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정철근의 시시각각] 민주노총의 ‘적반하장’ 사과문

기사 이미지

정철근
논설위원

 민주노총이 ‘9·23 총파업대회 위원장 사과문’이란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혹시 23일 불법시위에 대한 유감 표시라도 들어 있나. 제목만 보고 잠시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죄송하다는 표현은 한마디도 없었다. 오히려 더 강력한 투쟁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한상균 위원장의 자아비판에 가까웠다. “광화문에 운집한 조합원들의 힘을 모아내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으로 대회를 마무리한 것은 보다 강력한 투쟁이 필요한 이 시기에 잘못된 결정이었다.”

 투쟁이 무기력했다는데 그날 저녁 서울 도심은 교통지옥으로 변했다. 민주노총이 정동·광화문 등에서 기습시위를 벌인 탓이다. 원래 집회는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수백 명이 모이는 조건으로 허가가 났다. 하지만 건너편 강북삼성병원의 구급차가 겨우 들어갈 정도만 비웠을 뿐 5500여 명의 조합원들이 대로 4차로를 점거했다. 철통 같은 조합원들의 보호 속에 불법시위 주도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한상균 위원장이 연단에 나타났다.

 한 위원장은 9·13 노사정 합의를 ‘파렴치한 야합’으로 규정하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박근혜 정부를 ‘살인정권’으로 표현하는 그에게 대화의 여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좌파로 불리는 민주노총의 강경세력에게 사회적 합의는 야합을 뜻한다. 집회 현장에서 나눠준 ‘노동자연대’의 유인물엔 이들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동안 온건한 노조 지도자들은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들 핑계를 대며 민주노총의 투쟁성을 잠식해왔다. 그러나 비정규 노동자들을 대변하려면 오히려 투쟁성을 고무해야 한다.”

 민주노총 내에도 국회 내 논의기구라도 참여하자는 대화론자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대개 강경파에 묻혀버린다. 노무현 정부 때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다 강경파의 흔들기에 밀려 물러난 이수호 전 위원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노사정 주체는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같은 대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친노(親勞) 성향 대통령에 노동부 장관은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은 김금수였다. 김대환 장관은 이수호 위원장의 고교(대구 계성고) 동기,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이끌었던 노조 지도자들에게 대부 같은 존재였다. 재계에서 노사정 협의가 너무 친노동 쪽으로 치우칠까 우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민주노총 내 강경세력은 이수호 집행부를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하며 흔들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20일 영등포 구민회관에서 열린 대의원 대회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귀에 피어싱을 한 대학생이 이수호 위원장의 팔을 꺾고 시너가 뿌려졌다. ‘소수의 깽판’이 민주적 절차를 어떻게 훼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노총이 노사정 대화에 참여했지만 결국 빠졌다. 일부 강경세력의 반발로 협상안이 뒤집어지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앞으로 민주노총의 반대와 국회 입법 과정을 극복하는 게 험난하다는 얘기다.

 새정치민주연합 추미애 경제정의·노동민주화특별위원장은 “한국노총만 불러 한 게 어떻게 대타협이냐”며 벌써부터 날을 세우고 있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 같지만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야권이 집권했을 때도 민주노총이 참여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강경세력에겐 노무현 대통령도 신자유주의 노동구조를 고착시키려는 타도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무리 러브콜을 보낸들 장외투쟁을 포기하고 대화에 참여할까.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려면 어미의 체온이 필요하다.” 2005년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적 대화를 결정한 뒤 민주노총 간부가 한 말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화답해줘야 노사정 대화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어렵게 성사된 합의가 정치권의 정략에 따라 변질되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노사정은 이제 겨우 알을 품었을 뿐이다.

정철근 논설위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