선수가 강해지지 않아.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노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어. (앞에 물컵을 가리키며) 자신의 한계가 이만큼이라면 여기까지만 하면 안 돼. 그러면 한계가 점점 줄어. (나이가 들면 그런 것이냐고 묻자) 아니, 나이가 들지 않아도 가만히 있으면 줄어든다고. (물컵 크기의 반 정도 높은 곳을 가리키며) 이만큼으로 한계를 설정해야 자신을 극복할 수 있어.”
 
 
김성근 감독 인터뷰 영상 바로가기

그의 주장은 선수의 몸은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는 ‘단련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의 세대 대부분이 신뢰하는 이론이다. 반면 선수의 몸은 쓰면 쓸수록 닳는다는 ‘소모설’이 있다. 미국 야구에 영향을 많이 받은 젊은 지도자들은 대개 ‘소모설’을 추종한다. 김성근 감독은 단지 단련을 말하지 않는다. 극한에서 얻는 게 따로 있다고 말한다. 구위가 떨어진 권혁을 왜 자꾸 쓰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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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나눔올스타 소속으로 투구 중인 권혁.

“올스타전에서 권혁이 던지는 걸 봤어. 힘 빼고 던지는 모양(폼)이 좋더라고. ‘아, 이 녀석이 (마무리를 하느라) 부담이 컸구나’라고 느꼈지. 이후 계속 직구만 던지다가 맞았잖아? 근데 얼마 전(8월 말)부터 좋아졌어. 커브를 던지더라고. 계속 그러라고 했지. 그러면 권혁이 한 단계 성장하게 된 거야.”
그러나 권혁은 계속 부진하다. 시즌 초에 비해 구위가 떨어지고 공이 가운데로 몰린 탓이다. 권혁은 지쳤을 뿐 투구 패턴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김 감독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김성근 감독이 불펜의 특정 투수를 많이 쓰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7년 계투로 20승을 올린 쌍방울 김현욱, 2001년 구원·다승·승률 3관왕을 차지한 LG 신윤호가 그랬다. 김성근 감독은 무명에 가까웠던 이들을 발굴·성장시켜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많이 던졌다. 전성기가 오래가지도 못했다. 이에 대해 김현욱 (현 삼성) 코치에게 물은 적이 있다.
 
 
김성근 감독 인터뷰 영상 바로가기

“아니죠. 감독님 덕분에 전 계속 발전했어요. 97년엔 (쌍방울 투수가 부족하니까) 이기는 경기에 승리투수가 될 포인트에 등판한 겁니다. 이듬해에도 삼성으로 이적했을 때도 구위가 떨어진 건 아니에요.”
 
신윤호도 마찬가지다. “김성근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1군에도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사고뭉치였던 그는 짧았지만 뜨거운 1년을 보낸 것에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권혁은 삼성에서 뛰는 동안 최고가 될 수 없었다. 삼성에는 워낙 뛰어난 불펜투수들이 많아서였다. 그러나 한화로 오자마자 김 감독은 그를 불펜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흔 살 박정진은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권혁과 함께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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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욱(左), 신윤호(右)



그래도 이들이 너무 많이 던지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핵심 불펜진의 잦은 등판이 정작 필요할 때 힘을 모으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선수의 잠재력을 찾아내 장점을 극대화 하는 건 리더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그러나 특정 선수에게만 의존하는 건 리더의 약점이다. 김 감독은 이번에도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다.
 

SK와 한화 사이
 
김성근 감독 최고의 전성기는 2007~2011년 SK 지휘봉을 잡았을 때였다. 앞서서도 그는 ‘꼴찌를 4강으로 올려놓는 감독’으로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우승은 하지 못하는 감독’이라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위권 전력의 팀을 4강에 올려놓은 김성근 감독이 듣기에는 좀 억울한 말이었다. 그는 중위권 팀인 SK를 세 차례나 우승시키며 ‘우승 청부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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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SK가 우승하며 김 감독은 부임 후 3번의 우승을 일궈냈다.


어느 팀이나 2년 이상 우승권에 있으면 불펜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SK는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뿐만 아니라 아시아시리즈까지 전력으로 치렀다. 전력 소모, 특히 투수력 소모가 많았지만 지금처럼 거대한 논란으로 번지지 않았다. 정우람·전병두·박희수 등 젊은 투수들이 불펜에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근 감독은 올 시즌을 시작하면서 “5~6월까지 버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누군가 후반기에는 권혁·박정진·송창식을 도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을 대체할 만한 투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자 셋에 대한 부담이 가중됐고 그게 역전패로 이어졌다.
 
2007년의 SK는 20대 중반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커나가는 시점이었다. 유망주였던 선수들이 김 감독의 지휘 아래 체력적으로, 기술적으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강해졌다. 2007년 초부터 전력질주한 끝에 정규시즌 우승까지 내달렸다.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을 내주고도 역전승했다. 감독과 선수, 팀 전체가 강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상승한 시기였다.
 
한화의 2015년은 과거 SK와 분명 다르다. 한화 선수단의 평균 나이는 32세 정도로 10개 구단 중 가장 많은 편이다. 과거 한화 감독들은 훈련을 많이 시키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지난 2월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말했다.
 
“선수들이 워낙 힘들어 해서 훈련 강도를 낮출까도 고민했어. 그러나 생각을 바꿨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고,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노인이 가만히 앉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 훈련을 통해 발전할 방법을 찾아야지.”
 
올 시즌 전반기의 한화는 불꽃같았다. 9월 6일 두산과의 홈경기에서 올해 21번째 매진을 기록했다. 가장 높은 TV 중계 시청률을 기록한 팀도 한화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한화의 힘이 떨어지고 있다. 뜨겁게 불타오른 한화도, 차갑게 식어버린 한화도 김 감독의 공로이자 책임이다.
 
이 지점에서 김성근 감독은 역시 경계에 있다. 김성근이란 이름을 지우고 여러 논란을 차치하면 시즌 막판까지 5위 싸움을 하고 있는 한화는 지난해보다 분명 강해졌다. 그러나 7월까지의 한화에 비해 7월 이후의 한화는 많이 약하다. 2002년 LG, 2007년 이후의 SK는 시즌 막판에 더 강했지만 한화는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있다. 김성근 감독의 훈련 성과가 기대만큼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
 
김성근 논란의 핵심은 정도(程度)의 문제다. 훈련을 시키는 건 좋은데 왜 그렇게까지 시키느냐, 전력(특히 불펜)을 짜내는 건 좋은데 왜 그렇게까지 무리하느냐, 항상 최선을 다하는 건 좋은데 왜 마라톤 같은 레이스를 단거리 경주처럼 하느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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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가츠라고 재학시절, 재일동포 야구팀 소속으로 활동했다.

자신과 자신이 이끄는 팀을 극단으로 몰아넣는 건 김성근 감독이 1971년 처음으로 감독(기업은행)이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다. 절대로 안주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것, 상대가 질릴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다. 왜 그럴까. 김성근 감독을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단어는 고독이다. 재일동포였던 그가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와 50년을 버틴 과정 모두가 그랬다. 기업은행 에이스 투수였던 그는 어깨 부상을 당해 야수(1루수)로 전향했고 만 스물일곱 살이었던 1969년 은퇴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평생 새 옷이라는 걸 입어본 적이 없어. 가난하게 살다가 한국에서 야구선수로 사니까 정말 풍족하게 살았지. 1961년 기업은행에서 뛸 때 월급이 15만환이었어. 65년 영구귀국하니까 월급이 30만환으로 뛰었어. 당시엔 엄청난 돈이었지. 낮엔 야구 열심히 하고 밤엔 술 마시고 번 돈을 다 썼어. 은퇴한 뒤 은행원(기업은행)으로 일도 했지. 여행원들이랑 돈 세는 일도 했어. 나 빼고 다 여자였지. 운동선수였던 내가 온종일 앉아서 돈만 세고 있으니 ‘이게 뭔가’ 싶더라고. 그만 두고 나서 야구가 더 절실해졌어.”
 
선수 시절부터 김성근의 눈썰미와 두뇌회전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업은행 감독에서 충암고 감독, 다시 신일고 감독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그의 가치는 점점 높아졌다. 당시 고교야구 인기가 높았던 시절이다. 특히 충암고 감독으로 부임할 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계약금 600만원을 받았다. 김성근 감독 회상에 따르면 1970년대 기업은행 대리 월급이 15만원 정도였단다. 계약금의 개념조차 생소했을 때 은행원 월급의 40배를 일시금으로 받았으니 당시 그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사택도 제공됐다.
 
“지금 프로팀 감독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돼. 계약금 600만원을 받았다고 학생들이 나를 ‘600만불의 사나이’라고 불렀다고.”
 
아마추어 감독으로서 그는 꽤 잘 나갔다. 각 지방을 돌며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고, 당시 한국야구에 없었던 전력분석원을 활용했다. 따로 사람을 둔 건 아니고 눈썰미 좋고 머리회전 빠른 조범현(충암고) 등을 상대팀 훈련장에 보내 전력과 전략을 파악하도록 시킨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고 그는 OB 베어스 코치가 됐다. 1984년 OB 사령탑에 오르며 영욕의 감독인생이 다시 시작됐다. 재일동포 출신이 한국 프로야구 감독을 하니 질시의 대상이 됐다.
 
“언젠가 그라운드를 지나가는데 다른 팀 코치가 그러는 거야. ‘이 XX야, 야구 그거밖에 못해?’ 이게 무슨 소린가 했지. 흐음…. 우리가 상대 팀한테 졌는데 상대 팀으로부터 욕을 먹는 거야.”
 
OB를 떠나 쌍방울, 태평양 지휘봉을 잡았을 때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를 두고 야구계 선후배들이 ‘반(半)쪽바리’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쓰던 시절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승리에 집착했다. 지연이나 학연이 없는 그가 한국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이기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만든 신화는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비주류가 주류를 꺾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그가 이끌었던 팀이 전력 이상의 성과를 낸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과거의 성공을 바탕으로 미래의 성공을 자신한다. 자기가 이뤄낸 것들을 다른 사람도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자수성가형’ 리더의 특징이다.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뿌리 내리지 못한 그는 자신의 에너지를 승리에만 집중해 왔다. 그게 김성근의 학연이고, 지연이고, 혈연이다.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해서, 남들보다 힘든 과정을 거쳐서, 남들보다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게 김성근 야구의 요체다. 그러다 보니 훈련방법과 선수기용 등이 극단으로 흐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LG 트윈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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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신과 야인 사이
 
2015년 프로야구 전반기에는 야신(野神)이 이겼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야신이 지고 있다. 혹사 논란이나 선수 기용문제보다 본질적인 건 김성근 감독이 많이 지고 있다는 것이다. 승리와 반등으로 모든 잡음을 잠재웠던 SK 시절과는 다르다.
 
김성근 감독에게 야신이라는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야신은 무슨…. 실수투성이인데…”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얼른 다른 얘기를 이어갔다. 겸손의 뜻을 담기도 했겠지만 야신이라는 말이 꽤 불편해 보였다. 최근에는 더욱.
 
김 감독이 선수단을 이끄는 동력은 두 가지다. 승리함으로써 논란을 잠재우고 파이(연봉, 성과급 등)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기술과 언변으로 선수들을 장악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전반기 때 5할 넘는 승률을 기록했고, 경기가 있는 날 최대 7명의 선수와 독대했다. 또한 어느 감독보다도 언론 인터뷰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5할 승률이 깨지면서부터, 중위권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김성근 감독은 흔들렸다. 지친 불펜투수들이 역전패를 자주 허용했고, 순위를 지키기 위해 무리한 투수운용이 이어졌다. 힘을 쓰고도 이기지 못하니 선수들은 더욱 지쳤다. 부상자들도 점차 늘어났다.
 
악순환은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할 때부터 시즌 초 돌풍을 일으켰을 때까지 미디어의 찬사는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와 인터뷰하며 그의 언변에 빠지는 건 대부분의 야구기자들이 거치는 과정이다. 특히 2015년엔 젊은 기자들이 그의 주위에 많았다. 젊은 기자들은 빠르게 뜨거워지고 그만큼 빠르게 식는 경향이 있다. 김성근 감독의 신격화 작업은 매우 빠르게 이뤄졌다.
 
한화 성적이 떨어지자 신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김 감독의 말투와 발음 때문에 엉뚱한 코멘트가 전달되기도 했다. 그러자 그가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상당수 미디어는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이런 갈등과 오해는 과거 SK 시절에도 일어났지만 지금의 정도는 훨씬 심하다.
 
김성근 감독은 이슈의 중심에 있으면서 거기 홀로 서있는 야인(野人)처럼 보이기도 하다. 지금이 딱 그렇다.
 
선수들이 느끼는 감독과의 거리도 예전보다 멀어 보인다. 김성근 감독은 예전부터 워낙 강한 리더였다. 그래도 SK 시절엔 몇몇 선수가 고민도 털어놓고 농담도 했다. 지금은 누구도 그에게 편하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화 야구단에 관한 전권을 가졌고 야구의 신으로 불리는 70대 감독에게 말 붙이기는 누구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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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김독은 2012년 고양 원더스 부임 이후 2014년 구단 해체 시까지 총 22명의 선수를 프로 무대에 세웠다.


그가 SK를 떠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에 있었던 3년 동안 프로야구는 많이 달라졌다. 그가 2015년 프로야구를 이해하고,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감독 1인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건 쉽지 않다. 최강팀 삼성과 그를 추격하는 NC·넥센 등은 모두 정교하고 안정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야구는 끊임없이 변한다. 선수들도 변한다. “한화 선수들과 어떻게 소통하는가. 선수들 생각이 예전과 다를 텐데”라고 김성근 감독에게 물었다.
 
“젊은 선수들에게 늘 하는 말이 ‘팀이 있어야 네가 있는 것’이라는 거다. 어려울 때 참아야 하고 서로 도와야 팀이 산다. 그러며 그 안에서 개인이 더 강해진다고 말한다.”
 
김성근 감독이 추구하는 가치와 선수들에게 이를 전하는 방식은 똑같다. 그러나 선수단, 미디어가, 팬들이 이를 과거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의문이다. 전반기에는 김성근 감독이 다른 사람들을 끄는 힘이 강했다면, 후반기에는 그 힘이 약해졌다. 이길 때는 야신 같았고, 질 때는 야인 같아 보였다.
 
2015년 한화의 야구는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평가될까. 9월까지 나타난 결과를 보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볼 수 있겠다. 인터넷에서 그를 비난하는 팬들이 늘었지만, 오프라인에서 그에게 열광하는 팬들도 여전히 많다. 지금 그는 성공과 실패의 경계에 있다.
 
김성근 감독은 남은 2015년, 그리고 2016년 이후에도 변할 것 같지 않다. 50년 넘는 논란을 거치면서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던 김성근이다. 그는 “뒤에서 남을 욕하지 않겠다. 욕을 먹더라도 내가 앞에 서서 먹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을 둘러싼 논란은 과거형이자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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