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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한에 대한 아량 없이는 통일도 없다

스펜서 김
CBOL 대표
태평양세기연구소 공동창립자
몇 년에 한번씩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지 않으면 잊혀지는 만고의 진리에 관한 고전(古典)을 다시 꺼내 읽는다. 비즈니스에 관해서는 ‘창조적 파괴’의 경제학을 역설한 조셉 슘페터의 저서를 읽는다. 또 태평양세기연구소(PCI)의 활동을 위해 윌리엄 풀브라이트 전 미국 상원의원이 저술한 『권력의 오만』을 찾는다. 최근 풀브라이트 저서를 다시 읽고 그 책이 주는 분명한 메시지를 되새겼다. 즉 관용에 기초한 초당적 대북정책이 부재하는 한 한반도 통일에 대한 희망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풀브라이트 의원이 이 책을 쓴 해는 1966년이었다. 당시 미국은 치열한 베트남전에 빠져 있었다. 전쟁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과 반대가 유행하기 한참 전이었다. 풀브라이트 의원은 역사상 최장수 상원 외교위원장이었다. 59년 이후 15년간 상원 외교위원장을 맡아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후에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학자교류 프로그램을 출범시킨 법안을 앞장서 통과시켰다. 한국에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 많다.

 풀브라이트 의원은 인간이 상호 적대관계에 들어서게 되면 상대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성향이 있다고 봤다. 일단 상대가 악한이라는 관념이 박히면 타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그런 선입관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모든 정보를 취사선택하게 된다고 갈파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희망이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해도 무시하게 돼어 있다. 최근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가 월맹을 언급할 때마다 그 나라를 북한으로 대체해 보곤 했다. 그런데 기가 막힐 정도로 두 사례가 들어맞는 걸 발견했다. 즉 미국과 한국은 오늘날 북한을 당시의 월맹과 똑같이 대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풀브라이트 의원은 강대국일수록 그런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역설했다. 강대국은 국력과 선(善)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국의 ‘선한’ 의지를 상대방 국가들에 강요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바로 권력의 오만을 지적한 것이다. 관용만이 오만을 완화시킬 수 있다. 풀브라이트의 발언을 인용한다.

 “사실 개인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에도 호전성은 힘이나 자신감의 발로라기보다는 약점이나 자기 확신의 부족을 나타낸다. 약소국이 강대국에 꼿꼿하게 맞서는 것은 수긍할 만하거나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행동은 약소국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힘과 위엄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이 동일한 행태를 보이면 그것은 기괴한 ‘갑(甲)질’로 비쳐질 뿐이다. 위대함의 진정한 징표는 과시가 아니라 아량이다.”

 관용이라고 해서 북한에 대해 동조하거나 유약하게 보이라는 뜻이 아니다.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최상의 전략적 결과를 가져올 우리 쪽의 관대한 대응은 무엇일까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독일 통일 전 보수파인 기민당 출신의 국방장관이자 통독 과정에서 헬무트 콜 총리의 핵심 참모였던 폴커 뤼에는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PCI 창립 25주년 만찬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동독보다 훨씬 부강했던 서독이 관용정책을 초당적으로 추진한 결과 동독은 서독과의 통일을 염원하게 됐다. 동독에서 ‘붕괴’한 것은 집권 공산당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붕괴한 것은 아니었다. 동독은 자유선거를 통해 통일정책을 추진하게 될 정부를 선택했다.” 뤼에는 자신과 콜 총리는 당시 독일의 통일이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에도 최소한 1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수년간에 걸친 서독의 관용정책과 초당적인 동방정책에 힘입어 동독 주민들은 즉각적인 통일을 선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만일 점진적 통일을 바라는 진보파라면 관용에 기초한 초당적 대북정책이 긴요하다.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바라는 보수파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즉 북한 정권의 붕괴가 현실화하더라도 그 나라를 통치할 모종의 후속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만일 그 대체 정권이 남한을 상대할 때 자신들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거나 남한이 툭하면 호령이나 하고 화를 내고 횡포를 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들이 동독의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선택했던 길로 북한을 인도할 수 있을까. 또 김정은 정권이 별다른 도전 없이 40년 정도를 버텨 나간다고 가정할 때 과연 그가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하려고 할까.

 미국 남부 출신의 보수파였던 풀브라이트는 근대 보수주의의 철학적 원조로 불리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 “인간이 바로 학교다.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운다.” 향후 수년 동안 모든 북한 사람은 그들이 김씨 가문이든, 군의 지휘관이든, 당 간부이든, 공장 노동자이든, 농부이든 한국 사람들의 행동, 특히 그들이 관용을 베풀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보고 한국에 대한 여론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스펜서 김 CBOL 대표 태평양세기연구소 공동창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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