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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는’ 아베 총리

지난 9월19일 새벽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에서는 집단자위권행사가 가능하도록 자위대법 등 11개의 안보관련 법안이 참의원을 통과했다. 찬성 148표 반대 90표의 압도적 표차였다. 지난 7월16일 중의원에서 강행처리 된지 94일만이다.
1946년 11월 평화헌법이 공포된 후 70년 가깝게 지켜 온 전수방위(專守防衛 오직 방어만 위한 무력만 행사)원칙은 그 날로 깨졌다.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적극적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의 일본은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 시간에 국회를 에워싼 시위대로부터 ‘헌법을 지켜라’ ‘아베 야메로(그만 두라)’라는 구호가 밤하늘을 덮었다. 노벨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안보법안 통과되면 평화헌법하의 일본은 없어진다’고 호소하였지만 허사였다.
국회에서 표결 저지에 실패한 오카다 민주당 대표는 국회의 가결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으로, 안보법제를 백지로 되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후진국에만 있을 법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날치기로 강하게 밀어 붙인 아베 총리는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룰이다’라면서 몸싸움의 와중에서 한가롭게 책보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국으로서도 중대 사안이다. 안보법제는 양날의 칼이다. 호전적인 북한을 마주하고 있는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은 미일동맹의 강화가 유리한 면도 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일본군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유사시에 주한 미군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빌미로 일본군(자위대)이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동의나 요청 없이는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이 불가하다. 한민구 국방장관도 “미군의 요청이 있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TV에 비치는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의 시위대를 보면서 55년 전 1960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정권 당시의 안보투쟁을 생각한다. 당시에도 국회 의사당 주변에 시위대가 몰려 와 안보조약 개정반대 시위를 했다. 그 때 7세의 어린 아베 소년은 총리관저에서 놀고 있었다. 관저를 에워 싼 시위대는 ‘안보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인 기시 총리가 관저로 들어오자 아베 소년은 ‘안보반대!’를 따라 외쳤다. 기시는 손자를 귀엽게 바라보고 빙그레 웃었다.
1950년 6월 북한이 불시에 남침하면서 한반도의 적화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국은 스탈린의 아시아 공산화를 견제할 수 있는 일본의 독립을 위해 평화조약이 필요해졌다.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을 포함하는 49개국 연합군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평화조약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는 미국의 요청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도 사인한다. 미국과 처음으로 맺은 안보조약이다. 안보조약에 근거하여 점령군 미군이 재일미군의 지위로서 일본에 계속 주둔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서방 세계가 중심이 된 평화조약을 부인하고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하는 안보조약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하였다.
1957년 총리가 된 기시는 전승국과 패전국의 색채가 강한 요시다의 안보조약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안보조약은 미군이 일본 정부의 동의 없이 일본 내 내란진압에도 출동할 수 있는 반면에 일본은 미군에게 기지 제공이라는 편무적 역할에 머무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1960년 1월 기시 총리를 대표로 하는 안보조약 개정 교섭 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을 만난다. 기시 총리는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개정된 안보조약(신 안보조약)에 서명하고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을 방일 초청하였다.
개정된 안보조약에 내란조항을 없애고 재일미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 자위대(1954년 창설)가 미군과 함께 방위를 하도록 하는 미일 공동방위를 명문화하였다. 새로운 안보조약은 기시의 숙원인 대등한 미일동맹 조약으로 평가 받았지만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말려들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다.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국회 심의 과정에서 당시 야당인 사회당이 반대하고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연합)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 시민들의 격렬한 반대 시위에 부딪쳤다. 종전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대한 거부감이 국민들을 불안케 하였다. 당시 여당인 자민당에서는 ‘안보소동’으로 과소평가 하였지만 전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민중 시위의 ‘안보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기시 내각으로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일하는 6월 19일에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5월19일 중의원 특별위원회에서 표결을 강행하였다. 당시 사회당의 의원들이 연좌하여 표결에 반대하였으나 자민당은 경찰을 동원하여 반대 의원들을 모조리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었다. 5월 20일 중의원 본회에서 안보조약 개정안이 통과 되었지만 특별위원회의 강행 표결에 실망한 이시바시 단잔, 미키 다케오 등 총리를 역임한 자민당 중진들은 본회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보조약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면서 학생 시민들의 반대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미국의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제임스 하저티(James C. Hargerty) 백악관 공보비서관이 선발대로 방일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는 하네다 공항에서 하저티 비서관이 탄 자동차를 에워쌌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자 미군의 헬기가 동원되어 구출하는 소동도 빚었다.
6월15일 우익단체가 시위대를 습격하여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와중에 ‘미치코’라는 도쿄대학의 여학생이 압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정국이 예상외로 나쁜 방향으로 발전되자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은 방일을 무기 연기하였다.
6월 23일 미일 양국은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안보조약 개정안은 발효된다. 같은 날 기시 총리는 정국의 혼란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발표하고 7월15일 개관사정(蓋棺事定 죽어서 관 뚜껑을 닫은 뒤의 평가)을 받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총리 직을 사퇴한다. 태어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산모가 희생된 격이다.
1960년 5월 안보조약 개정안의 통과와 2015년 9월 안보법제의 가결이 다르면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시와 아베 총리는 전후체제의 탈피를 주장하고 강한 일본을 지향한다. 55년 전에는 소련에 대한 미일의 동맹 강화라면 지금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할 수 있는 강화된 미일동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변국의 반응도 갈라진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Pivot to Asia)’ 정책에 제도적 틀이 마련되었다고 환영한다. 중국은 중일간 군비경쟁을 경고하면서 극도로 반대한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필리핀 등 중국의 팽창(군사굴기)에 위협을 느끼는 국가는 환영한다.
아베 내각이 강행처리도 닮은 데가 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5년 전의 강행처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쫓겼고, 이번에는 아베 총리의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지난 4월 방미 시 오바마 대통령에게 ‘여름까지 안보관련 법안을 통과 시키겠다’고 약속한 것에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대형 연휴 전 날인 9월18일을 데드라인으로 잡았다. 연휴가 끝나면 국회의 회기가 끝나간다. 그런데 9월18일은 공교롭게도 84년 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날이다.
반대 시위도 젊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기시 정권 때에는 ‘전학련’이었다면 지금은 ‘실즈(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가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허약한 야당을 대안세력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서 심판을 하겠다고 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자민당의 ‘강행처리가 적절치 않다’고 응답이 60%에 달하고,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계속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안보법제의 무리한 통과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기시 정권처럼 신생아를 위해 산모가 희생될지도 모른다.
일본의 안보법제 통과로 동북아 정세는 미일과 중국과의 대립이 첨예화 되는 신 냉전으로 전환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한국이 둘 중 하나의 선택은 최악이다. 돈독해진 한중 관계를 기반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굳건한 한미 동맹과 이를 위한 일본의 협력(用日)이 필요하다. 격동의 동북아 정세를 내다보면 한국의 ‘창조적 외교’가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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