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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정부와 언론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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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벌써 18년이 흘렀다. 외환위기의 해 1997년. 필자는 재정경제원(지금의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 취재를 맡고 있었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진로·대농·한신공영 등 간판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금융회사는 자금 미스매치(mismatch)로 고전했다. 선진국에서 3개월짜리 단기 자금을 꿔 동남아 국가에 1~2년 장기로 빌려줬다가 낭패를 봤다.

 97년 9월 홍콩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총회가 열렸다. 동남아 통화가치 하락과 기아자동차 부도 위기로 안팎으로 흉흉하던 때다. 정부는 해외투자자를 모아놓고 “한국 경제는 문제없다”고 설명했다. 투자자들은 냉랭했다. 난처한 질문을 쏟아냈다. 일부는 조롱 섞인 반응을 보였다. 설명회가 끝나자 얼굴이 벌게진 관료들과 몇몇 한국 기자만 휑한 행사장에 남았다.

 IMF에 손을 벌리는 외환위기가 사실상 확정된 순간이었다. 관료들은 외환위기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필자를 포함해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직감으로 느꼈다. 하지만 기사를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현상을 전달하되 가급적 차분하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위기다’ ‘망한다’는 기사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없는 것까지 부풀려 ‘큰일났다’고 써대는 언론도 있었다. 이런 언론은 시중의 찌라시와 다를 게 없다.

 강경식 경제부총리는 그해 가을 내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괜찮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만 ‘펀더멘털’ 운운한 게 아니다.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경제에 문제가 없다”고 지원사격을 했다. 몇 개월 더 버텼지만,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신세가 된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언론은 뭇매를 맞았다. 위기를 미리 경고하지 못했다는 질타였다. 억울한 마음이 있었지만, 국민의 분노가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하는 심정으로 견뎠다. 정부는 야단을 더 맞았다. 위기 불감증으로 판단이 안이했고, 펀더멘털이 좋은 것처럼 국민을 속였다는 게 비난의 요지였다. 정부가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대책이 없다. 망하게 생겼으니 짐을 싸라.’ 이렇게 말해야 속이 시원했을까.

 증시분석가 스티브 마빈이 외환위기를 예견해 유명세를 탔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앞뒤 따지지 않고, 거침없이 글로 옮겼을 뿐이다. 정부나 언론처럼 이것저것 고려할 필요가 없으니까. 외환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후에도 마빈은 “한국에서 떠나라”며 줄기차게 독설을 퍼부었다. 아무튼 정부와 언론은 역적이 되고, 마빈은 스타가 됐다. 학습효과는 무서웠다. 그 후 경제가 흔들릴 때면 어김없이 출처불명의 위기설이 나왔다. 1월, 4월, 9월…. 그때마다 시장은 출렁였고, 국민은 움츠러들었다.

 올해도 9월 위기설이 등장했다. 이달을 무사히 넘기면 또 다른 위기설이 나올 것이다. 경제여건이 좋지 않기는 하다.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 경제가 어렵다. 미국은 금리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식의 위기설은 불안감만 키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얼마 전 “중국 증시 불안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느슨한 상황 인식으로 위기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경제부총리가 “우리 경제가 큰일났다”고 떠들 수는 없는 일이다. 조용히 만반의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덩치가 쪼그라들고 있다. 선진국들이 돈을 찍어내는 양적완화로 버텼지만, 수요가 좀체 살아나지 않는다. 한국 경제도 저성장·저출산·저수익이 뉴노멀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 평탄치 않은 길을 가야 한다.

 그때마다 위기설을 외친다면? 경제는 심리다. 상황을 나쁜 쪽으로만 비틀어 공포를 조장하는 건 제 발등을 찍는 거다. 제2의 마빈을 꿈꾸며, 튀는 예측으로 자기 장사를 해볼 요량이라면 더더욱 곤란하다. 경제를 다룰 땐 붕괴·폭탄·쇼크 같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단어도 쓰지 말았으면 한다. 감추자는 게 아니라 과도하게 부풀리지 말자는 얘기다. 지금도 필자는 외환위기 때의 보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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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