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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돌아온 JP, 박정희 묘소 직행…“제 길을 가겠습니다, 지켜보십시오” 정치인생 2막의 의지를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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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86년 나는 오랜 기간 미국에서 머물며 지냈다.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었기 때문에 국내에선 옴짝달싹할 수가 없던 시기였다. 나는 조용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83년 4월 나는 미국 컬럼비아대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두 달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수요일마다 한 시간씩 후진국의 근대화에 대해 강의했다. 극빈에 처한 나라가 어떻게 하면 조금씩 근대국가로 변모해갈 수 있는지 내 체험을 전하고 가르쳤다. 6월 말부터는 워싱턴·뉴욕·보스턴 등지를 다니며 미국 정계 인사와 교포·친지들을 만났다. 그중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다. 베니그노 아키노와의 마지막 만남이다.

 필리핀 야당 지도자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두 번 방한한 적이 있어 나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마르코스 정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80년 5월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83년 8월 초 하버드대 동양학연구소의 브라운 교수가 주최한 특강에 나와 아키노가 함께 강사로 초청됐다. 강의가 끝난 후 아키노와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아키노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고 밝혔다. 84년으로 예정된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 투쟁을 위해 귀국하겠다는 것이었다. 아키노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 뉴욕에 왔을 때 마르코스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마르코스는 ‘귀국을 지원하겠다. 내 라이벌이 되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아키노는 “확신을 줄 만한 이야기였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말렸다. “아키노씨, 가면 안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하고 권력만 탐하는 독재자들은 거짓말에 능합니다. 그들의 감언(甘言)을 믿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필리핀에 돌아가면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만류했다. 아키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어도 좋습니다. 나는 고국에 가겠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그를 더 이상 어떻게 막을 수는 없었다.

 83년 8월 21일 나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있었다. 일본 의원 120명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 머물던 중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호텔 방에서 신던 슬리퍼를 끌고 혼자 산책을 나섰다. 거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어느 상점을 들여다보니 TV 화면에 아키노가 나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TV 뉴스를 봤다.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한 중화항공 여객기 승강구로 아키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엔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찬 중령 계급의 군인이 서 있었다. 그 중령은 권총을 빼 들더니 아키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키노가 트랩에서 두 계단쯤 내려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총탄에 맞은 아키노가 피를 흘리며 트랩에서 굴러떨어졌다. 암살이었다. 그 모습이 TV 카메라에 그대로 담겨서 전 세계에 생생하게 방송되고 있었다.

 세상에, 백주(白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눈을 의심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말렸건만 귀국하자마자 이 무슨 참상이란 말인가. 세상이 온통 슬퍼져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울다가 허망한 마음에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졌다. 한 식당에 들어간 뒤에야 내가 지갑도 없이 슬리퍼 차림임을 알았다. 머물던 호텔로 전화했더니 직원이 “지금 행방불명이 되셨다고 호텔에서 야단이 났다”고 했다. 신발을 호텔 방에 놔둔 채로 사라졌으니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모양이다. 얼마 뒤 필리핀 정부는 아키노 암살범이 청부살인업자라고 발표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키노 암살을 계기로 필리핀에서는 대대적인 반마르코스 민주화 투쟁의 물결이 일어났다. 2년 반 뒤 아키노의 아내 코라손 여사는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통령에 오른다. 아키노의 죽음은 비참했지만 헛되지 않았다.

 나는 83년 10월 귀국했다. 80년 5·17 이후 숨죽이고 있던 야권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김영삼(YS) 전 신민당 총재는 김대중씨(DJ)의 측근인 김상현과 손잡고 범야권 연합체 결성에 나섰다. 84년 5월 발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였다. YS는 내게도 민추협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보내왔다. 구 공화당계로서 민추협에 가담한 중진 의원이 청구동으로 찾아와 같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사양했다. 나를 포함한 3김(金)이 아직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 있을 때였다. 80년 11월 만든 소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른 규제였다. 악법도 법이고 법은 지켜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었다. 84년 7월 나는 먼데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부터 전당대회 참관을 초청받고 다시 출국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쪽 벨링험시에 방 2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아내와 함께 머물렀다. 내가 미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DJ 측에서 연락이 왔다.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DJ는 82년 석방 뒤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의 회동을 제안했다. 나는 이 제안도 거절하고 그를 만나지 않았다. 독서와 그림 그리기로 소일하며 그저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서 내가 그린 것 중엔 술잔에 술을 따르는 그림이 있다. 그림과 함께 이런 글귀를 남겼다. ‘우리는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하지 않으면 아니되지만 그와 동시에 또한 불변의 원칙을 견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시절 나는 뒤로 비켜서 있었다. 뛰거나 걷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는 칩거했고 어느 땐 누워 있었다. 나의 그런 처신을 놓고 민주화 투쟁에 힘을 보태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다. 옛 공화당 동지 몇몇은 내가 정치 재기의 기회를 놓칠까 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YS·DJ에겐 그들의 길이 있고 나에겐 내 길이 있었다. 꼭 그들과 함께 뛰고 걸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85년 3월 6일 서울에서 딸 예리가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그 직전 2·12 총선에서 야당 바람이 불었고 정국 흐름이 급변하고 있었다. 예리가 나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가 풀렸다는 통보가 왔다고 전했다. 4년4개월 만에 정치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나와 함께 마지막까지 묶여 있던 YS·DJ를 포함한 13명도 이날을 기해 모두 해금됐다. 나는 담담했지만 정치권은 술렁였다. 내가 언제 귀국하는지가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기자가 찾아와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나는 “때가 오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하겠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고 답했다. 서울에서 종익·종락 형님이 차례로 찾아와 내게 귀국 시기를 물었지만 내 대답은 같았다. “현재로서는 결정한 바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겠습니다”고만 말했다.

 나의 귀국 시기에 촉각을 세운 것은 언론과 나의 측근들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모 대학의 학장이라는 사람이 샌프란시스코로 나를 찾아왔다. 처음 본 그 인물은 자신을 “전두환이 보내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실명을 쓰기엔 행위가 한심해 밝히지 않겠다. 그가 전한 전두환의 메시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가능하면 귀국을 늦췄으면 좋겠습니다.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에 귀국하십시오. 한국에 돌아오더라도 정계에 다시 진출하는 것은 그만뒀으면 합니다.” 그 말에 나는 웃으면서 “당신, 뭣 때문에 그런 심부름이나 맡아 가지고 왔소? 도대체 왜 한국이 아닌 미국까지 나를 말리러 왔단 말이오?”라고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답해줬다. “나는 귀국할 테니 마음대로 하시오. 내가 돌아가서 정치를 한다 안 한다, 그런 얘기는 지금 안 하겠소. 그러나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의지를 꺾지는 않을 거요.” 그러자 그는 “정치를 재개한다면 우리와 같이 하십시오”라며 나를 재차 설득했다. 나는 “같이 하는 일은 없소”라고 잘라 말했다.

 86년 2월 25일 나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귀국했다. 1년7개월 만이었다. 내 귀국을 기다려온 옛 공화당 인사 300여 명이 김포공항으로 몰려나와 환영해줬다. 그들의 박수에 화답하기 위해 대합실 의자 위에 올라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답례 제스처를 했다. 나를 둘러싼 기자들이 내게 귀국한 동기를 물었다. 나는 “잠깐 나갔다가 내 집에 돌아오는데 무슨 동기가 따로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왜 들어왔는지, 다시 나가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곧장 동작동 국립묘지로 직행해 고(故) 박정희 대통령 묘소부터 참배했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그새 7년 동안 전두환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된 추도식 한 번 열지 못했다. 송구하고 죄스러운 심정뿐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무덤 앞에서 눈을 감고 서서 속으로 말씀드렸다. ‘이제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지난날에 못다한 일을 이룩하려 합니다. 한번 지켜봐 주시지요.’ 바야흐로 나의 정치 생애 제2막을 열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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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소사전  베니그노 아키노(1932~83)=필리핀 정치 사상 최연소 시장·부지사·상원의원에 선출된 야당 지도자. 73년 대선을 앞두고 마르코스 대통령의 대항마로 떠올랐지만 72년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체포돼 8년간 구금 상태에 있었다. 77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80년 심장병 치료를 이유로 일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반마르코스 운동을 하다가 83년 8월 21일 마닐라공항 귀국 직후 괴한에 의해 피살됐다. 아키노 암살사건은 대규모 반정부 운동을 촉발시켜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86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 3세는 현직 필리핀 대통령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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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